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만평(三江漫評)-56] 북경의 지리와 역사
[삼강만평(三江漫評)-56] 북경의 지리와 역사
  • 정인갑<북경 전 청화대 교수>
  • 승인 2014.10.30 0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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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은 서귀(西貴), 동부(東富), 북공(北空), 남궁(南窮)이라는 설이 있다. 즉 서쪽은 귀족동네, 동쪽은 부자동네, 북쪽은 빈 동네, 남쪽은 가난한 동네이다. 이는 천만 맞는 말이며 그 유래가 유서 깊다.

북경에서 인류가 가장 일찍 정착한 곳은 서쪽이며 동쪽으로 점점 확장해 나아갔다.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주구점(周口店)이 약 50만 년 전에 북경원인(猿人)이 살던 고장이다. 이곳이 아마 북방 중국인 조상의 발원지일 것이다. 그 후 문명사회로 진입하여 하·상·주(춘추·전국)로부터 원 이전까지 수천 년간 북경지역은 줄곧 계(薊)·연(燕) 등으로 불리며 작은 제후국의 수도나 지방정부의 소재지였다.

몽고족이 원을 세우며 정한 수도가 주구점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20km 이동한 지금의 석경산구(石景山區) 일대이다. 지하철 1호선의 서쪽 종착역 평과원(苹果園)의 앞 정거장이 ‘고성(古城)’ 역인데 바로 옛날 원나라가 수도의 본거지이므로 ‘고성’이라 부른다.

명과 청이 왕궁의 위치를 원의 중심지로부터 동쪽으로 약 10km 이동하여 지금의 자금성으로 옮겼다. 그러나 유람지나 피서지 및 왕족의 별장을 다 서쪽에 두었다. 이 귀족 동네가 지금은 중국 교육과 정치의 중심지로 됐다. 북경시 대학의 거의 다와 국가 수뇌부가 있는 중남해(中南海), 전화국․전보국·방송국 등 요해 부서가 다 천안문 서쪽에 있다.

북경을 장악하려면 이 서쪽을 장악하여야 한다. 1989년 천안문 사태 때 6월 4일 새벽 여러 개 군부대(대학생 단식을 진압하는데 대한 각 부대의 견해가 달랐음)가 동서남북의 같지 않은 방향으로부터 진입하며 북경시를 통제하였는데 등소평(국가주석)은 그들이 가장 신임하는 28군단에게 서쪽 지역을 맡겼다. 동, 복, 남으로부터 진군한 부대에게는 탄알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쿠데타를 막기 위해서이겠다.

옛날 상품의 주축은 양식과 천이었다. 대량의 양식과 천이 남방으로부터 북경으로 몰려들었으며 주요 교통수단이 운하였다. 지금 북경시 중심지와 통주구의 사이가 바로 운하의 종점이며 실어온 양식과 천을 동쪽에 부리었으므로 그쪽이 자연히 장사군 부자들의 집결지로 됐다. 그때의 동쪽은 지금 북경역, 국제호텔에서 약간 동쪽이었다.

국제호텔에서 24선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가노라면 나타나는 정류장―녹미창(祿米倉)은 쌀로 봉급을 주는 곳이고, 건면호동(乾面胡同)은 밀가루로 봉급을 주는 곳이며, 선판호동(船板胡同)은 선박 정비소, 해운창(海運倉)은 운하에서 부린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이다. 이 장사꾼 동네가 동쪽으로 약 1~2km 정도 확장된 것이 지금 북경의 상업중심지이다.

원나라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봉기군에게 소멸된 것이 아니라 몽고족 전체가 북쪽 고향으로 도망간 것이다. 유생역량을 보존하였으므로 도망간 후 끊임없이 남침했고 따라서 명나라 때 북쪽은 줄곧 전쟁터였다. 팔달령(八達嶺) 장성은 바로 명나라 때 몽고족의 남침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북쪽 변경을 확보하기 위해 명나라는 부득불 수도를 남경으로부터 북경으로 옮겼다.

아마 이런 원인으로 북쪽에 살기를 싫어했는지 그곳이 빈 동네로 돼 버렸다. 1990년 아세안 게임과 2008년 올림픽의 선수촌이 모두 북쪽에 정해진 원인은 그곳만이 빈 자리었기 때문이다. 중공정부는 중국주최의 올림픽을 대비하여 천단공원 동남쪽의 약 2㎢ 면적의 부지를 수십 년간 비워두었다.

1990년 아시아 올림픽을 중국에서 치르게 되어 북경시 건설 담당 부시장 장백발(張柏發)이 서울 88올림픽 선수촌을 견학 한 후 이곳이 너무 좁아 선수촌을 북쪽에다 만들었다. 개혁개방 후 부동산 업자들도 북쪽에 집을 대량으로 지으며 풍수가 좋다느니 뭐니 하며 떠들어대고 있다. 이젠 북쪽이 빈 동네가 아니다.

남쪽은 아마 풍수가 나쁘다고 인정해서인지 가난한 동네로 됐다. 지금도 남쪽에는 국가기관, 고급 상점, 병원, 대학, 호텔 등이 없으며 부동산 가격도 다른 데보다 30% 정도나 싸다. 옛날 못사는 서민과 온갖 거지, 장인, 광대꾼들은 다 남쪽에 집중돼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고관대작은 당연 거지동네에 살기는 만무하므로 남쪽은 전통적으로 순수 북경인의 비중이 가장 큰 동네이다. 필자가 북경대에 다닐 때 북경시의 방언을 당연 남쪽에 가서 조사하곤 하였다.

지금 북경시의 패턴은 수천 년 전부터 서서히 형성된 것이며 지금 북경 도시건설을 할 때도 역사전통이 기초에서 진행한다. 원조부터만 따져도 700년 전부터 형성된 관념이 지금도 강력히 작용하는 현실로부터 중국인의 보수성을 실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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