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외개척기①] 이말재 카타르회장 "전쟁터에 기회가 있다"
[나의 해외개척기①] 이말재 카타르회장 "전쟁터에 기회가 있다"
  • 이말재 전 카타르한인회장
  • 승인 2015.09.0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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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맨주먹으로 중동행...건설현장 케이터링, 장비대여, 철골업체 경영
▲ 이말재 회장

1983년 중동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나는 말 그대로 맨주먹뿐이었다. 당시 내 신세는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손에 쥔 거라곤 내가 타고 갈 비행기표 한 장이 다였다. 아내와 어린 두 딸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도망치듯 나선 길이었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 탑승 직전에야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중동으로 떠난다는 사실만 간단히 알렸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는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큰 딸, 1학년이던 작은 딸이 눈에 밟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 몇 년 전까지 나 역시 어엿한 ‘사장님’ 소리를 듣고 살았다. 1970년대 중반 인천 십정동에 차린 철공소가 내 사업체였다. 서울 동대문시장에 있는 책가방 업체들에 장식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것이 주력이었다. 창업 이래 몇 년 동안은 공장이 잘 돌아갔다. 종업원이 많을 때는 30여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꽤 번창했다.
내가 철공소를 차린 것은 그나마 배운 도둑질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고향은 부산 영도다. 6남매 중 막내였다. 그래서 어렸을 적 이름도 ‘끝째’였다. 끝째가 호적 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동사무소 직원이 ‘끝’을 한자 ‘끝 말(末)’자로 바꾸는 바람에 지금 이름 말재가 되었다. 위로 형제가 많아서인지 나는 제멋대로였다. 흔히 말하는 ‘문제아’였다. 학교 공부는 늘 뒷전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다니는 것이 일이었다.

어찌해서 야간 공고(工高)을 들어가 배운 기술이 용접이었다. 그마저 졸업도 못하고 중간에 중퇴해 버렸다. 서울 친구 집에 놀러왔다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학교도 그만둔 것이다. 마침 셋째 형님이 서울에 계셔서 먹고 자는 것은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것은 결혼을 하고 난 후였다.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철공소를 차린 것이다. 누군가 사업은 담장 위를 걷는 것과 같다는 말을 했다. 늘 위태롭게 한 발 한 발 걸음을 떼야한다는 뜻일 게다. 경험이 부족하고 패기만 앞섰던 철공소 사업은 이내 한계에 부딪혔다. 결국 나는 빚만 잔뜩 지고 손을 들고 말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를 당했던 1979년의 일이었다.

나는 하루 아침에 길거리로 나 앉았을 처지로 내몰렸다.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집안 세간까지 차압 딱지가 붙었다. 당장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먹여 살리는 일이 발등의 불이 되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당시 한창 건설 중이던 지하철 공사장에서 막노동도 했다. 젊었을 적 좀 놀았던 명동 사보이호텔 옆에서 포장마차도 해봤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내가 언제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암담하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내에서는 재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무엇이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런 절박한 심정에서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렸다. 어쩌면 그곳에 내가 살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가장 먼저 머리 속에 먼저 떠오른 것이 중동의 건설 근로자였다. 용접, 철골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1970년대에는 우리나라 건설 업체들의 중동 진출이 붐을 이뤘다. 무작정 몇 군데 건설회사 문을 두드리다 마침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냈다. 라이프주택의 사우디아라비아 담맘 주택건설 현장이었다. 나는 그 때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계약 기간 5년 동안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 중간에 한국에 돌아온들 재취업도 거의 불가능했던 시기여서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중동으로 떠나던 날 아침 나는 초등학생인 두 딸들에게 “학교에 잘 다녀오라”는 인사말을 새삼 건넸다. 아무 것도 모르고 등교하는 두 딸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일할 현장이 있던 담맘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동부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유전과 군사시설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주택공사 현장에서 내가 처음 맡은 보직은 작업반장이었다. 공사장 인부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흔히 말하는 ‘노가다 십장’ 자리였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중부의 카미스 알-무샤이트를 거쳐 국토 복판에 있는 수도 리야드 등지로 현장을 옮겨 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내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진 빚 때문이었다. 매달 월급의 절반쯤을 빚 갚는데 떼고 나면 생활비조차 빠듯할 지경이었다.

리야드에서 일할 때 나는 운명의 전기를 맞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경비원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됐다. 5년째 혼자 지내는 삭막한 타국 생활에 나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을 때였다. 남들이 보기에 하찮아 보여도 나는 그 자리가 욕심이 났다. 가족과 함께 안정된 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기대에서였다. 마침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동안 대사관을 드나들면서 평소 가까이 지내던 대사관 직원이 한 명 있었다. 내 속마음을 알고 대사관 취업에 그가 다리를 놓아 주었다. 미관말직이지만 신분이 보장되는 내가 대사관 직원이 된 것이다.

나는 대사관 정문 경비를 맡아 6년 가까이 일했다. 우리 대사관을 찾는 사람들이 첫 대면하는 직원이 바로 나였다. 대사관을 드나드는 한국인 중에는 특히 건설회사 관계자들이 많았다. 그들을 포함해 대사관 손님 모두에게 예의를 갖춰 깍듯하게 대했다. 궂은 일이 있을 때는 내 일처럼 나서서 돕기도 했다. 이 때 두루 맺은 좋은 인간관계는 내가 나중에 중동에서 사업을 하는 동안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모든 일이 사람에게서 시작되고 사람에게서 끝이 난다는 것은 진리라고 나는 믿는다.

대사관 직원이 된 뒤에 내게 가장 큰 변화는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나 지금이나 외국인은 비자 없이는 입국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대사관 직원이란 신분은 큰 위력을 발휘했다. 아내와 두 딸까지 사우디아라비아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한국을 떠나온 지 실로 5년만이었다.
아내도 사우디아라비아에 들어와 어려운 살림에 힘을 보태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아내는 천성이 부지런해서인지 금세 일자리를 찾았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국식품 가게였다. 맞벌이는 당장의 어려운 살림살이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 때까지도 현지에서 할 수 있는 사업거리를 꾸준히 찾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사업거리가 눈에 띄어도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 그런데 아내가 옆에 있으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중동에서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족 특히 부부가 함께 올 것을 빼놓지 않고 조언한다. 부부가 함께 해야 성공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당구장을 내놓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즐길거리가 마땅찮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당구는 가장 대중적인 오락 중 하나였다. 리야드 시내에 있었지만 당연히 장사가 안돼서 내놓은 가게였다. 부업 삼아 직접 해보자는 심산으로 그 가게를 인수했다. 우리가 운영을 시작한 뒤로 손님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전과 가장 큰 차이는 손님들이 원하면 간단한 식사도 준비해 준다는 점이었다. 원래 당구장에 없었던 식당을 조촐하게 겸하게 된 것이다. 아내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음식을 먹어본 교민들마다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더 맛있다며 칭찬을 했다. 교민들이 자발적으로 내준 입소문의 효과는 대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민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시 리야드에는 교민들이 1만여명 가량 있었다. 식당의 규모를 점차 늘리면서 당구장보다 본업으로 바뀌어갔다. 30여명이 근무하던 대사관 직원들도 단골 회식 장소로 우리 식당을 이용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대사관은 대부분의 중앙 부처에서 파견관을 두고 있어 직원수가 중동에서는 가장 규모가 가장 큰 편이었다.

대사관 직원들을 비롯해 교민들이 늘 그리워하는 것은 ‘고향의 맛’이었다. 그 중에서도 현지에서 구경하기 힘든 보양 음식을 자주 찾았다. 아마도 살인적인 더위와 일상적으로 싸워야 하는 사막 기후 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격한 이슬람 국가에서 보양식 재료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다. 이슬람 국가에서 가장 흔한 고기는 양고기다. 이를 주 재료로 삼아 비슷하게 흉내를 내는 수 밖에 없었다.

아내가 메뉴 개발에 직접 팔을 걷어부쳤다. 양 한 마리를 통째로 삶은 다음 한국의 보양탕처럼 끓여내는 것이 ‘양(고기)탕“이다. 손님상에 올린 겉모양새는 처음에도 보양탕과 비슷했다. 한데 한국인이 싫어하는 양고기 특유의 누린내가 문제였다. 현지에서 온갖 양념을 구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 계속 실패작으로 끝났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놀랍게도 그 비법을 찾아냈다. 옛날 어른들한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요리할 때 우리 메주콩을 넣어봤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누린내가 싹 잡혔다.

냄새가 사라진 양탕은 인기 폭발이었다. 양탕 뿐만 아니라 수육 요리를 찾는 손님도 점차 늘어났다. 이 또한 한국식 요리법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양고기 특유의 식감이 살아나면서 한국에서 먹던 보양 음식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드디어 끝을 알 수 없는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의 번창을 기대하며 나와 아내의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위기가 찾아들었다. 식당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91년 1월 중순 1차 걸프전이 터졌다.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쿠웨이트는 사우디아리비아 북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접경 국가였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다국적군 참여 30여개 국가 중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라크와 맞서는 최일선 전쟁기지 역할을 했다.

한 달 반 가까이 전개된 이 전쟁 기간에 이라크가 발사하는 스커드 미사일이 리야드 인근까지 날라오기도 했다. 이를 요격하기 위해 다국전군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쏘아대는 공방전이 수시로 벌어졌다. 그래서 밤만 되면 인적이 드문 사막으로 피신을 가야 했다. 현지에서는 흉흉한 세균전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당시에는 깨진 유리창마다 테이프를 붙이고, 늘 방독면을 차고 다녀야 했다. 언제든지 생명을 다 잃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본국에서 교민 철수령을 내린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대사관에서도 이를 적극 권유했다. 우리 국적 비행기들이 속속 현지에 도착해 긴급 교민 수송에 나섰다. 당시 웬만한 교민들은 대부분 당시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돌아갔다. 나도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나는 고민 끝에 가족과 함께 끝까지 남기로 결심했다. 모처럼 잡은 재기의 기회를 잃지 않고 싶어서였다.

그 밑바닥에는 어린 시절 또래들과 숱하게 싸움질을 하면서 기른 배짱이나 생사관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가 봐야 힘겨운 삶과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두려움이 더 컸을 수도 있다. 나중에 보니 철수하지 않은 교민들은 대체로 나처럼 가난한 축에 속한 교민들이었다. 가족들을 철수시켰더라도 대사관 직원들과 기업의 필수 요원들은 현지에 남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목숨을 건 너무 위험한 모험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 또한 그 말을 부인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위기는 기회도 될 수 있다는 것이 평소의 내 소신이기도 했다. 그 소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설령 도박에 가까운 선택일지라도 차라리 현지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욕구도 당시에는 컸었던 것 같다. 다행히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우리 가족은 무사 했다.

식당도 피해를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오히려 흔히 하는 말로 내게 대박을 안겨줬다. 현지에 남은 사람들은 주로 성인 남자들이었다.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낼만한 문화공간이 거의 없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그들은 밤이 되면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전쟁 관련 소식도 궁금하고 불안하기까지 했던 그들이 매일 같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리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식당 일이 더 바빠졌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돈을 쓸어 담다시피 했다.

기업인들이 왜 위험한 전쟁터를 마다하지 않는 지 그 이유를 직접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대로 한국의 내로라 하는 재벌 중에서도 전쟁의 위기를 기회로 활용해 성공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일반적으로 전시 상황에서는 모든 물자가 부족할 수밖에 없고,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부족한 물자를 공급할 수만 있다면 돈은 저절로 굴러 들어오게 되어 있다.

이 때부터 나는 이런 전쟁터와 같은 위험지역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갖게 됐다. 요즘 나는 이런 지역을 일부러 찾아 나서는 일도 잦아졌다. 남들이 피하는 이런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사업거리가 늘 넘쳐나기 때문이다. 불안한 정세로 인해 늘 이런저런 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은 그런 점에서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업의 터전이 되어주고 있다. 나의 이런 경험을 ‘나약하다’는 소리를 듣는 요즘 우리 젊은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식당 사업은 날로 상승 가도를 달렸다. 나도 대사관 일을 그만 두고 이런 저런 부지런히 사업거리를 찾아 나섰다. 내가 찾아낸 사업은 ‘중고 장사’였다. 1차 걸프전쟁을 거치면서 눈여겨 본 것은 떠나는 사람들이 남겨두고 간 수많은 물품들이었다. 기업은 기업대로 현장을 철수하게 되면 숱한 장비들을 중고 가격으로 처분했다. 일반 교민들도 떠날 때는 짐이 되는 세간은 거의 버리고 가다시피 했다.

이런 물품들을 골라서 사들여 되팔면 돈이 되겠다 싶었다. 꼭 전쟁이 아닌 평상시에도 기업에서 공사가 끝난 후,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나는 교민들이 남긴 물품은 늘 넘쳐났다. 나는 이 중에서 돈이 될 만한 물품을 사들여 필요한 사람에게 넘기는 중고 장사를 꽤 오랫동안 했다. 이문도 짭짤한 편이었다.

나는 1990년대 중반 중동에서 캐이터링 사업을 새롭게 시작했다. 캐이터링 사업이란 건설 현장의 식당, 속칭 ‘함바집’ 운영이다. 내가 지금도 살고 있는 카타르에서 우연찮게 그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1995년 나는 카타르로 건너갔다. 우리 기업 중 한 곳이 카타르에서 대형 가스플랜트 공사를 수주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카타르는 사우다아라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페르시아만에 접해 있는 조그만 반도국가다. 인구는 200만명 안팎이지만 중동에서 손꼽히는 자원 부국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나라만 다를 뿐 지리적으로만 보면 이웃이나 다름 없다.

처음 내가 카타르에 건너갈 때는 그 공사 현장에 필요한 자재 일부라도 납품할 길을 찾아볼 계획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대사관에 근무할 때 인연을 맺었던 그 회사 관계자가 이 사업 개척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카타르 현지에 도착해보니 본격적인 공사 시작을 앞두고 일부 직원들이 임시로 현장에 파견돼 있었다. 일단 직원들이 현장 근무를 하게 되면 기업 입장에서 1차적으로 부닥치는 문제가 먹고 자는 일이다.

그 기업도 현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부터 찾아 나섰다. 그 기업 입장에서 이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 카타르 교민 한 명을 어렵사리 찾아내기는 했다. 당시 카타르 교민이라야 몇십명에 불과했다. 그 중에서 함바집 운영 경험이 있는 사람은 사실상 그 밖에 없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가 임시 파견 직원들의 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회사 자재 담당자가 내가 머물고 있는 카타르 수도 도하의 한 호텔로 찾아왔다. 그리고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내용인즉슨 본 공사를 앞두고 함바집 계약을 해야하는데 그가 “단가를 너무 높게 부른다”는 것이었다. 자기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 사람이 배짱을 부렸던 모양이다. 과하게 욕심을 부리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당시 중동에서 큰 공사가 벌어지면 함바집 이용 숫자가 수천명에서 1만명 안팎에 이른다. 따라서 함바집 이용 단가에 해당 기업들도 민감한 편이다. 그 기업 담당자가 말하는 결론은 “당신이 적당한 단가로 맡아줄 수 없느냐”는 제안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해볼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단가도 크게 낮출 수 있었다. 일사천리로 단가 협상을 하고, 본 계약까지 끝냈다. 내게 중동에서 중흥기를 안겨준 캐터링 사업은 이렇게 시작했다.

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나는 본거지를 아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카타르로 옮겼다. 같은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카타르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자유로운 나라다. 카타르는 이슬람 국가 중에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데 선진적이다. 특히 이슬람 율법에 따른 제약이 많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자들이 생활하기에 무척 불편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예를 들면 여성들이 반바지 입는 것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금기이지만 카타르에서는 허용되는 식이다.

캐터링 사업을 하면서 내가 세운 첫 번째 원칙은 ‘고객만족’이었다. 내게 주된 고객은 공사 현장의 근로자들이었다. 그들에게 한국에서보다 더 한국적인 맛을 제공하려고 애를 썼다. 둘째는 ‘박리다매(薄利多賣)’였다. 사전적으로 풀이하면 단가 이익은 적더라도 많이 팔아서 전체 이익을 늘린다는 뜻이다.

이런 원칙들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값은 따지지 않고 좋은 식재료 사용을 지금까지 고집하고 있다. 좋은 식재료를 써야 제대로 된 음식 맛을 낼 수 있고, 그래야 까다로운 고객들의 입맛을 맞출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예들 들면 물 좋은 생선을 멀리 두바이에서 구입해 컨테이너로 실어오고, 우리 입맛에 맞는 쌀을 제 3국에서 구입해 직접 수송해오는 식이었다. 이런 바람에 비용이 과해 밑지는 한이 있어도 그 고집은 꺾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캐터링 사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고, 길게 보면 그것이 남는 장사였다.

나는 요즘 캐터링 입찰을 위해 현장에 갈 때는 된장, 고추장, 고춧가루 같은 기본 양념부터 챙긴다. 천연 조미료도 30봉지쯤은 함께 가져간다. 그 이유는 언제 어디서든 한국식 밥상을 차리기 위한 내 나름의 준비다. 공사 현장에 가면 먼저 파견 나온 선발대원들이 대체로 라면 등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입에 맞지 않는 현지 음식으로 겨우 허기를 면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고서였다.

타지에서 고향 음식을 그리워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현지 음식이나 간이식에 물린 공사 현장의 선발대원들은 나를 만나면 한국 음식부터 찾는다. 그런 요청을 받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선다.

차를 가지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장을 본다. 고기와 생선, 야채 등 기본적인 한국 음식을 요리하는데 필요한 식재료는 중동 어디를 가도 거의 다 있다. 이를 재료로 내가 휴대하고 다니는 양념으로 직접 요리를 한다. 비슷한 재료가 있으면 겉절이 김치도 담근다. 이 때면 선발대원들은 오랜만에 밥을 제대로 먹었다는 만족감을 이구동성으로 표현한다. 이는 캐터링 사업 입찰에 앞선 일종의 시식회가 되기도 한다.

이는 예멘 아덴 항만확장공사 때 캐터링 사업을 따낸 이후 습관이 됐다. 당시 우리 기업이 이 공사를 수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찾아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추장, 된장 등을 챙겨갔다. 도착해 보니 현장에는 선발대원 7명이 도착해 있었다. 도무지 입에 맞지 않는 현지 음식으로 고생하고 있는 그들에게 그 양념으로 한국식 밥상을 차려 주었다. 그들로부터 음식이 먹을만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그들이 입소문을 냈고, 그런 식당을 원한다는 근로자들의 요구를 회사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덕에 그 공사 현장의 캐터링 사업권을 따내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 경우는 운좋게 그리됐지만 밥맛을 먼저 보여줬다고 해서 캐터링 사업 공개 입찰에서 특혜란 없다. 입찰을 따내는 나만의 비법이 있다면 이런 식으로 그들이 현장에서 가장 아쉬워하는 점을 사전에 파악해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사장인 내가 직접 나선다는 점도 신뢰를 얻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또 한 가지 도시에 공사 현장이 있는 경우 경쟁 업체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곳이 오지(奧地)라면 쟁쟁한 업체일수록 들어가길 꺼려한다. 식재료 조달도 어렵고 고생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오지를 주된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그 이후 크고 작은 캐터링 사업 입찰에서 나만의 노력과 방법으로 줄줄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다.

내가 벌인 캐터링 사업 무대는 예멘,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은 물론 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 아시아까지 확장됐다. 예멘의 아덴 항만확장공사 시절엔 근로자가 무려 4000명쯤 에 달했다. 투르크메니스탄에 정유공장을 건설할 때도 그런 2500여명이었다. 공사 기간이 3~4년씩 걸리는 그런 현장에서 나는 이 많은 근로자들에게 삼시 세끼를 제공하는 일을 무난히 해냈다. 때로는 해당 기업의 요청에 따라 근로자들의 잠자리 해결사로 나서기도 했다.

캐터링 사업 경험까지 살려 나는 카타르에서 식당 사업도 재개했다. 수도 도하 중심가 알 사아드 스트리트에 있는 코리아 가든 레스토랑이 그것이다. 내겐 모기업과 같은 존재다. 10여년 전에 문을 열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이 레스토랑은 지금은 200여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을만큼 규모가 큰 편이다. 조그만 정원을 중심으로 본채와 양쪽 별채까지 건물만 세 동이다. 나는 이 레스토랑의 트레이드 마크로 생각하고 정문을 청기와 지붕의 한국식 대문으로 일부러 꾸몄다.

메뉴도 리야드에서보다 크게 늘렸다. 해물전골, 황태구이, 장어구이, 낚지볶음, 갈비찜, 갈치조림, 냄비오뎅, 콩국수 등 한국식 음식들이다. 리야드 식당에서 개발했던 양탕과 양수육은 여기서도 인기 메뉴로 꼽힌다. 반찬 또한 한국식 배추김치, 깍두기, 오이무침 등이 빠지지 않는다.

한식 상차림 위주라고 해서 한국 사람들만 찾는 레스토랑이 아니다. 손님 중 한국인은 겨우 다섯 명에 한 명꼴 정도다. 중동 현지인이 가장 많고, 중국인, 필리핀인, 인도인 등도 자주 찾는 레스토랑이다. 지금 도하 시내에서는 알 자지라 방송에 소개될 정도로 개성 있는 명물 레스토랑이 되었다. 시내 유명 호텔 매니저나 주방장들이 벤치마킹 차원에서 시식을 하고 갈 정도로 요즘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레스토랑을 개업했던 그 즈음, 나는 새로운 사업에 손을 댔다. 2005년 이란에서였다. 그 해 우리나라 모 기업이 이란에서 총16억달러 규모의 공사를 큰 수주했다. 사우스파 가스처리시설 플랜트 공사였다. 세계 플랜트 공사 역사상 몇 번째 순위 안에 들만큼 대규모였다.

나 또한 이렇게 큰 사업거리를 놓칠 수 없어 당연히 응찰했다. 하지만 입찰에 실패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공사 규모가 커서 캐터링 사업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사업거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나는 현장을 떠나지 않고 새로운 사업거리와 관련 주의 깊게 살피고, 아는 사람들을 만나 정보를 귀동냥을 했다.

이 때 새롭게 눈에 들어온 사업거리가 장비대여업이었다. 시공사들이 주요 장비를 대부분 필요할 때마다 빌려 쓰고 있었던 것이다. 시공사 입장에서도 비용과 시간 등 모든 측면에서 사는 것보다 빌려 쓰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이다. 그렇다고 내가 당시 무슨 장비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비대여 자체가 큰 사업이어서 별도 회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회사들과 시공사를 연결하는 중개인 역할은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는 서로 필요로 하고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장비대여 중개업이라는 새로운 사업에 뛰어 들었다. 이 사업을 위해 ‘퀄리티 이큅먼트’라는 법인까지 새로 만들었다. 시공사에서 대여를 원하는 장비는 크레인, 지게차, 발전기 등 종류가 다양했다. 나는 이 때부터 관련 장비 회사들을 발로 뛰어 거래선으로 뚫었다. 처음에는 장비회사에서 앞서 말한 법인 이름으로 먼저 장비를 대여했다. 그리고 이를 다시 시공사에 대여하는 ‘서브 렌트’ 방식이었다. 나에게 장비대여 중개업은 새로 발견한 블루오션이었다. 당시 그 공사기간 중 200톤급 크레인만 100대 가까이 중개하는 등 내 입장에서는 사업을 크게 벌였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고비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서 건설업 수위를 다투는 그 기업에서 대여금 지급을 미루기 시작한 것이다. 대재벌의 일원이었던 그 기업이 당시 국내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정치바람에 휘말려 일시적으로 자금 압박이 심해졌다는 소문이 중동 현지에서도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대여 대금 지급이 제때 안되자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대금 지급 여부를 따지는 장비회사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그 중 내가 가장 곤욕을 치른 회사가 캐터필러사였다. 약칭 CAT로 불리는 캐터필러사는 미국 일리노이주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의 건설·광산·에너지 관련 장비 생산업체다. 두바이에 있던 캐터필러사 중동법인을 어렵게 뚫어 그 기업에 발전기를 100여대 대여했는데 그 중개를 내가 했었다. 캐터필러사에서 나에게 대금 지급에 관한 첵임을 지라고 요구했다. 그 기업은 믿을 만하다, 조금 기다리면 자금 사정이 풀릴 것이다 등등의 말로 사정도 하고 달래도 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마침내 캐퍼필러사 중동법인장은 쿠웨이트인이었다. 그 법인장이 막판에는 나에게 대금 지급을 보증하는 수표를 써달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 액수가 자그만치 9억원 가량이었다. 나로서는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야반도주할 각오로 수표에 사인을 했다.

다행히 그 일은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금 지급이 이뤄졌고 나는 보증 용도로 써줬던 수표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나는 중동의 장비대여 업계에서 ‘신용’이라는 또 하나의 큰 자산을 얻었다. 이는 장비대여 중개업의 성패를 가를 만큼 중요하다. 시공사에서 요구하는 장비를 적기에 대여해 주려면, 공급 업체에서 필요할 때 곧바로 이를 확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요즘 장비대여 사업에서 내가 하는 역할은 시공사의 요청이 있으면 장비대여 회사의 담당자와 연결만 시켜주는 것이다. 성사 여부는 그들끼리 결정한다. 나는 다만 성사가 됐을 때 정해진 리베이트만 받는 형식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 내가 부담해야할 리스크를 없앤 것이다. 아무에게도 손해를 끼치지 않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이런 것이 진정한 중개사업이라고 나는 여긴다. 내가 중동에서 벌인 사업 중에 가장 잘한 선택이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내 명함에 케터필러사 중동 딜러라는 직함을 빼놓지 않고 있다.

내가 경영하는 사업체 중에 유나이티드 아랍 스틸이라는 회사도 있다. 우리로 치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철공소라고 할 만하다. 건설공사장이나 중동의 공공기관 등지에서 필요로 하는 철골 구조물 등을 만들어 납품하는 회사다. 2000년 무렵 이 회사를 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안정적으로 사업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건설업은 다른 업종보다 경기 부침에 따른 영향을 크게 받는다. 또 캐터링 사업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없어 누구나 할 수 있고 그만큼 입찰 경쟁이 심한 편이다. 따라서 언제든 일감이 끊길 수 있는 약점이 있다. 나는 다행히 캐터링 사업을 공백 없이 이어갈 정도로 꾸준히 하고 있지만 늘 불안했다. 철공소 사업보다 나중에 시작한 장비대여 중개업도 불안한 점에서는 마찬가지여서 나는 그 때 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인천에서 철공소를 직접 경영해 본 경험이 있어 낯선 분야가 아니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거기다 우리나라의 철공기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만큼 높은 수준이다. 그래서 현장에서 요구하는 품질 수준을 얼마든지 맞출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업을 하기로 최종 결단을 내렸다. 도하 북쪽 자동차로 40여분 거리에 있는 모래벌판에 공장을 세웠다.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공장은 지금까지 계속 순항 중이다. 이 사업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납품기일을 어긴 적이 없을 정도로 높은 신용을 얻고 있다. 현재 이 회사에서 일하는 근로자는 150여명, 주로 네팔인, 필리핀인들이다.

나는 이 회사에도 한국인 직원들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램을 늘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일방적인 희망사항에 그치고 있다. 그동안 몇 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이 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1~2년 안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꼭 처우 문제때문은 아닌 듯 했다. 숙식을 제공하고 연봉이 4000만원 안팎이었다. 이 정도면 한국에서도 평균 수준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1970~80년대 부모 세대처럼 뙤약볕에서 현장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에어컨 설비가 완비된 시원한 사무실에서 앉아서 하는 관리· 행정업무가 주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너무 쉽게 그들은 귀국행을 택했다. 그 이유로 문화가 없고, 친구들이 없다는 것을 주로 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이유가 내 귀에는 한 마디로 ‘낯선 땅에서 고생하기 싫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 때 나는 한국 청년들 사이에서 이제 헝그리 정신은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어진 헝그리 정신을 새로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외로움 등은 외국 생활을 하다 보면 당연한 뒤따르는 불가피한 것이다. 이만한 불편함은 아무리 귀하게 자랐다 하더라도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만일 지금이라도 얼마간의 고생을 각오하면 나라 밖에도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카타르만 하더라도 2022년 월드컵을 준비하느라 나라 전체가 거대한 건설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장 9개, 호텔 70여개를 새로 짓고 있고, 지하철공사, 초대형 주차장 건설 등 관련 인프라 확충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그만큼 일할 기회가 많다는 뜻이다.

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해외 특히 중동에 진출해보라고 나는 조언하고 싶다. 대학에서 기술 분야 전공을 했거나 관련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면 일자리를 구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해외 취업이라고 해서 꼭 현지 외국인 회사에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카타르를 비롯한 중동지역에서는 한국인을 찾는 회사는 현지에 진출한 한국회사가 훨씬 많다. 다만 요즘은 노동 환경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현지 진출 한국 회사들도 본사 직원을 파견하기 보다는 현지 채용을 더 선호한다.

이를 마다하지 않는 한국 젊은이가 있다면 현지 한인회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다. 이력서 등의 관련 서류를 이메일로 보내면 현지 채용 한국 업체와 접촉해 연결하는 식의 도움이다. 중동 지역 같은 경우 최근 한인회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각국 한인회 사이에 네트워크가 잘 구축되어 있다. 10·11·12대 카타르한인회장을 역임한 나 역시 이런 봉사활동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다. 중동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한국 청년들이 있다면 맨 주먹으로 일군 사업 성공 경험을 나누면서 힘을 보태고 싶다.

▲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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