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22] 레닌기치와 언론활동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22] 레닌기치와 언론활동
  • 한국외국어대학 글로벌문화콘텐츠연구센터
  • 승인 2014.06.21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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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지역 한인사회에서 <레닌기치>와 같은 신문의 발행은 이미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 1907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 1909년에는 <대동신보>가 발간됐고, 1911년 5월에는 <대양보>, 1912년 4월에는 <권업신문>이 발간됐다. 비슷한 시기인 1911년에는 치타에서 <대한인정교보> 잡지가 발행됐다.

하지만 이들 출판물들은 러시아에 대한 일본정부의 압력으로 단명에 그쳤다. 1917년 혁명 이후에 한인을 상대로 하는 출판물들이 다시 활발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혁명 초기에 우수리스크(소왕령)에서는 <청구신문>, 1917년에는 <한인신보>가 역시 짧은 기간 동안 발간됐다.

1918년 봄에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이동휘와 김알렉산드라 등의 한인사회당 인사들에 의해 조직된 출판사 ‘보문사’에서 잡지 <자유종>, 1920년 말에는 <우리목소리> 신문이 간행됐다. 같은 시기인 1920년 봄에 블라고베쉔스크에서는 러시아공산당 흑룡주위원회(프리아무레) 조선부(고려부)기관지인 <새 세계> 신문, 흑하 공청동맹에서 <붉은별> 잡지, 대한국민의회 기관지인 <자유보> 신문이 발행됐다.

이외에도 극동의 한인사회에서 발간된 신문들은 상당히 많다. 거론된 출판물들 역시 80여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선봉> 신문과는 달리 단명하고 말았다.

1923년 3월 1일 <레닌기치>의 전신인 <선봉> 신문이 연해주 당위원회의 기관지로서 창간됐다. <선봉>은 1922년 10월 25일 백위파의 수중에 있던 연해주가 볼쉐비키에 의해 해방된 이후 발간되어 오던 <3월 1일> 신문이 4호부터는 <선봉>으로 명칭이 바뀌어 발간되기 시작한 신문이다.

한인신문이었던 <선봉>은 당시 발행부수가 3-4천부에 달했다. 이 당시 <선봉>의 책임주필은 <三月一日> 신문의 주필이었던 이백초였으며, 이외에 이성, 오성묵, 이괄, 김진, 최호림, 박동희, 남창원, 황동훈 등이 활약했고, <권업신문>과 <한인신보>의 주필을 지낸 김하구가 총무, 김철, 계봉우 등이 번역원으로 활약했다.

1929년 4월 발행기관이 ‘러시아공산당 원동변강위원회와 직업동맹 원동변강쏘베트’로 바뀌면서 하바로프스크로 이전됐다. 이후 1933년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와서 발간을 계속되던 <선봉>은 1937년 9월 12일자 제1644호로 중단된 후 크즐오르다로 이전됐다.

강제이주 직후인 1938년 3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주 당위원회 뷰로의 결정으로 <선봉> 신문은 <레닌의 기치>라는 제호 하에 5월 15일자 창간호를 시작으로 재출간되기 시작했다. 이전되어 온 <선봉>, 즉 <레닌기치>는 기본적으로 한인들을 공산주의, 사회주의 건설에 동원하며, 사회주의 정신을 교양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크즐오르다에서 활동을 재개한 <레닌기치> 신문은 그 조직과 형식, 내용면에서 크게 발전되어 나갔다. 과거에 비체계적으로 주로 실리던 지방기사들 대신, 유력한 통신기관인 ‘타스’와 ‘아페엔’에서 조직한 우수한 학자, 사회활동가, 주재기자, 특파기자, 직외기자 등의 기사들이 실리기 시작했다.

또 초기 소형판으로 인쇄되어 1937년까지 주 3간으로 발간되던 것이 주 5간(일간)으로 대형판 인쇄됐으며, 크즐오르다주 주당위원회 기관지에서 카자흐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로 됐다가, 공화국간 공동신문으로 격상됐다.

발행부수도 1937년 당시 11,000부에서 창립 50주년인 1988년에는 14,000부까지 증가됐고, 초기의 재정난으로 인해서 몇 명밖에 안됐던 직원도 50여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신문이 크즐오르다에서 알마타로 다시 이전된 후에는 기술적인 측면(활자, 사진 등)에서 큰 진보가 이루어 졌다. 특히 <레닌기치> 신문의 최대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조선어 출판물이라는 우수한 과거의 전통은 여전히 이어져 나갔다.


중앙아시아 한인사회에서 사회주의적인 집단적 선전선동원 및 조직자의 역할이 <레닌기치> 신문의 전부는 아니다. <레닌기치>의 가장 큰 공은 역시 한인사회의 공연예술과 문학 및 전통발전 등, 문화발전에 크게 이바지 해왔다는 데 있다.

<레닌기치>는 특히 고려극장과의 지속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극평은 물론 극장의 생활과 배우들의 공연작품 선전 및 광고 등의 창작사업에 대하여 기사를 게재해 왔으며, 공연작품들에 대한 장점과 단점들을 지적 및 보완해 주는 조력자로서의 역할도 감당해 왔다.

이외에도 시, 소설 등 한인문학발전에 미친 영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레닌기치>는 상시적으로 문예란을 통해 창간 40주년인 1978년에 1백여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해왔으며, 문예란마다 10여 편의 시들을 발표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또한 이 신문을 통하여 많은 작가들과 시인들이 발굴되는 등, 젊은 작가양성사업도 조직되고 이루어졌다. 1971년에는 신문에 게재됐던 우수한 작품들만을 모아 ‘시월의 햇빛’, 1975년에는 씨르다리야의 곡조‘라는 작품집이 출간되기도 했다.

이렇듯 <레닌기치>신문은 해당분야 종사자들에게는 충고자이자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독자들에게는 시야를 넓혀주는 정보제공자의 역할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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