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73] 신라금관
[아! 대한민국-73] 신라금관
  • 김정남<본지 고문>
  • 승인 2014.10.03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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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1921년 9월 어느 날, 경주 노동리 봉황대 주변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박씨가 집을 늘리려고 뒤뜰의 나지막한 언덕을 파다가 고생창연한 황금색의 관을 발견했다. 그 무덤이 금관총(金冠塚)이다. 3년 후 봉황대 아래의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조사하다가 두 번째 금관이 발견되었다. 금관에 매달려있는 특이한 한 쌍의 금방울을 보고 무덤 이름을 금령총(金鈴塚)이라 지었다.

그로부터 다시 2년이 지난 어느 날, 역시 봉황대 서편 얼마 떨어지지 않은 무덤에서 세 번째 금관이 나왔다. 금관에는 봉황으로 보여지는 새가 그려져 있었다. 당시 스웨덴 왕세자로 아시아를 탐방하고 있던 고고학자 아돌프 구스타프 6세가 이 소식을 듣고 서둘러 발굴현장에 나타났다. 그의 발굴 참여를 기념하여 스웨덴의 서(瑞)와 봉황의 봉(鳳)을 따서 무덤을 서봉총이라 하였다.

1971년, 신라고분 하나를 발굴하고 그 내부의 모습을 관광 차원으로 활용하자는 정부 계획에 따라, 우선 규모가 작고 이미 도굴되었던 무덤으로 판단된 ‘155호 무덤’을 파헤치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신라금관 하나를 발굴했다. 그 무덤이 천마총(天馬塚)이다. 다음 발굴은 원래 계획했던 황남대총(隍南大塚)을 겨냥했다.

1974년 10월에 마침내 또 하나의 신라금관이 출토됐다. 부부 중 부인 무덤에서 순금 금관이 출토된 것이다. 이 금관이 2014년, 뉴욕에서 전시돼 찬사를 받은 바로 그 금관이다.

금관을 비롯한 황금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된 곳은 신라 천년 역사 중에서도 김알지(金閼智,65~?)의 후예들인 김씨 마립간(麻立干)들이 통치하던 5~6세기의 돌무지 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서다. 금관들의 장식은 조금씩 다르나 그 형태는 엇비슷하다. 형태는 크게 외관과 내관으로 구분되는데 외관은 신비로우리만치 화려하다.

금관을 놓고 논란이 가장 많은 것은 용도 문제다. 어떤 학자는 외관과 내관을 분리해서, 화려하고 장중한 외관은 공식행사용이고 내관은 일상용이라고 주장하나 대부분 학자들은 일괄하여 의례용인가 실용품인가, 아니면 장례용인가를 놓고 논의를 벌인다. 금관연구에서 아직까지 가장 큰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문제가 바로 왜 5~6세기에 이러한 찬란한 황금 문화가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는 원류 문제다.

지금까지 세계 각지에서 발견된 고대 사회의 금관은 모두 합쳐서 10점 밖에 안된다. 그 중 신라금관 6점과 가야금관 1점은, 그것도 가장 완벽한 것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나올 것을 예견한다면, 우리나라는 문자 그대로 ‘금관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황금 문화권의 동쪽 끝에서 황금 문화의 전성을 구가한 신라의 금관은 단연 그 진수이자 꽃으로서, 우리 문화의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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