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9] 배재배 실험의 성공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9] 배재배 실험의 성공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4.03.0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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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의 한인사회는 토지의 유무에 따라 부유한 자와 빈곤한 자로 나누어 졌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들어서 러시아국적을 갖고 있는 부유한 한인층은 다시 여러 분야의 상업 활동에 투자를 했다.

즉 부유한 농민들은 발생하는 이익을 산업과 무역, 주택건설 등에 투자했다. 1910년 포시에트지구에만 부유한 상인이 80명, 도자기 공장주 8명, 소금 공장주가 15명에 이르렀다. 한인 중에서 부유한 특권층 중에는 산업체와 상업회사를 소유한 기관의 하청업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관청과 개인에게 자재, 식료품, 노동력 등을 공급했다. 1917년 무렵 이러한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톡에만 59명,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는 17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한인들의 상업활동이 많은 이윤을 가져다주었지만 한인들의 주된 업종은 아직은 역시 농업이었다.

한인들은 특유의 근면성으로 농업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성과들을 일구어 냈다. 러시아인들은 “한인들은 타고난 농사꾼들로 농사가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도 채소밭을 일구고 귀리와 수수를 재배하는 묘기를 부린다. 돌로 덮인 곳이나 산비탈, 늪지대, 심지어 타이가 등지에서도 한인들의 손을 거치면 옥토로 변한다”고 감탄스러워 했다.

한인들이 주로 재배한 것은 일반적으로 수수, 콩, 옥수수, 귀리, 쌀 등이었고, 특히 수수, 쌀, 콩은 한인들이 극동지역에서 최초로 재배하기 시작한 작물이기도 하다. 특히 벼재배의 보급은 러시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정도로 한인들의 농업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사실 벼재배 실험은 이전부터 계속되어 왔었다. 1870년대 말 최초의 벼재배 시도가 실패한 이후, 1905년 무렵부터 벼재배 실험이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벼재배가 성공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실패와 끊임없는 반복을 필요로 했다.

벼재배 실험은 외롭고 끝을 알 수 없는 싸움이었다. 1917년 이른 봄 깊은 밤 그로데코보역 부근의 한 오두막에 백열등불이 꺼지지 않고 희미하게 실험실을 비추고 있다. 벼재배 영웅 신우경의 오두막이다. 함북 길주태생의 신우경은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이루어 내고야 마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쌀 생산지인 북해도에서 종자를 들여와 소규모의 논을 개간하여 벌써 여러 해째 이렇게 볍씨 연구에 열중해 오고 있다. 포기하려고 마음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밤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실험에 열중하고 있다. 오늘따라 입가에 미소가 비쳤다. 이튿날 그는 바가지에 볍씨를 한웅큼 담아 들로 나갔다.

볍씨 종자 연구는 마을사람들의 열망일 뿐만 아니라, 지역당국 관리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간절한 소망을 담아 씨를 뿌렸다. 이는 관개수로 없이 재배되는 방식이었다. 볍씨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1단계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문제는 싹이 정상적으로 자라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모두의 열망을 담은 볍씨는 다행히 뿌리를 굳게 내리고, 토양에 적응해 나갔다. 줄기는 불규칙한 연해주의 기후에 적응을 해나갔고, 병충해에도 강한 면역성을 갖고 있었다. 튼실한 열매가 차오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10월 초 당국 관리들과 마을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험 벼의 추수가 개시되었다.

모두의 얼굴에 환희가 가득하다. 조선 농민의 후예 신우경의 북해도 볍씨가 실험에 성공하는 순간이다. 신우경에 의해서 연해주의 어떤 기후에도 적응할 수 있는 품종의 벼재배의 길이 열린 것이다.

물론 1907년 얀치헤 마을 주민들도 0.25데샤티나의 농지에 볍씨를 뿌려 좋은 결과를 얻어냈고, 수찬지구,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군 등에서도 벼재배를 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벼재배를 시작해 나간 곳은 그로데코보역 부근과 한카호수 주변지역 등이었다. 벼재배는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나갔다.

극동지역에서 벼재배는 크게 두 지역에서 이루어 졌다. 한 곳은 한카호수부근, 호롤, 스파스크, 그로데코보, 쉬마코프지역 등이고, 또 한곳은 남부 변경지대였다. 이후 벼농사는 연해주를 벗어나 아무르강을 따라 아무르주 블라고베쉔스크와 제야강까지, 극동지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후 벼농사는 내전기(1917-22) 이후, 본격적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가 가동되고, 집산화 정책과 더불어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한인들 내에서는 벼재배 조합과 콜호즈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벼농사는 한인 콜호즈에서 선두적인 역할을 했으며, 총생산 가치의 41.6%를, 전체곡물 부분에서는 72.3%를 차지했다.

당국의 지원으로 벼 파종면적은 크게 확장되어서, 1923년 7978ha에서, 1934년에는 20664ha까지 확대되었다. 한인들의 벼재배 기술은 1937년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한인 꼴호즈들에서 더 큰 성과로 나타났다. 특히 쌀 생산은 2차대전시기 소련의 전쟁수행 과정에서 식량지원에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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