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만평(三江漫評)-33] 중국의 기독교(상)
[삼강만평(三江漫評)-33] 중국의 기독교(상)
  • 정인갑<북경 전 청화대 교수>
  • 승인 2013.11.02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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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이벽, 정약전 등과 신앙공동체를 체결한 것이 시작이라면 한국의 기독교사는 230년이다. 그러나 중국의 기독교역사는 1,378년이나 된다.

서기 635년에 기독교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s)가 이단으로 밀려나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국 당의 수도 장안에 정착했다. 중국어에 기독교 술어가 없어 그들의 종교를 ‘경교’라 불렀다. 또한 ‘하느님’을 ‘아라하’, 예수를 ‘세존’, 성령을 ‘정풍’, 교당을 ‘사’, 신도를 ‘승’, 주교를 ‘상덕’이라 했다.

당 태종, 고종 등 6대 황제의 환대를 받으며 약 200년간 흥성하던 경교는 서기 845년 무종의 조령에 의해 없어지고 말았다. 그후 기독교는 11세기경 요나라 통치자의 허락을 받고 다시 중국에 진출했다. 원대 때에는 종교에 대한 정책이 더욱 느슨해졌으므로 기독교가 중국 전역으로 퍼졌다. 13세기 중엽 네스토리우스 주교 구역이 페르샤만 이동에 25곳이 있었는데 그중 4곳이 중국에 분포돼 있었을 정도였다.

당시 로마 천주교 프란시스코파(Order of Friars Minor)도 서기 1245년부터 중국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거듭 실패했다. 1294년 쿠빌라이가 로마 교황의 서함을 가지고 온 멩코비노를 접견하고 대도(현 북경)에서의 선교를 허용하였다. 멩코비노는 10년간의 노력 끝에 대도에 두 곳의 성당을 세우고 많은 신도들을 육성했다. 뒤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중국에 성직자 3명이 더 파견됐는데 그중에서 안드루는 복건 천주에 성당을 세웠다.

1328년 멩코비노가 사망하자 교황은 니콜라이를 중국으로 파견했지만 그 일행은 신강에서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1342년 마리노리 등 32명이 북경에 와서 4년간 봉사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기독교는 중국의 전통문화에 적응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며 대부분의 신자가 중국 거주 외국인이었다. 따라서 정치 풍파만 생기면 사라져버리곤 했던 것이다. 그후 로마 교황청도 분열의 악운에 처했고 원나라도 패배하고 북방으로 쫓겨났기 때문에 중국에서의 천주교 활동도 없어지고 말았다.

명나라 때 포르투갈 식민세력을 따라 예수회를 중심으로 하는 천주교가 다시 중국에 진출했다. 중국 선교에 성공한 예수회의 최초의 사람은 이탈리아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이다. 그는 중국어를 배우고 종교 의식을 중국 사정에 맞게 바꿨다. 처음에는 삭발에다 가사를 입고 서불이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비단옷을 입고 서유로 자처하기도 했다. 결과 관청의 허가를 얻어 북경대성당을 짓고 중국 천주교회를 세웠다. 중국의 저명한 천주교도 서광계 등은 모두 마테오 리치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예수회의 선교 활동은 조정의 지지를 잃어 저조기에 들어갔다. 게다가 마테오 리치가 사망된 뒤로 ‘천주’ 대신 ‘천 상제’라 부르고 공자 제사를 엄금하는 등 원인으로 천주교는 청 조정과 국민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선교사를 감금하거나 사형에 처하고 성당을 허물어 버리는 등 사건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1785년 예수회는 선교 200년 만에 결국 중국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세기 초 구미 열강의 중국 침략과 더불어 기독교 선교사들이 대거 중국으로 들어왔다. 1807년 중국에 온 영국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이 첫 기독교 목사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감시와 냉대에 부딪쳐 10년 동안에 채고 등 세 명의 신도에게 세례를 주는데 그쳤다. 결국 선교사들은 침략자의 총칼의 힘에 의지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침략자들에게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 정보를 제공해주고 침략자들은 불평등 조약에 선교사들의 중국내 특권을 보장해주는 조례를 삽입하는 식으로 서로 결탁했다.

선교사들은 또한 어린이 유괴, 부동산 강탈, 사법권 침범 등 횡포를 부리었다. 또한 유괴된 어린이가 교회 안에서 수십 명이나 죽은 사태가 천진에서 발생했다. 이에 대해 중국인들은 심지어 봉기를 일으켜 외국 선교사들을 죽이고 교회에 불을 지르는 행동을 감행했다.

1860년 프랑스가 천진의 황궁 유적지에 영사관을 만들었으며 더불어 천진 동쪽과 영사관 부근에 교회를 짓고 중국 관리에게 개업식에 참가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은 중국인과 외국 선교사간의 유혈충돌을 빚어내 수십 명의 외국 선교사 등이 숨지었다. 중국 정부도 외국인의 압력에 못 이겨 사태 참여자 20명을 사형하고 25명을 유배 보내고 50만 양의 백은을 배상했다. 이것이 바로 중국 기독교 역사상 유명한 처진교안 사건이다.

천진교안 사건 등은 중국 정부와 국민이 기독교 및 외국선교사들과 철저히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중국 기독교의 운명은 처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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