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유산] 우리 유산, 재발견(11)
[과학문화유산] 우리 유산, 재발견(11)
  • 이종호<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 승인 2014.03.0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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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사유적지구(1) : 경주유산 입문(4)

 
③ 비로자나불
불교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나자불은 기독교로 말하면 신에 해당하는 존재로 석가나 아미타불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원적 존재다. 중생과 부처가 하나라는 의미로 검지를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쥔 수인(지권인)을 취하였다. 통일신라 8세기 후반에서 9세기에 걸쳐 크게 유행했다. 대개 독립상으로 봉안되지만 삼존일 경우 문수와 보현보살이 협시한다. 이 불상이 모셔진 불상을 대적광전 또는 비로전이라 한다. 기림사의 대적광전, 불국사의 비로전 등이 대표적이다.

④ 약사불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질병의 고통을 없애주는 의사격인 부처도 크게 요구되었는데 여기에 부합해서 출현한 부처가 바로 약사불(藥師彿, Bhai sajyaguru)이다. 특히 일반 대중들이 극락의 아미타불과 함께 의사로서의 약사불을 신봉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약사불은 7세기 중엽부터 보편화되기 시작하여 8세기 중엽에 크게 유행한다.

약사불은 다른 불상과는 달리 왼손에 지물(持物)을 가진 계인(契印)을 짓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즉, 왼손에 약이 든 약합 같은 약그릇(藥器)을 들고 있으므로 만약 불상의 손에 약병을 들고 있다면 무조건 약사불로 보면 된다. 또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도록 하고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펴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맺어 중생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없애주고 안심을 주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일광(日光)보살과 월광(月光)보살 또는 약사12지신상(藥師十二支神像)을 거느리기도 하다. 

 
⑤ 미륵불
메시아로서 널리 알려진 미래불이 곧 미륵불(彌勒佛, Maitreya)이다. 사회가 불안하고 나라가 혼란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지상낙원을 꿈꾸게 되는데 이러한 혁명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복음적인 부처가 바로 미륵불이다. 미륵사상은 미륵상생경과 미륵하생경 등 미륵정토에서 유래하는데 이를 조직화한 것이 법상종이며 통일신라 때부터는 미륵사상 및 미륵존상을 주재했다.

원래 불상의 형태로 나타나기 전 미륵은 보살이었다. 이는 도솔천을 주재하는 보살로, 56억 7천만년후가 되면 석가불이 미처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기 위해서 용화수라는 나무 밑에 부처님의 모습으로 내려와 세 번 설법하여 모든 중생들을 남김없이 제도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불상이 봉안된 불전을 용화전이라 부른다. 미륵불상이 의자에 앉아 있는 의좌세의 불상과 입상인 경우 용화꽃 봉우리나 꽃가지를 든 용화수인을 짓고 있다.

보살은 범어인 ‘Bodhi-Sattva’의 약칭으로 부처의 깨달음을 구하는 동시에 부처의 자비행을 실천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노력하는 대승불교의 이상적 수행자상을 의미한다. 보살은 귀하고 자비로운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몸에 많은 장식을 한 여성상으로 표현되며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 등으로 구분된다.

 
부처의 조상이 변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여 보살상의 조성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삼국시대에는 의자에 앉은 채 한쪽 다리를 다른 한쪽 무릎 위에 올려놓는 미륵보살상이 주로 만들어졌다. 보살상은 불상처럼 옷주름이 좌우 대칭으로 표현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목과 허리를 약간 꺾인 자세로 연화좌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바뀐다. 옷주름도 좌우 대칭이 사라지고 대신 화려한 장신구를 몸에 걸친 형식을 갖추었다. 보살은 현세에 열심히 ‘자리이타행’을 실천해야 비로소 미래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세상에 태어나 부처가 될 보살은 부처를 옆에서 모시고 있으므로 중생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보살행을 드러내기 위해 점차 화려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보살상과 불상을 구별하는 간단한 방법으로 보살은 머리에 관을 쓴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머리만 보면 곧바로 구분할 수 있다. 또한 무언가를 손에 들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래는 이미 성불을 이룬 부처를 말하지만 보살은 성불을 이루기 위해 수행의 길을 걷는 사람들을 통칭한다. 즉 보살이란 자신의 깨달음보다 중생 구제를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존재들로 사실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한 일반 신도들을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이다. 스님이 아니라도 사찰에 오는 사람들을 보살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8세기에 불상⋅보살상은 삼국통일 이후와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신체 표현이 퇴화하여 관능미가 퇴색된다. 머리와 손은 신체에 비해 상당히 커지고 눈⋅코⋅입 등은 길거나 짧아져 인간 체형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았고 가슴과 팔뚝에 늘어진 옷주름도 생략된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 말에 불상의 권위를 초월하며 깨달음을 얻으려는 선종이 나타나면서 더욱 가속된다.

이후 고려시대로 넘어가면 불상, 보살상은 지역의 토착적 문화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여 만들어진다. 신체는 물론 얼굴과 복식도 지역민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렸다. 부처의 정신적 신비성이나 근엄한 모습은 사라지고 인간을 직접 대하는 형태로 조성된다. 특히 불상의 얼굴은 그 지역 사람들의 얼굴을 닮는다고 한다. 경주 남산의 불상들을 보면 어딘가 친근한 감을 느끼는 이유다.

재료 면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경주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기본적으로 화강암으로 만든 석불(石佛)이다. 화강암이 단단한 점도 있지만 바위에 새긴 마애불이나 석굴사원에 안치된 석불들을 이전하기 어렵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된 남산지구의 37점 중 21점이 석불상이다.

불상에는 석불과 청동불뿐만 아니라 금으로 불상을 주조한 황복사 금제불좌상(국보 제79호)과 같은 금불(金佛), 금동불(金銅佛, 백률사 금동불입상(국보 제28호)), 철불(鐵佛, 철원 도피안사의 비로자나불(865년 제작, 국보 제63호))도 있다. 소조로 만든 소조불(塑造佛)도 상당히 많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재료의 취약성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은 없다고 했는데 흥국사의 16나한상이 나이테를 통한 ‘연륜측정법’을 사용해 중종 33년(1538)에 만들어진 것이 밝혀졌다.

흥국사 나한상은 나무를 심으로 삼고 겉에 진흙을 발라 만든 소조불로 2013년 보물 1798호로 지정됐다. 나무로 만든 불상인 목조불(木造佛)도 있는데 고려 이전에 제작된 불상이 없다고 알려졌으나 2005년 5월 해인사에 있는 쌍둥이 비로자나불상에 금칠을 하던 과정에서 833년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 목불이 현재 국내 최고의 목조불상으로 2012년 보물 1777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경기도 남양주 흥국사에 있는 16나한상 중 제1존자(왼쪽)와 나무로 된 제4존자의 밑바닥(오른쪽), 제1존자의 밑바닥을 촬영해 얻은 나이테(아래). 기후에 따라 나이테 너비가 달라지기 때문에 패턴을 분석하면 연대를 알 수 있다. 충북대 목재연륜소재은행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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