[삼강만평(三江漫評) ⑱] 만주 벼농사 사화(史話)
[삼강만평(三江漫評) ⑱] 만주 벼농사 사화(史話)
  • 정인갑<북경 전 청화대 교수>
  • 승인 2013.03.11 1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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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벼의 원산지는 인도라고 하던 것이 1980년대에 한인학자 유자명(柳子明)의 연구에 의해 중국 운남(雲南)으로 바뀌었으며 세계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유자명은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의 장관을 한 적이 있다. 광복 후 한국정부가 그를 공산주자의 사촌쯤 되는 무정부주의자라며 냉대하자 중국 호남대학(湖南大學)에서 생물학 교수로 여생을 마감했다.

중국 벼농사 역사는 고고학자가 절강성(浙江省) 여요현(余姚縣) 하모도(河姆渡)에서 발견된 벼에 의해 7,000년으로 본다. 한국의 벼농사도 4,000년의 역사가 있다고 하며 <삼국사기>에 ‘禾’라는 이름으로 많이 등장한다. 그러면 중국 동북(만주)의 벼농사는 언제부터 누가 시작했는가? 우리 겨레와 관계되므로 본문을 쓴다. <신당서(新唐書)>와 <요서(遼書)>에 발해국시기 노주(盧州)에서는 벼농사가 성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노주가 지금의 어디인가에 대하여서는 논쟁이 있지만 지금 연변(延邊) 용정시(龍井市)의 개산둔(開山屯) 일대, 안도현(安圖縣)의 명월진(明月鎭) 일대 또는 연길시의 흥안(興安) 일대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발해의 고구려 유민이 이 일대에서 벼농사를 지었다는 말이겠다. 그러나 926년 발해가 거란(契丹)에게 멸망한 후 이 일대의 벼농사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청나라 순치(順治), 강희(康熙) 연간에 성경(盛京)에서 벼농사를 많이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경 외에 광녕(廣寧), 개평(蓋平), 개원(開原), 요양(遼陽) 일대에서도 벼농사를 지었다. 성경은 청나라의 발상지인 지금의 요녕성 무순시(撫順市) 신빈현(新賓縣)이며 개원은 무순과 인접한 서북쪽이고 나머지는 모두 무순과 인접한 남쪽 지역이다.

이 지역의 벼농사를 누가 지었나에 대해서 문헌에 언급하지 않았지만 우리 겨레가 지었을 것이다. 정묘(1627), 병자(1636) 호란 때 우리 겨레의 약 60만 명이 청군에게 끌려가 이 지역에서 살았으니 말이다. 이 지역의 벼농사를 우리 겨레가 지었다는 방증이 있다. 1637년 조선 태자 소현(昭顯) 세자가 인질로 끌려가 심양에 8년간 갇혀 있었다.

앞선 5년간은 청나라 조정에서 양식을 대었는데 후 3년은 스스로 농사지어 먹으라며 경작지를 떼어주었다. 그 경작지가 심양서 2일 좌우의 노정에 있으며 조선인부로 논농사 지어 식량을 해결하였다는 기록이 명백히 있다. 심양서 2일 좌우의 노정이라면 바로 상기 벼농사를 지은 지역과 맞물린다.

1664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에 대청제국을 세운 후 자기의 발상지를 성지로 명명하고 봉금(封禁)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벼농사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 지역에 살던 우리 겨레도 혹은 북경주변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도 동화돼 버렸을 것이다.

지금의 벼농사는 1860년대부터 대량의 우리 겨레가 만주로 이민하여 새로이 시작한 것이다. 1875년 김씨성을 가진 조선인이 요녕성 환인현(桓仁縣) 하전자촌(下甸子村)에서 벼농사에 성공하였다. 약 10년 전 이 마을에 ‘동북수전제일촌’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맨 먼저 벼농사를 지었다는 마을이 여러 개이니 도대체 어느 마을이 제일촌인가는 좀 더 고증할 일이다.

지금은 북경지역도 벼농사를 지으며 북경에서 가장 알아주는 입쌀은 천진(天津) 지역의 소참미(小站米)이다. 이 소참미도 우리 겨레와 관계된다. 중공 정부가 수립된 이후 천진 소참미 출산지 일대에 해방군 한 개 사단이 농장을 꾸렸다. 바로 광복 전 조선인이 벼농사를 짓던 논인데 광복 후 조선인들이 다 떠나가고 황폐된 곳이다. 벼농사를 지을 줄 모르므로 동북 각 지역으로부터 조선족 약 20~30세대를 모집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농촌호적이고 농장원은 도시호적이어야 하였다. 농촌호적을 도시호적으로 바꾸기가 아주 어려운 때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 그들은 부득불 부근의 농촌에 가서 벼농사를 지었다. 바로 진황도시(秦皇島市)에서 서쪽으로 약 15킬로 떨어진 지금의 무녕현(撫寧縣) 유수영진(留守營鎭) 조선족촌이다.

수전은 한전보다 소출이 배나 높고, 벼는 다른 잡곡보다 가격이 50%정도 비싸므로 이 마을의 수입이 다른 마을보다 2배나 많았다. 조선족촌의 영도자 김종수(金鍾洙)의 건의에 따라 하북성(河北省) 정부에서 이 지역의 한족 농민들에게 명령을 내려 거의 강박적으로 한전을 수전으로 고치게 하였다. 지금 진황도로부터 천진, 나아가서는 북경까지 수전이 많은 유래는 광복 전 이 지역에서 논농사를 한 우리 겨레와 진황도 조선족촌의 공로이다.

북경으로부터 흑룡강성(黑龍江省) 가목사(佳木斯) 지역까지 광활한 지역의 벼농사는 실로 우리 겨레가 시작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10세기 발해 시기가 첫 번째이고, 17세기 중반이 두 번째이며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가 세 번째이다. 그러나 이 세 번의 벼농사가 서로 계승관계가 없는 것이 특이하다. 계승관계가 없는 것은 우리 겨레가 이 지역에 있다가 없다가 한 원인이므로 이 역시 이 지역의 벼농사는 우리 겨레와 관계됨을 더욱 유력하게 증명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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