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30] 아버지의 명예회복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30] 아버지의 명예회복
  • 한국외국어대학 글로벌문화콘텐츠연구센터
  • 승인 2014.08.20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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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의 명예회복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법적으로 확고하게 규정됐다. 1993년 4월 1일에 마침내「재러 한인의 명예회복에 관한 러시아연방 최고회의 결정」이 내려졌고, 이는 러시아연방의 새로운 환경 속에서 러시아 한인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총살된 후 소리 없이 사라져간 많은 한인들의 복권과 명예회복은 실제적으로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진행됐다.

실례로 1989년 1월 5일자 <1930-40년대 및 1950년대 초 탄압희생자들의 복권에 관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과 1989년 1월16일자 소련 최고소비에트의 결정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카자흐스탄 악츄빈스크주 검사국은 국가안전위원회 관리국과 협동으로 4천210명에 대한 3천419건의 형사사건을 재심의 했고, 이중 95%의 불명예스럽게 탄압받은 한인들이 복권됐다.

탄압받은 한인들은 우선적으로 제민족의 지도급인사들과 지식인들, 소비에트열성당원들, 비당원무신론자와 신자들, 노동자와 농민들 등 지식이 있고 노동능력이 있는 각계각층의 인물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탄압은 1937년 강제이주 이전에 1차적으로 실시됐고, 강제이주 직후시기에도 중앙아시아 각 지역에서 시행됐다. 악츄빈스크주 카라부타크구역에 이주된 한인들도 이러한 탄압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1938년 여름 한인들에 대한 스파이 활동에 혐의를 두고 대중적인 체포가 시작됐고, 이 과정에서 재판기관이 아닌 내무인민위원부 관리국의 세 기관에 의해 가을에만 115명이 탄압으로 자유박탈형을 받거나 대부분이 총살형을 받았다. 카자흐스탄 악츄빈스크주 카라부타크구역 부게트사이촌의 콜호즈관리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김 발레리 페트로비치와 같은 지역의 농업소비조합 위원장이었던 박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가 이 당시에 희생의 주인공들이다.

극동 치타주의 세야시 출신인 김 발레리 페트로비치(1911년생)는 1931년부터 소련공산당원으로 활동해 오다가, 강제이주 이후인 1938년 7월 14일 반소비에트 민족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불온한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됐다. 김 발레리는 1938년 8월 12일 심문조사에서 1936년부터 일본첩보기관의 스파이활동을 해왔음을 자인해야 했으며, 결국 1938년 10월 3일 내무인민위원부 관리국 세 기관의 결정에 따라 악츄빈스크시 근교에서 총살당했다.

이후 김 발레리는 부인과 딸의 끈질긴 노력으로 복권됐다. 침켄트시에 사는 부인 오 안나 알렉산드로브나(73세)는 딸 오 알라 발레리아노브나와 함께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탄압관련 자료연구위원회에 눈물어린 편지와 함께 복권회복(명예회복) 신청서를 제출했다.

오 안나는 <어찌됐든 진리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되어서 저는 늘그막하게 운이 텄습니다. 저는 1911년생인 남편 김 발레리 페트로비치는 1938년 여름에 체포되어 갔는데, 남편의 운명에 대한 회담을 받기를 간곡히 희망합니다. 그 무서운 숙명적인 날로부터 5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렇지만 본인과 아버지가 체포된 후에 태어난 딸은 남편의 운명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늙었습니다. 나 자신과 남은 자식을 위해서 남편의 죽음에 대한 정당성과 탄압희생자로서의 명예를 회복시켜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라는 내용의 서신을 동봉했다. 남은 가족의 수차례의 노력 끝에 50여 년 만에 김 발레리는 최종적으로 복권 및 복당되며, 명예가 회복됐다.

극동의 하바로프스크지방 루키야노프카촌 출신의 박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1906년생)의 경우도 김 발레리의 사례와 비슷하다. 박 알렉사드르는 1934년도에는 하바로프스크시에서 원동직업동맹 소비에트 지도원으로, 이후에는 <압또렘레스> 체계에서 간부부 부장으로 근무했다.

박 알렉산드르는 1938년 7월 14일 악츄빈스크 내무인민위원부 관리국에 의해 체포되어 7월 19일 혹독한 심문에서 자신의 일본 스파이활동을 시인했으며, 외국 스파이이며 소문난 민족주의자이며 주공청동맹위원회 비서라는 이름하에 일본총참모부와 직접적으로 연계를 맺은 상해공산당 지도자 김 아파나시에 의해 파견됐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박 알렉산드르는 또한 스파이혐의로 총살됐다가 1990년 1월 24일에 복권됐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가족과 친척들은 복권사실을 모르고 있다. 수소문 해보았지만 남은 가족들의 거주지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해주 남부 포시에트구역의 크랍베마을 출신의 진 아나니 미하일로비치(1903년생) 또한 일본 스파이혐의로 1938년 7월 12일 체포되어 총살됐다가 명예회복 됐다. 1929년부터 소련공산당 활동을 해온 진 아나니는 극동 자바이칼에서 참모장 산구르스키가 지휘한 특별적기원동군 내에 독립화학중대장으로 있을 때에, 1934년 정찰임무 파견과정에서 정보자료들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1938년 10월 7일에 총살당했다. 진 아나니 또한 1989년 4월 24일에 복권되어 명예가 회복됐다.

진 아나니의 가족들 또한 복권사실을 모르고 있다. 거주지를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수도 없이 많다. 1990년 9월 29일 카자흐스탄 악츄빈스크 근교에서는 총살당한 인물들의 유골을 개장하고, 기념비를 세웠으며, 군중대회와 추도식을 통해서 억울한 영혼들을 달랬다. 사실 탄압당한 한인들의 대부분이 적법한 재판절차나 확고한 물증도 없이 혹독한 심문에 의한 강요된 자백을 토대로 총살을 당했다. 1990년대 들어서 이러한 탄압당한 한인들의 복권과 명예회복을 위한 한인 자손들의 노력은 계속됐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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