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8] 한인여성 공산주의자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8] 한인여성 공산주의자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4.02.2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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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0월 레닌을 중심으로 하는 볼쉐비키들은 혁명에는 성공했지만, 저 멀리 극동지역까지 완전히 장악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곧바로 러시아는 내전에 휩싸였고, 이어 일본을 비롯한 외국군대들이 들어와 무력간섭이 시작되자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인 한인들은 소비에트 정권의 수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에서 반볼쉐비키 세력인 백위파를 지원하는 외국군대의 주도세력이 일본이었고, 따라서 한인 빨치산들은 반볼쉐비키 세력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한민족과 일제 압제 하에 있는 조선을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18년 4월 일본은 블라디보스톡에 일본군을 상륙시키며 극동지역에서 무력간섭을 시작했고, 이어 같은 해 7월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열강들도 무력간섭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19년 시베리아지역에는 수천명의 외국군대들이 저마다의 야욕을 갖고 볼쉐비키 세력과 무력충돌을 일으켰다.

1918년 하바로프스크에는 100명으로 구성된 한인적위군이 조직되었다. 이 적위군은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장이었던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스탄케비치의 제의로 창설되었다. 김 알렉산드라는 최초의 한인 여성 공산주의자로서, 1885년 2월 22일 연해주 우수리스크 근교의 시넬니코보 한인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 만주로 이사를 하고, 동중철도 건설장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는 아버지 밑에서 양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1895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블라디보스톡의 오빠에게 온 16세의 김 알렉산드라는 여자 김나지야에서 독서에 탐닉하며 열정적으로 학창생활을 보냈다.

학창시절 김 알렉산드라는 러시아의 진보적인 사상가였던 게르첸이나 체르느이쉐프스키 등의 사상서적들을 탐독하며 미래의 혁명여성을 꿈꾸었으며, 검은 색 치마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가지런히 빗어넘긴 검은 머리에 가냘픈 체구를 지녔던 그녀는 매우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고, 특히 의지가 강한 청년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생활은 불운했다. 아버지의 폴란드인 친구의 아들인 M.I.스탄케비치와 결혼하여 아들인 뱌체슬라프를 낳았지만, 이후 술에 젖어 방탕하게 살아가는 남편과 헤어지고, 러시아어 교사로 근무하던 오 바실리와 재혼을 했다. 비슷한 사상을 갖고 있던 오 바실리와의 재혼은 김 알렉산드라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미 1911년 3월 23일자로 ‘외국인 노동자 사용제한 규정’이 최종적으로 폐지됨에 따라, 1916년대에는 한인들이 우랄산맥 근처까지 진출을 하게 되었다. 아들을 남편에게 맡긴 채 김 알렉산드라는 노동자들과 우랄지방의 나제쥔스키 벌목장에서 통역으로 일하며, 조선 및 중국인 노동자들을 단결시켜 ‘우랄노동자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김알렉산드라는 그곳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고 최초의 한인여성 사회민주공산당원이 되었다. 1917년 2월혁명 이후 여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알렉산드라는 제1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극동대표자회의(1917년 9월)에 참가하는 등 곧바로 당 및 소비에트 혁명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 12월 김알렉산드르는 아. 크라스노쉐코프가 지휘하는 변강소비에트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초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온 김알렉산드르는 3월에 당시 만주와 연해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저명한 지도자이자 임시정부 초대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등과 주축이 되어 한인사회당과 적위군을 조직했다. 이후 1918년 7월 김알렉산드르는 하바로프스크시당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시위원회 비서와 재무를 담당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선전가이자 러시아어, 중국어, 영어, 불어에 능통했던 김알렉산드라는 그 탁월한 혁명적 지도력을 인정받아 변강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1차대전 포로문제와 관련한 혁명사업들, 조선인, 중국인, 헝가리인 등으로 구성된 국제주의부대 편성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한편 1918년 8월말 극동지역의 내전상황은 소비에트 볼쉐비키 정권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백위파 군대를 배후 지원하는 일본군의 개입으로 볼쉐비키 군대의 군사력은 약화되었고, 결국 니콜라예프스-나-아무레 항(니항)이 백위파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 결과 1918년 8월 25일-28일기간에 하바로프스크에서 개최된 제5차 극동지역 노동자대회에서 일시 전선을 포기하고, 한인 혁명지도자들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아무르주로 이동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1918년 9월 2일 하바로프스크에 칼므이코프의 백위파 군대가 들이닥치기 이틀전 김 알렉산드라를 비롯한 일단의 한인 공산당원들은 재빨리 ‘바론 코르프’호를 타고 아무강을 거슬러 아무르주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9월 10일 예카테리노 니콜스코예 카자크마을에 못 미쳐 갑자기 전면에서 백위파 군대의 배가 나타났으며, ‘바론 코르프호’에 타고 있던 한인 공산당원들이 체포되었다. 체포되기 전 당원들은 모든 당문서들을 파기해서 강물에 던져 버렸다.

김 알렉산드라를 비롯하여 유동열, 김립, 이인섭 등도 체포되었으나 중국인으로 가장하여 가까스로 석방되었고, 나머지 체포된 김 알렉산드라 일행은 하바로프스크로 이송되어 ‘죽음의 객차’에 감금되었다.

칼므이코프의 백위파군들에 의해 김 알렉산드라는 엄청난 고문과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김알렉산드라는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고 혁명열사로서의 기백을 보였다. 마지막 심문에서 김 알렉산드라는 “우리 볼쉐비키들은 절대로 동지들을 배반하지 않으며, 사상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 볼쉐비키들에게 있어서 생과 사상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으며, 한 몸이며, 죽음도 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9월 14일 새벽 4시. 백위파 군인들은 ‘죽음의 객차’에서 눈을 가린 채 김 알렉산드라와 사회노동위원 티쉰, 하바로프스크시 재판소장 네페도프를 끌어냈다.

티쉰과 네페도프는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김 알렉산드라를 양쪽에서 부추기고 수많은 볼쉐비키 혁명가들이 총살당한 일명 ‘죽음의 골짜기’로 마지막 발걸음을 옮겼다. 김알렉산드라는 눈을 가린 수건을 풀어던지며 외쳤다.

“나는 공산당원이다. 공산당원은 원수의 면전에서 얼굴을 숙이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소비에트정권 만세! 볼쉐비키 만세! 자유조선 만세! 세계혁명 만세!”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총살된 혁명가들의 시체가 아무르강으로 굴러 떨어지고 아무르강의 차가운 물속에 붉은 피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1918년 9월 14일 33세의 청년 김알렉산드라는 그렇게 인민들의 곁을 떠나갔다. 그녀가 1908년에 낳은 첫째 아들 뱌체슬라프도 같은 해 백위파들의 손에 살해당했다. 비극적인 결말이었다.

1918년 9월 연해주 소비에트 정권은 붕괴되었다. 극동지방 전역에서는 백위파의 수중에서 극동지방을 구해내기 위한 러시아인과 한인 빨치산투쟁부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적극적인 빨치산 투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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