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2] 내전기의 한인 빨치산 운동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12] 내전기의 한인 빨치산 운동
  • 월드코리안뉴스
  • 승인 2014.03.2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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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레닌은 러시아 10월혁명(볼쉐비키혁명)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러시아전역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레닌은 곧바로 반볼쉐비키 세력인 백위파와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확산과 영향을 우려하는 서구열강국가들의 간섭에 직면해야 했다.

1918년 4월 무장한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상륙했으며,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외국군대가 들어왔다. 그 결과 시베리아에는 6만명이상의 일본군과 그 외 수 천명의 미국, 영국 등의 외국간섭군들이 주둔하게 됐다. 극동지배의 야욕을 갖고 있었던 일본은 백위파를 지원하며 직간접적으로 반볼쉐비키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인들은 조선을 식민지배하고 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에 침략해 들어온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한인들은 백위파와 일본군대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수호하고 조선의 독립을 되찾는 길이라 여겼다.

해삼항(블라디보스토크항)이 백위파의 수중에 들어가고 하바로프스크가 위험에 직면하게 됐다. 이러한 가운데 이미 1918년 4월 28일에 김알렉산드라, 이동휘, 김립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한인사회당에 의해서 하바로프스크에서는 100명여 명으로 구성된 한인적위군이 조직됐다.

한인적위군은 러시아 붉은군대와 연합하여 뱌젬스크와 크라스나야 레츠카지역에서 칼므이코프 백위파군대에 대항해 혈전을 벌였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8월 초순에 하바로프스크는 백위파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1918년 9월 백위파와 외국간섭군에 의해 연해주 소비에트 정권이 붕괴되고 극동전체가 점령되자 전역에서 한인과 러시아인 빨치산부대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한인들은 빨치산 운동에 적극 가담했으며,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연해주와 아무르주지역의 부대에 편입됐다.

최초의 한인 빨치산부대는 아무르주에서 창설됐다. 1918년 10월 아무르주 블라고베쉔스크에서 박 일리야가 자신의 빨치산부대를 창설했다. 다반에서는 최니콜라이를 중심으로 빨치산부대가 조직되어 이후 M.세브추크가 지휘하는 러시아 빨치산부대와 연결한 후, 아무르철도의 인역(驛)에서 백위파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아무르주에 이어 연해주에서도 한인 빨치산부대들이 조직됐다. 275명이 소속되어 있던 철혈단의 전체회의 결정에 따라 수찬지구에서 빨치산부대가 조직됐으며, 이후 수이푼지구에서 최호림, 김하정의 빨치산부대가 조직됐다.

이와 같이 1919년에서 1920년초 극동지역에서 많은 한인빨치산부대들이 조직됐고, 붉은군대가 바이칼 일대로 진격해 옴에 따라 빨치산 운동도 더욱 탄력을 받았다. 한인빨치산 부대들은 인민혁명군으로 재편성되어 극동지역 해방임무에 돌입했고, 1919년 12월에는 니콜라예프스크 나 아무레, 1920년 2월 5일에는 블라고베쉔스크, 1920년 2월 13일에는 하바로프스크 해방전투에 참전하여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1920년 4월 일본군에 의한 신한촌 학살과 자유시에서 한인빨치산 부대들 간의 무장충돌의 아픔을 뒤로 한 채, 한인빨치산 부대들은 눈부신 활약으로 곳곳에서 한인부대의 용맹을 떨쳤다. 이중에서 1922년 2월 볼로차예프카의 이윤카란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격렬한 전투는 지금도 생생히 세인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1922년 2월 혁명군은 전군을 5대에 나누어 백위파의 주둔지인 볼로차예프카를 공격했다. 백위파의 주둔지인 이윤카란산 고지는 6겹의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능선을 따라 참호와 진지를 두고 강력한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는 이윤카란산 고지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고지였다.

2월10일 인민혁명군 부대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6연대 예하 최계립과 임표의 지휘를 받던 한인중대 빨치산대원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대담함과 용맹함으로 영웅적으로 싸웠다.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6연대의 한인중대가 제일 먼저 철조망에 이르자 용감하게 돌격을 감행했다.

때를 같이하여 백위파군대의 진영에서 화기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전열에 섰던 중대원들의 대부분이 철조망에 매달린 채 처참히 죽어나갔다. 기관총과 소총, 포탄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화약연기가 온 산을 휘감을 정도로 자욱했다.

여기저기서 계속해서 돌격구호가 울려 퍼졌다. 총알이 빗발쳤다. 러시아이 지휘관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그들은 큰 소리의 조선말로 돌격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일보” “앞으로”, “여보게 앞으로...” 당시 백위파 군대는 이만전투에서부터 한인빨치산부대원들의 용맹함을 알고 있었다.

모든 백위파 군대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격해 들어가는 한인 빨치산들을 두려워했다. 러시아군 지휘관들은 이 범을 이용하여 조선말로 한인빨치산들처럼 돌격명령을 내렸다. 전투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어느덧 총성이 멎어갔다. 산에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 전투에서 인명혁명군대와 한인중대의 600여명이 희생됐다. 백위파 군대는 2천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하바로프스크로 패퇴했다. 이후에 한인빨치산 부대가 소속된 6연대는 제6 볼로차예프카 붉은기 여단이라는 부대명과 함께 붉은기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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