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이겨낸 차인홍 라이트대 교수···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
장애 이겨낸 차인홍 라이트대 교수···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
  • 이호근 기자
  • 승인 2014.05.26 1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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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초졸 장애인 신분 극복하고 미국 대학 교수됐죠.”

 
“미 중서부의 작은 도시, 오하이오주 데이튼시는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형제의 고장입니다. 제가 있는 학교도 라이트 형제의 이름을 따서 지었죠.”

23일 양재동의 한 교회에서 만난 차인홍 라이트주립대학 교수는 데이튼을 이렇게 소개했다. 17,000명 정도의 학생들이 다니는 중견 규모의 미국 종합대학. 차 교수는 이곳 음악대학의 바이올린 교수로 있다.

차 교수가 미국 대학에 교수로 임용됐을 당시 한국의 매스컴에서는 그 소식을 다뤘다. “장애인이 교수가 된 것이 한국인들의 시각에서는 신선했을 것”이라고 차 교수는 말했다. 그의 말대로 그는 휠체어에 의존하는 장애인. 1살 때 소아마비가 와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았다.

6남매의 막내로 부모님은 이미 연로한데다 가난했던 탓에 그는 9살 때 대전의 성세재활원에 맡겨졌다. 그곳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다. 바이올린도 그곳에서 처음 배웠다. 음악도, 바이올린도 몰랐던 그의 부모는 레슨비는커녕 식사대접 한 번 한 적 없었지만 자원봉사 왔던 선생님은 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도 재활원에 머물렀던 그는 16살 때 일본의 장애인 시설에서 1년간 일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장애인에 대한 의식이나 복지시설이 발전돼있던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 할 일 없이 지내다 주변의 선배와 선생님들의 권유로 다시 바이올린을 잡았고, 재활원에서 함께 음악한 친구들을 모아 베데스다 현악 4중주단을 결성했다.

“24살까지 학교도, 집에도 가지 못하고 부모님 뒷받침은 물론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이 산다는 것은 굉장히 큰 고통이었습니다.” 차 교수는 그런 상황에서 음악을 계속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 같은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학교는 나와는 다른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해 학생들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도 해 본적이 없다는 그는 자신을 학교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한정지어놓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랬는지 검정고시를 공부해 2년 간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에 합격했다.

그러는 사이 서울대의 한 음대 교수가 차 교수를 유학 보낼 생각을 했다. 차 교수 본인과 상의도 없이 신시내티 음대의 입학허가서와 장학금을 받아줬다. 유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집안 환경 탓에 그 교수는 현대그룹에서 생활비 장학금까지 마련해줬다. “일반학교라고는 교문을 들어가 본 적도 없고, 학교하고는 상관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갑자기 미국 명문대학에 가게 된 겁니다. 저 밑바닥에서 가장 화려한 환경으로 건너뛴 사람으로 느껴졌어요.”

그렇게 신시내티대학에서 4년간 공부하고, 뉴욕시립대학교 브루클린컬리지에서 석사까지 마치고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 돌아온 뒤 대전시립교향악단에서 악장을 하고, 강의도 하다가 미국에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뒤 미국으로 갔다.

“사실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미국에 다시 가기 위해서 학생비자를 받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되겠다는 목표는 없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로 1년간 아무 직업 없이 놀게 됐다. “그때도 돈은 하나도 없어 생활이 막막하고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음악을 포기하려는 상황이었죠.” 그러던 중 라이트주립대학의 구인광고를 보고 원서를 냈다. 7개월간의 심사 끝에 83명 중 한 사람으로 차 교수가 낙찰됐다.

그렇게 데이튼에 자리잡은 것이 벌써 14년. 바이올린 교수로, 대학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교수 현악 4중주단의 리더로 바쁘게 지낸다. 한국과 미국에서 요청하는 강연이나 연주 일정을 소화하고, 데이튼한인회의 이사로 한인 사회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데이튼한인회에서 1년에 한 번 가을에 여는 음악회는 차 교수가 주관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3번을 공연했고, 올해도 준비 중이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일궈온 차 교수는 “내가 그냥 아무것도 없이 장애를 가진 초등학생 졸업생이었다면, 세상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초라한 사람밖에 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그동안 받은 사랑을 나눠주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후원과 도움을 통해 배움의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으니 유능한 장애인 학생들을 돕는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싶다고 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어도 유능하지만 돈이 없고, 기회가 없어서 못하는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작게라도 그런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것인데 적극 추진이 안 되고 있는 것이 참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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