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時論] 중국에서 새삼 빛나는 안중근의사
[전대열時論] 중국에서 새삼 빛나는 안중근의사
  • 전대열<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 승인 2014.01.29 08: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30분 중국 하얼빈 역두에서 여섯 발의 총성이 울렸다. 위대한 독립투사, 독립군 의군 총참모장 안중근의 손에는 육혈포(六穴砲)가 들려 있었다. 그가 쏜 총탄은 정확하게 이등박문의 가슴을 꿰뚫었다.

더 이상 손 쓸 사이도 없이 민족의 원수 이등박문의 몸통은 그대로 땅바닥에 꼬꾸라졌다. 일본제국주의의 화신 이등박문은 노회하기 짝이 없는 조선침략의 원흉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하여 조선의 외교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외교권은 나라의 주권이다. 주권을 빼앗긴 나라가 무슨 나라이며 나라 없는 백성이 무슨 국민이겠느냐.

충정공 민영환 등은 비분강개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나뿐인 생명을 바쳐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다한 것이다. 그들이 목숨을 던질 용기로 왜놈들에게 저항할 수는 없었을까.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투쟁에 친청, 친일, 친미, 친러, 친독 등으로 분열했던 당대의 세력가들은 이등이 지휘하는 일본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침략야욕을 눈치도 채지 못하고 허망하게 나라를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몇 사람이 자결의 길을 택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달랐다. 황해도 양반가문에 태어나 시국관의 차이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혁명군 소탕에 나선 일도 있지만 일본의 간악성을 깨달은 후에는 즉각 무력 투쟁에 앞장선다.

그리고 그 원흉으로 이등박문을 지목했다. 이등박문은 초대통감으로 조선에 부임하여 조선 강점(强占)의 기틀을 완수했고 중국 러시아까지 넘보며 동남아 일대를 손아귀에 쥐겠다는 야욕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이 날도 그는 천진 등을 거쳐 러시아의 전권대사와 만나기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 것이다.

안중근은 치밀하게 정보를 분석한 결과 이등이 하얼빈에 오리라고 확신했지만 경호 상 다른 역에서 내릴 것을 염려하여 유동하 등 동지들을 배치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리고 하얼빈은 자신이 맡았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이등박문이라면 화폐의 사진으로도 쓰고 동경 국회의사당 마당에 동상까지 세워놓고 추앙한다.

일본을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놨다는 공로를 높이 평가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일본이 진정 선진국임을 자칭하고 세계 일류국가의 모양을 갖추려면 이등박문같은 사람을 추앙하면 안 된다는 것이 양식 있는 세계민의 여론이다.

그는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짓밟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며 많은 나라의 재물과 문화재를 송두리째 훔쳐간 도둑이요 강도였다. 그가 가는 곳에는 피비린내뿐이었다. 겉으로는 인자한 웃음을 짓고 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며 복 많은 영감 노릇을 하는 듯 보였지만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서릿발 같은 일본도로 사람의 심장을 후벼냈다.

야차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야차였다. 최고의 지식을 자랑하는 문화인, 최대의 힘을 가진 전략가였지만 그 재주는 다른 나라를 희생시키고 다른 나라의 백성들을 죽이는 야만인의 재주로 쓰였을 뿐이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오늘날에는 명백히 국제형사재판에 넘겨야 할 국제범죄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극우파들은 그를 영웅시하는 야만인이 되었다. 이등박문이 추앙을 받으려면 일본에 문화와 학문을 전해준 백제의 왕인박사처럼 나라를 초월하여 깨우치고 돌봐주는 행위를 했어야 한다.

그런 문제에는 아예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이등박문을 향하여 총탄세례를 퍼부은 안중근은 재판과정에서 의젓하게 “나는 독립의군 총참모장 자격으로 적장을 쏘았을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진술했다.

이등을 죽여야 할 15가지의 죄목을 설파한 안의사의 모습에 그를 지키는 헌병 치바 도시치는 집으로 돌아가 신(神)으로 모셨고 교도소장 쿠리하라는 안중근이 쓰고 있는 동양평화론 탈고를 위해 사형 집행을 15일간 연기해달라는 건의까지 했으나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결국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완결되지 못했으나 그가 꿈꿨던 한중일 삼국의 동일화폐 사용 등 오늘날 유렵연합 같은 대구상이 담겨져 있다.

1910년 3월26일 여순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된 안의사의 시신은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다. 모든 걸 기록으로 남기는 일본의 관행으로 볼 때 매장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그를 영웅시할 것이 두려운 일제가 시신을 훼손했을 가능성까지 점치게 한다.

이번에 중국에서 하얼빈역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을 건립한 것은 참으로 감격스럽다. 박근혜대통령의 표석설치 희망에 덤을 얹어 보답했다. 전통적으로 외국인의 동상이나 기념관을 허용하지 않는 중국이 관례를 깬 것은 항일투사로서의 안중근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중국 정부 대변인도 망설이지 않고 존경의 뜻을 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일본 아베정권은 전쟁을 용인하지 않는 평화헌법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자위권을 인정하는 등 과거 제국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발언을 퍼붓는 것으로 옹졸함을 드러냈다. 일본을 두둔할 것으로 보였던 미국조차도 혀를 내두르며 압박한다.

심지어 캐리 국장장관이 한국과 중국만 방문하고 일본을 제외한다는 속셈까지 비추며 일본의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침략을 저지른 당사국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머뭇거리거나 앙탈하는 모양은 야만국 행위다. 청사에 빛나는 안중근의사를 기리는 마음은 영원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