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하늘 그리러 떠난 조풍삼화백
[시론] 하늘 그리러 떠난 조풍삼화백
  • 전대열<大記者>
  • 승인 2013.10.25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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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그림 그리는 사람을 가리켜 ‘환쟁이’라고 부르며 천대했다.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벼슬길에 들 수 있는 계급은 오직 양반뿐이었다. 그림을 그리거나, 소리를 하거나, 춤을 추는 행위는 모두 양반들을 웃기며 즐겁게 하는 하찮은 일에 속했다. 문화와 예술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으니 오늘날 예술인으로 각광받는 세상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타고난 예술적 소질을 가진 이들은 사회적 천대를 무릅쓰고 오직 자신의 재주와 끼를 살리는데 좌우를 돌아보지 않았다. 담징, 솔거로 대표되는 고구려와 신라시대의 그림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전설만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한다. 조선시대의 장승업은 임금님 앞에 불려간 궁중화가였지만 걸핏하면 뛰쳐나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려고 발버둥쳤다.

근대에 들어서도 이중섭, 박수근은 아무런 대우도 받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리는 그림쟁이였지만 사후 그들이 남긴 명작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천재 예술인들의 삶의 굴곡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양반계급에 속하면서도 예술적 끼를 주체할 수 없어 신분을 버리고 과감히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해낸 용감한 이들도 없지 않다.

이처럼 한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자 사회의 냉대나 천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간 사람을 우리는 예술인으로 존경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찬란한 문화유산을 간직할 수 있었으며 세계만방을 향하여 문화국으로서의 자부심을 뽐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0월20일 세상을 뜬 조풍삼화백을 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세계 제2차대전이 터지기 1년 전인 1940년 전주에서 비교적 부유한 과수원집에서 태어났다. 형제가 다섯이나 되었지만 그만은 특출한 그림 그리는 재주를 가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감히 따라갈 수 없는 화재(畵才)는 전주북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미술선생의 눈에 띄었다.

학교에서 발행하는 교지(校誌)의 삽화는 물론 미술선생이 전담하는 표지 그림도 그가 맡았다. 요즘 학생들은 대입시험에 나오는 국영수 위주로 교육을 한다고 하지만 그 때만 해도 미술, 음악, 체육 등 모든 예체능 수업을 다했다. 나와 같은 반이어서 운동장에 나가 도화지에 사생(寫生)을 하는데 나는 그림에는 젬병이라 남몰래 조풍삼에게 부탁했다. 내 것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조풍삼이 그린 ‘내 그림’을 의기양양하게 선생님께 제출했다. 일부러 조금 서툴게 그리긴 했지만 미술선생은 감정 전문가라 대번에 알아봤다. 당연히 나는 빵점을 맞았고 조풍삼도 혼쭐이 났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얽히면서 그는 서울대 미대에 들어갔다. 실기시험에서는 1등을 했으니 미술이라면 모두 한가락 하는 학생들 속에서도 그의 천재성은 역시 한 몫을 한 것이다.

1학년 시절 그는 미학과에 입학한 김지하를 만났다. 김지하의 본명은 김영일이지만 그 후 저항시인으로 이름을 얻으며 ‘지하’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했다. 조풍삼과 김지하는 어울려 술을 마시고 교정 벤치에 앉아 철학을 논하며 울고 웃었다. 조풍삼은 김지하의 푸념을 들으며 눈물이 흔한 그를 감싸기에 바빴다.

대학 2학년 때 4.19혁명이 일어난다. 미술대 학생들도 분연히 궐기하여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다. 여학생 한 명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장면을 본 학생들은 길길이 날뛰다가 많은 희생자를 냈다. 조풍삼 역시 선천적인 정의감을 이기지 못하고 앞장섰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가세(家勢)가 기울었고 형제들과 힘을 모아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며 집안을 일으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는 초창기 플라스틱에도 손을 댔으며 나중에는 예술적 감각을 살려 나무 핸드백을 만들어 인기를 모았다. 수출도 제법 자리를 잡았다. 커다란 공장도 인수하여 뚝섬에 그럴듯한 회사까지 차렸다. 그러나 돈과는 큰 인연이 없었던지 은행 빚을 갚지 못해 남의 손에 넘겨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림에 대한 그의 정열은 식을 줄 몰랐다. 틈틈이 짬을 내어 그린 그림으로 동호인들과 전시회도 열고, 없는 주머니를 털어 유럽을 한바퀴 돌며 미술계의 세계적 추세를 익히는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을 잘 알고 있는 주위 친구들의 도움으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화실(畵室)을 열었지만 끝내 안정적인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는 철저한 비국전파였기에 현실적인 전업(專業)작가로서는 여건이 좋지 않았다.

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문학과 음악 철학에도 단연 두각을 나타낼만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시를 썼다.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었지만 특히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바리톤 목소리는 듣는 이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했다. 그가 집필한 ‘살림’에 관한 글은 죽은 것도 살려내고, 죽어야 하는 것도 살리며, 죽게 생긴 것도 살려야 한다는 철저한 삶의 철학을 보여준다. 추상으로 일관한 그의 화풍(畵風)은 속세적인 인기는 없었지만 그의 기질과 사상을 알게 하는데 일조한다. 이제 그는 떠났다. 맑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이답게 훌훌 떠났다. 아마 하늘을 그리러 멀리 떠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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