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만평(三江漫評)-54] 원세개의 세 조선인 첩
[삼강만평(三江漫評)-54] 원세개의 세 조선인 첩
  • 정인갑<북경 전 청화대 교수>
  • 승인 2014.09.27 0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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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1859~1916)는 중국 근대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무술변법을 진압했고(1898), 중화민국의 대총통도 지냈으며(1912.2~15.12), 중화제국의 황제도 했고(1915.12~16.3) 중국의 서양식 신군도 창립했다. 그러나 그는 23살의 젊은 나이에 조선에 와서 12년간(1882~94) 있으며 조선에서 출세한 사람이다.

그는 조선에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재치 있게 해결하여 성망이 높았다. 중국 영화나 드라마에 나타나는 원세개는 군살이 실룩거리며 험상궂게 못생겼지만 윤덕한의 <이완용 평전>에 따르면 인물이 대단히 잘났다. 그가 왕궁에 나타나면 미남자를 한번 보자며 궁녀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때 그는 귀족가문 안동김씨 김월선(일명 운계)과 결혼했다. 김씨는 자기가 본처인가 했는데 중국에 가보니 이미 우씨 부인이 있고 첩 심씨가 있으며 첩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김씨의 두 하녀 오씨와 민씨도 같이 첩이 됐으며 나이가 많은 오씨가 두 번째 첩, 자기는 세 번째 첩, 민씨는 4번째 첩이어 보잘 것 없는 신세로 전락된 심정이었다.

원세개는 처 한사람에 첩은 아홉이나 된다. 아들이 17명, 딸이 15명이며 그 밑의 손자 22명, 손녀 25명 아들딸과 손자손녀가 도합 79명이나 된다. 첩 심씨를 가장 총애했으나 아이를 못나므로 김씨의 큰 아들 극문克文을 심씨에게 주어야 했다. 극문은 평생 심씨를 어머니라 불렀고 김씨는 아들 하나를 잃은 신세가 됐다.

1916년 원세개가 죽자 민씨는 금덩이를 삼키고 자살했다. 김씨도 금덩이를 삼켰지만 죽지 못하고 신체가 나빠졌다. 평생 친정에 와보지 못했고 친정부모도 중국에 찾아가 김씨를 만나본 적이 없다. 김씨의 어머니는 딸이 너무나 그리워 정신없이 헤매다가 하루는 우물 안에 딸의 얼굴이 비치는 것을 ‘발견’하고 뛰어들었다가 죽었다. 부친도 속이 상해 사흘 후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김씨는 수양이 있고 성부가 깊은 사람이었다. 평생 심씨의 학대를 받으며 우울한 심정으로 살면서도 누구한테나 자기의 가정 사연과 불우한 신세를 말한 적이 없다고 한다. 죽기 하루 전 자기가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심씨에게 심하게 맞아 다리를 상하여 지금도 아프다는 사연, 그리고 부모가 죽은 사연을 말하고 그 이튿날 목숨을 거두었다.

김씨는 이국타향에서 이슬처럼 사라졌지만 그가 낳은 아들과 손자 중에는 아주 대단한 인물이 있다. 맏아들 극문(1889~1931)은 서울에서 태어나 5살 때 중국으로 갔다. 자는 표잠이고 호는 한운이다. 그는 대단히 총명하고 재주가 출중하여 민국 사공자 중의 하나라는 아호로 불렸다.

극문은 황태자로 옹립될 번했지만 정치를 외면했다. 대단히 총명하여 학업에 그리 열중하지도 않았지만 여러 분야의 대가로 됐다. 사서오경에 능했고 서예와 회화에 정통했다. 시가 창작의 수준도 대단했고 고대 서화와 골동품의 수집가, 장기와 마작의 유단자이기도 하다. 중국의 전통 희곡―곤곡에도정통했으며 때때로 친히 연출하기도 했다.

저서로 <한운 수사 소장 송본 제요 29종>, <고전 수필>, <한운 사집>, <한운 시집>, <규당창화시>, <신병 비원>, <환상 사승> 등이 있다.

원세개는 첩 심씨를 편애하며 심씨에게 금전을 아끼지 않았다. 심씨도 원세개의 총애를 받아 교만하고 방자하기 그지없었으며 또한 극문을 익애했다. 하여 극문은 돈을 물 쓰 듯 했고 제멋대로 자랐으며 황음하고 방탕했다. 그는 본처 유매진 한 사람에 첩이 다섯이나 됐으며 그 외에 애인이 70~80명이나 된다.

수십만 냥의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생업에 열중하지 않고 부화 타락하여 이내 탕진해 없어졌다. 만년에는 서예작품과 골동품을 팔아 언명하다가 천진에서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치를 돈이 없어 친구, 후배들이 돈을 모아 치러주었다. 그러나 인연만은 좋아 수천 명이 장례식에 참가했다.

슬하에 4자 3녀를 두었으며 아들 원가고, 가창,가류, 가기, 딸 가화, 가의, 가장이 그들이며 모두 지식인이다. 그중 가장과 가류는 미국유학을 했으며 가류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물리학자이다. 1973년 가류가 부인 오건웅과 같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주은래 총리가 회견하며 “원씨 가문은 밑 세대로 내려갈수록 진보적이다”라는 말을 했다.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이므로 김월선의 안동김씨 가계를 무난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가문에서 김월선·원극문·원가류의 사적을 수집하여 기념관 하나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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