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時評}국화를 사랑하는 데도 격이 있다
{월드時評}국화를 사랑하는 데도 격이 있다
  • 논설위원실
  • 승인 2010.11.10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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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사회교육문화수석>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가을에 피는 꽃 가운데, 누가 뭐래도 가을의 꽃은 국화라 할 것이다. 산과 들판에 나서면 이른 아침 찬 이슬을 머금고 피어있는 청초한 들국화를 쉽게 만날 수 있어 좋다. 가을의 참된 정취는 성긴 울타리, 찬 비 뒤에 떨고 서 있는 몇 송이 국화나 들녘 언덕가에 홀로 피어있는 외로운 들국화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이런 국화의 매력과 생명은 한결 선연하게 드러난다.

 

울타리에 핀 재래종 국화나 산야에 널린 야생의 국화가 아니더라도, 언제부터인가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져 각양각색의 모양을 자랑하는 원예종 국화 또한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게 되었다. 형형색색으로 키워져 장식된 원예종 국화 역시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손끝에서 굽혀지고 비틀리고 꺾이어 웃음 짓는 그 속에 무슨 가을 국화의 생명이 깃들일 수 있으랴.

 

정주 시인이 노래할 수 없었던 국화의 미덕

야생의 들국화에서 풍기는 분위기나 쑥냄새 비슷한 맑은 향기는 원예종 국화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다. 떼지어 전시되는 원예종 국화가 화려하게 성장(盛粧)한 미인들의 무도회 같다면 야생의 들국화는 소복한 담장가인(淡粧佳人)이 들판에 외로이 서 있는 모습이다. 외롭지만 의연하게 피어있는 들국화는 범접하기 어려운 고결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조선조의 선비 삼주(三洲) 이정보(李鼎輔)가 읊은 시조 역시 야생의 들국화를 예찬한 것이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 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난다/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 뿐인가 하노라.” 일찍 심었어도 늦게 피어나는 국화에서 옛사람들은 군자의 덕을 보았고, 서리를 무릅쓰고 꽃을 피우는 것을 보고 강직과 절의(節義)를 일깨웠다. 꺾이지 않는 지조로 일관하는 선비정신을 국화에서 배웠다. 그러길래 하고많은 꽃 중에서 국화를 일러 4군자의 하나로 삼았던 것이다.

 

국화를 노래한 시인으로 미당(未堂) 서정주를 빼놓을 수 없다. 1947년에 발표된 그의 시 「국화 옆에서」는 우리들이 어릴 적부터 즐겨 외웠던 시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준 시이기도 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얼마나 아름다운 시인가. 그러나 이 시는 국화가 갖고 있는 그 타고난 미덕에 대해 한 마디의 찬사가 없다. 국화꽃이 피기까지의 인고(忍苦)는 노래하고 있으되, 낙목한천 아래서 오상고절을 지키는 국화의 가장 큰 덕은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미당이 국화의 이러한 덕을 몰랐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국화의 오상고절을 노래할 수 없었던 것은 친일로 얼룩진 그의 삶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훼절한 그의 자격지심이 국화의 높은 절의를 감히 노래할 수 없게 한 것은 아닐까.

 

국화의 주인은 단연코 도연명이라

 

국화를 노래한 명구로는 도연명의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꽃 꺾어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것이 있다. 이는 도연명의 음주시 제5수의 5, 6구로 일찍이 소동파(蘇東坡)가 명구라고 찬탄한 이래 천하의 명구가 되었다. 이 명구 하나가 도연명의 고결청정(高潔淸淨)한 삶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귀거래사(歸去來辭)와 함께 도연명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 할 음주 제5수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초막을 짓고 사람들 속에 살아도/ 말과 수레 소리 시끄럽지 않구나/ 묻노니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이 속세를 떠나면 저절로 그렇다네/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꽃 꺾어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네/ 산 기운은 황혼에 곱고/ 날던 새들은 짝지어 돌아온다/ 이 가운데 참뜻이 있으려니/ 말하고자 하되 말을 잊었노라” (기세춘, 신영복) 우리는 이 시에서 마음이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심원(心遠)의 경지와 무위자연에 귀일한 그의 참뜻[眞意] 참멋을 어렴풋하게나마 헤아릴 수 있다.

 

백낙천은 도연명의 옛집을 찾아 “이제 그대의 옛집을 찾아 숙연한 마음으로 그대 앞에 섰노라. 그러나 나는 단지에 있는 술이 그리운 것이 아니요, 또 줄 없는 그대의 거문고가 그리운 것도 아니다. 오직 그대가 명예나 이익을 버리고 이 산하에서 그렇게 살다 간 것이 그리웁노라” 했고, 황정견(黃庭堅)은 “연명은 시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기 가슴 속의 오묘한 경지를 그렸을 따름”이라 했다.

 

어쨌든 도연명은 국화를 따로 노래하지 않고도 이 명구 하나로 국화의 주인이 되었다. 주돈이(周敦)가 그의 애련설(愛蓮說)에서 “물이나 땅에서 자라는 풀이나 나무의 꽃 가운데는 정말 사랑스러운 것이 무척 많다. …진나라의 도연명은 홀로 국화를 사랑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국화는 꽃 중의 은자(隱者)이고… 연꽃은 꽃 중의 군자이다. ! 국화를 사랑하는 이가 도연명 후에 또 있었다는 것을 들은 일이 거의 없다. 연꽃을 사랑함을 나와 함께 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라고 하여 국화의 주인은 단연코 도연명이라고 했다.

 

도연명의 심원하고 유한(幽閑)한 그 깊은 경지를 내 어찌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만, 가을이 되면 점점 이 구절이 아련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러고 보면 국화를 사랑하는데도 단계가 있고 격()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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