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時論] 미얀마 민주화운동으로 쫓겨난 박창현
[전대열時論] 미얀마 민주화운동으로 쫓겨난 박창현
  • 전대열<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 승인 2014.09.01 0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얀마의 옛 이름은 버마(Burma)다. 인도지나반도 서부에 위치한 나라다. 1824년에 시작한 영국과의 전쟁은 3차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됐으나 욱일승천하는 영국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1886년을 끝으로 인도에 편입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영국연방국이 됐다.

1948년 독립할 때까지 영연방으로 남아 영어사용이 낯설지 않은 나라다. 11세기부터 파간(Pagan)왕조가 번성을 누렸으며 풍부한 쌀 생산국으로 한 때 아시아의 제일부국으로 명성을 떨쳤다. 국민의 대부분이 불교를 신봉하며 민족구성은 버마족이 대부분이지만 중국과의 접경지대에는 한(漢)족이 많다.

67만㎢의 면적에 3~4천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수도는 양곤이지만 군사독재정권의 편의를 위해서 오지(奧地)로 옮겨진 상태다.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미국과 영국은 버마를 통해서 중국 장개석정부를 돕는 원조루트를 개척했다.

버마 동부에서 중국 운남성을 경유하여 중경까지 이어지는 길고긴 이 루트를 가리켜 버마 루트라고 부른다. 독립 후에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마약을 거래하는 비밀 반군이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위세를 떨칠 때도 있었으나 최고 지휘자의 항복으로 이제는 악명을 벗어났다.

미얀마와 한국은 제국주의 외세의 침범으로 국토를 유린당한 쓰라림을 가지고 있으며 독립 후에는 군사쿠데타로 인한 군부독재가 계속됐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은 국민들의 끈질긴 민주화 투쟁으로 이제는 명실상부한 민주화를 성취한 나라로 변모했다.

그러나 미얀마는 아직까지도 확실한 민주화를 이룩하지 못하고 있는 나라다. 다만 극성스러웠던 군부정권이 야당활동을 보장하고 민주선거를 실시하는 등 어느 정도 민주화의 발판이 마련되고 있는 것은 획기적인 변화다.

특히 20년 동안 자택연금 상태에 있던 아웅산 수치의 정치활동을 보장하고 야당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절반의 성공을 거두고 있음은 다행스런 일이다. 한국과 미얀마가 서슬 퍼런 군부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80년대 초반에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다.

사전에 주도면밀한 암살계획을 세운 북한 김일성집단이 아웅산 기념관에 고성능 폭탄을 매설하여 각료를 비롯한 수행자 17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중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다행히도 대통령은 늦게 도착하는 통에 암살을 모면했다. 이로 인하여 미얀마는 북한과의 수교를 단절했으나 얼마 전 다시 복구됐다.

미얀마에도 한류바람이 불어 드라마와 가수들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 미얀마인 이주노동 인구는 약 4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탈북자들은 중국을 거쳐 미얀마나 태국으로 밀입국하여 제3국을 통한 한국 입국이 용이하지만 자칫 미얀마 경찰에 붙잡혀 중국으로 송환되는 수도 생겨 한국의 외교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생명을 걸고 탈출한 이들이 죽음이 기다리는 북한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의 가슴은 찢어진다. 단 한 사람의 송환자도 없이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미얀마 당국이 배려해야만 할 것이다. 미얀마의 군사독재가 극심하던 시절 한국인 한 사람이 사업을 위해서 미얀마를 찾았다. 돈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을 택한 사람은 박창현이다.

그는 빈 몸 하나로 미얀마에 입국하여 뛰어난 상술로 미얀마인들을 사로잡았다. 전남 영암에서 월출산 정기를 타고난 아이디어 하나로 의류업을 발판 삼아 낙지발처럼 사업을 키웠다. 일찍이 상처(喪妻)한 그에게 37세 연하의 양곤대 출신 아가씨를 만날 수 있는 행운도 찾아왔다. 꽃보다 아름다운 딸까지 태어났다.

딸은 지금 진천여중 2학년으로 재학 중이다. 박창현이 모든 사업체를 미얀마 군부독재정권에게 빼앗기고 한국은 초겨울인데 반팔 차림으로 추방 당한지도 벌써 10년이 넘는다. 그는 천성적으로 글쓰기를 좋아하는데다 불의에 대한 저항심이 남달랐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군부독재에 대한 비판의식이 솟아났고 그런 생각을 국내 지인들에게 편지형태로 써 보냈다. 미얀마 군부는 모든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하여 일체의 비판을 금지하고 있었으며 특히 외국의 비판에 몹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때다.

외국으로 나가는 서신조차 비밀리에 검열했다. 박창현의 편지가 여기에 걸려들었다. 경찰에 체포된 그는 엄중한 조사를 받았다. 외국인 신분이어서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는 제법 크게 사업 을 하고 있었기에 당국자들과도 친하게 지냈으나 아무도 도와줄 죄목이 아니었다. 결국 처자식과 사업체를 놔둔 체 강제 추방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심지어 현금 5만 달러까지 금고에 넣어뒀으나 1달러도 만져보지 못하고 쫓겨났다. 오돌 오돌 떨며 귀국한 그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처자식을 데려와 진천에 정착한다. 미얀마는 그 사이에 반쯤 민주화가 진행되어 박창현이 다시 미얀마에서 활약할 기회를 얻었다. 모든 것이 새로운 시작이다.

그가 한국에서 쓴 자전적 소설 ‘37세 연하의 사랑’은 그를 작가의 대열에 올려줬다. 이제 미얀마인들의 건강을 지켜준다는 삼채(蔘菜)-원명 Juumyit- 사업에 눈을 돌렸다. 국내 보급도 활발하다. 진천군에서도 돕는다.

비록 미얀마 민주화운동 덕분에 모든 재산을 잃었지만 그는 미얀마와 한국의 가교이기를 자신한다. 사업조차 민주화운동의 연결고리라고 생각하는 그의 투철한 민주화의 꿈이 미얀마에서 활짝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