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61] 홀트아동복지회
[아! 대한민국-61] 홀트아동복지회
  • 김정남<본지 고문>
  • 승인 2014.03.2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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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1950년 심장마비로 죽을 고비를 넘긴 해리 홀트는 6.25전쟁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처참한 한국아이들을 보고 후원금을 보내다가 1955년 한국 혼혈아동 8명을 입양했다. 부부는 입양 6개월 뒤 더 많은 고아와 버려진 아이들을 굶주림에서 구하고, 그들의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가족을 만들어주자는 생각으로 한국으로 와 입양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홀트아동복지회의 시작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주한미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가 많았는데, 그들은 ‘튀기’라 불리며 많은 차별과 설움을 당했다. 해리 홀트가 아내에게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여자 아이, 굶어서 곧 죽을 것 같은 여자아이를 정성을 다해 치료하고 있소. 이 아이의 아버지는 미국에 돌아가 그의 가족들과 평안히 살고 있으리라 짐작되오. 그들의 죄를 아는 하느님이 언젠가는 심판할 것이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아 그가 미국사람으로서의 죄책감으로 이 사업에 손을 댔다고 할 수도 있다.

해리 홀트는 전 재산을 입양사업에 쏟아 부었다. 다행히 1남 5녀, 친자녀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홀트가(家)가 한국에 와 입양사업을 시작한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버려진 아이들에게 가족을 만들어 준 고마운 사람, 더 나아가 성인(聖人)으로 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고아를 해외로 내 몬 죄인(罪人)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입양된 사람 가운데는 “문화, 언어의 차이와 정체성 혼란으로 불행했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었다.

1964년과 2000년에 작고해, 일산의 홀트복지타운에 묻혀있는 해리 홀트 부부의 뒤를 이어, 이사장으로 홀트아동복지회를 이끌고 있는 이는 둘째딸 말리 홀트로 그는 1956년 부모와 함께 한국에 왔다. 대를 이어 이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이들이 친부모와 살거나 한국에서 자라면 좋겠지만, 그러나 가족이 없는 것보다는 국적이 달라도 가족이 있는 게 훨씬 낫다고 말한다. 그가 한국땅을 처음 밟았을 때 영아원에서 하루에 한명씩 버려진 아이들이 들어오고 한명씩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런 상황을 두고 누가 입양을 비난할 수 있으랴.

홀트아동복지회는 자신이 태어난 곳과 뿌리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입양인을 위해 1975년부터 모국방문 행사를 해오고 있다. 한국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거나 친부모를 찾으려는 입양인도 많다. 이곳을 통해 입양된 해외 유명인사도 여럿이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토비 도슨 한국 스키국가대표팀 코치, 미 항공우주연구소 수석연구원인 스티븐 모리슨 한국입양홍보회 회장, 플뢰르 펠르랭 프랑스 중소기업·혁신·디지털 경제장관, 장 뱅상 플라세 프랑스 상원의원 등등. 그리고 배우 다니엘 헤니와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의 어머니들도 홀트 출신이다. 한국과 한국국민은 해리 홀트 부부와 그 딸 말리 홀트 등 홀트가(家)에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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