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時論] 애국투사 독립투사들이 살던 곳
[전대열時論] 애국투사 독립투사들이 살던 곳
  • 전대열<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 승인 2014.02.24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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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존망지추에 결연히 일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외적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거나 그들의 점령 하에 꼼짝도 못하고 비루한 삶을 이어가야 했던 수많은 나라들이 세계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해양을 주름잡던 영국, 스페인 등은 무적함대를 앞세워 신대륙을 개척했다. 이름이 좋아 개척이지 신대륙은 기실 신대륙이 아니었으며 엄연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는 원주민들이 주인이었다. 문명이 발달하지 못하여 원시적 생활 형태를 갖췄지만 나름대로 부족을 이루고 부족끼리의 전쟁도 심심찮게 치렀다.

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접어들며 창과 칼을 만들고 말을 타고 다니는 운송수단도 있었다. 그렇지만 함대를 앞세우고 총으로 무장한 제국주의 군대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타국을 침략하거나 침범한 사실이 없다.

이를 가리켜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고 자찬하고 있지만 사실을 들여다보면 힘이 없었던 것뿐이다. 남의 나라를 넘볼만한 무력을 갖추지 못한 주제에 감히 침략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오직 북쪽으로만 중국과 영토를 마주하고 있을 뿐인데 중국 같은 거대국가와 맞붙어 싸워 이기기에는 너무나 허약한 국가였다. 바다를 건너면 일본이지만 해양발전이 월등한 일본을 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정립해 있을 때에는 현재의 만주 땅 대부분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광개토대왕 같은 걸출한 인물이 있어 주위의 오랑캐들을 복속시키고 대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광개토대왕 생존 당시뿐이었고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남천(南遷)한 이후에는 백제, 신라와 다투다가 결국 당나라와 결탁한 신라의 술책으로 고구려, 백제는 망하고 한반도 일대의 영토를 겨우 지켜내 왔던 것이다.

조선 세종 시대에는 해적질을 일삼는 왜구를 징치하기 위해서 해적 소굴인 대마도를 점령하고 도주(島主)의 항복을 받은 일이 있어 지금 독도 문제와 연계하여 대마도도 한국 땅이라는 강력한 주장도 나오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서세동점의 세계흐름을 잽싸게 캐치한 일본은 명치유신을 선포하여 적극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나라의 면목을 일신하여 현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육전부대는 물론 해군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여 제국주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만만하기 짝이 없는 조선을 희생물로 삼는 일이었다. 조선을 둘러싼 제국주의 경쟁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전통적으로 중국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하여 중국의 우위에 섰고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여 세계강국 대열에 우뚝 섰다. 조선 땅은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하고 일본에 합방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이 치욕을 면해보고자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해산된 조선군대의 저항도 있었으며 곳곳에서 의병활동을 벌였던 선열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조직의 집중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저들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삼일만세운동을 계기로 크게 깨닫고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의 기틀을 세웠다. 이에 호응한 애국지사들이 앞 다퉈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임시정부는 원래 네 가닥으로 나뉘었으나 결국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되어 박은식, 이승만, 이동령, 김구로 이어지는 지도부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조직화했다.

특히 김구의 독립열정에 감복한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되는 일본 천장절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진 의거도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이 되었다. 중국 장개석 총통이 “중국인 4억이 못한 일을 조선사람 혼자서 했다”고 감동하고 임시정부를 크게 지원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는 혈안이 되어 임시정부와 독립투사들을 검거하기 시작했고 결국 중경임시정부로 멀리 피난하여 그곳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맞게 되는 것이다.

독립투사들과 광복군의 고심참담한 역정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고난에 찬 것이었다. 풍찬노숙, 초근목피의 빈곤 속에서도 오직 조국의 광명정대한 독립만을 염원하며 고통을 감내했다.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 독립군 지도부들이 중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던 유적지는 기념사업회 등의 노력으로 그나마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청포도’, ’광야‘ 등의 저항시를 남긴 이육사가 옥사한 북경의 헌병대 감옥은 아무런 표지도 없이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동주시인의 생가는 용정에 있는데 중국 측에서 써 붙인 안내판에는 그를 중국조선족 애국시인이라고 엉뚱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미처 발굴하지 못하고 있는 순국선열들이 살던 거처를 확인하고 기념표지라도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다. 독립군 지휘관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 자리가 옥수수 밭으로 남아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국가보훈처가 적극 나서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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