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외개척기②] 김채수 회장 "차량정비로 보츠와나 시장 평정"
[나의 해외개척기②] 김채수 회장 "차량정비로 보츠와나 시장 평정"
  • 김채수 보츠와나한인회장
  • 승인 2015.09.03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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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 송전라인, 대우건설 철도교 수주 등 도와...안경 IT 등 진출 유망분야 많아
▲ 김채수 회장 부부

보츠와나라는 오카방고(Okavango)강과 칼라하리사막이 있는 나라다. 오카방고강은 세계에서 가장 큰 내륙 삼각주(delta)로 유명하다. 야생 동식물의 천국인 습지다. 그래서 100번째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칼라하리 사막은 세계에서 6번째로 큰 사막이다. 이웃 남아공, 나미비아 등에 걸쳐 있지만 대부분이 보츠와나에 속한다. 칼라하리사막은 부시맨으로 불리는 산(san)족의 고향이기도 하다.

나는 이 낯선 나라에서 30년 가까이 살고 있다. 나보다 먼저 이 땅을 밟은 한국인도 있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교민 중에서는 내가 가장 오래 살았다. 내가 보츠와나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87년이다. 당시 보츠와나에서는 (주)대우가 도로공사를 하고 있었다. 세로이에서 우라파까지 연장 215km에 이르는 도로였다. 그 공사 현장의 자동차· 중장비 정비 기술자 중 한 명으로 파견된 것이다.

보츠와나는 인구로만 따지면 200만명 안팎으로 작은 나라다. 그런데 국토 면적은 한국의 6배에 달한다. 뜻밖의 사실은 국민 1인당 GDP가 1만5000달러 정도라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나라다. 구매력으로 비교하면 우리와 비슷할 만큼 생활수준이 높은 편이다.

그 부의 원천은 뭐니뭐니해도 다이아몬드다. 다이아몬드 세계 최대의 생산국이 보츠와나다. 칼라하리사막의 북동부가 주산지다. 보통 1년에 3천만 캐럿 이상의 다이아몬드를 생산한다. 4대 이언 카마 대통령이 집권한 2008년 이래 일종의 다이아몬드산업의 자국화를 추진했다. 그 결과 지금은 생산, 가공, 수출을 독자적으로 할 수 있게 됨으로서 획기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대통령제인 보츠와나는 196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아프리카에서는 드물게 평화적 정권교체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 덕분에 내전 등에 휘말리지 않고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돼 있다. 나는 군대 내무반 식으로 만든 공사 현장 숙소에 짐을 풀고 보츠와나에서 타국살이를 시작했다. 날씨는 여름에는 좀 덥지만 겨울에는 비교적 따뜻해 일상생활에 별다른 불편이 없었다. 내 전공은 자동차 정비기술이다. 내게 평생 직업이 된 이 기술을 익힌 것은 10대 중반 때부터였으므로 비교적 빨랐다.

나는 전남 곡성군 고달면에서 태어났다. 호적에는 1961년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한 해 전인 1960년, 쥐띠생이다. 고향 마을은 곡성읍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십리(4Km)쯤 떨어진 곳이다. 섬진강을 끼고 있는 우리 마을은 강변 치고는 꽤 넓은 모래사장으로 유명했다. 담배 농사를 지어 그 모래밭에서 말렸던 기억이 난다. 물살이 센 곳이었지만 은어 등 민물고기를 잡고, 참게 등을 잡아 팔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와 정비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내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큰 부를 일군 아버지는 고향에서도 꽤 큰 부자였다. 그런 아버지가 병환으로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하면서 병원비로 재산을 대부분 날린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끝내 세상을 등지셨다. 아버지는 공부를 곧잘 했던 나를 끝까지 가르치라고 어머니에게 유언했다는데 집안 형편은 그럴 수 없을 만큼 이미 기울어 있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 아이큐 테스트 결과 교내에서 선두 다툼을 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방황을 시작했다. 심지어 시험 답안지를 누가 빨리 제출하나 친구들과 내기를 할 정도로 학업에 흥미를 잃었다. 그 때문에 “누구보다 공부를 잘할 놈이 도무지 노력은 안한다”는 이유로 선생님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다.

중학교도 중간에 포기할 뻔 했는데 그래도 중학교 졸업장은 받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간곡한 말씀에 마치기는 했다. 하지만 마치자 마자 무작정 상경을 했다. 당시 내 또래에서 흔한 풍경이었다. 서울로 떠날 때 나는 일종의 ‘독립선언문’을 글로 써서 어머니한테 드렸다. 어머니는 말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바지, 속옷, 양말 등을 두 개씩 새로 사줘 짐 보따리에 넣어주셨다. 그리고 지금도 한 가지 당부를 하셨다. “너는 성격이 급하니 돈을 쫒아가지 말고 따라오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사주팔자에 철 같은 것을 만져야 성공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머니의 두 가지 말씀은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서울 생활 초반에는 서울 봉천동 판자촌에 사는 형님 집에서 더부살이로 지냈다. 나는 집에서 9남매 중 5번째였다. 그래서 나이 차이가 많아 아버지처럼 여기는 형님이 계셨다. 처음에는 출판사에 취직해 영업을 했다. 도무지 성미에 맞지 않고 장래성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당부 말씀대로 철 만지는 일을 궁리하다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내가 처음 ‘시다(견습생의 일본식 표현)’로 들어간 자동차정비소는 서울 영등포에 있었다. 말이 공장이지 조그만 가게 수준이었다.

정비소 시설은 열악했다. 정비소 하나에 사장이 서너명씩 됐다. 가게 한 켠에서는 워터 펌프, 그 옆에서는 부속품 재생을 하는 식이었는데 사장이 다 달랐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 말고 처음에 월급은 없었다. 잠은 다락방에서 잤다. 그 다락방도 낮에는 배터리 등을 수리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던 곳이었다.

당시 자동차 정비 기술자들은 6.25 때 이북에서 넘어온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억척스러운 면이 있었고 우리에게도 엄격한 생활을 강요했다.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몽키 스패너 등 연장으로 두들겨 패기 일쑤였다. 지금도 그때 맞은 상처가 남아 있다.

나는 상대적으로 한 가게에서 진득하게 일했다. 다른 종업원들은 월급을 좀 더 준다고 하면 수시로 옮겨가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사장님들로부터 짧은 기간에 신임도 얻었다. 사장님들이 장부정리까지 나에게 맡겼다. 다른 종업원들은 일이 끝나면 피곤해 눕기 바빴지만 나는 장부정리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게 나중에 내 회사를 경영하는데 도움이 됐다.

정비소에서 일한 지 1년쯤 지나자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월급 전액을 적금에 들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젊었을 적에 나는 룸살롱과 같은 술집에 가서 내 돈으로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이 군대 가기 전에 800만원쯤 됐다.

다른 기술을 배우기 위해 몇 번 가게를 옮겼다. 중장비 정비 기술도 배웠다. 자동차를 만지면서 전기 관련 기술도 함께 익혔다. 나는 무릇 정비사라면 차량의 앞 범퍼에서 뒷 범퍼까지, 유리에서 페인트까지 다 알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된 정비사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1980년대 초 신체검사에서 군입대 면제 판정을 받았다. ‘학력미달’이란 이유였다. 그런데 나는 자동차 정비기술을 내세워 군대에 가겠다고 우겼다. 판정관은 ‘별 놈 다보겠다“는 눈치였다. 기술자로서 자원해서 현역으로 입대하겠으니,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해서 판정을 번복해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나는 수송 특기자로 분류돼 만 34개월을 복무했다.

특기병으로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홍천에 가서 운전 교육을 다시 받았다. 원주에 있는 00사단 종합수송부 정비대가 나의 최종 배치지였다. 내 정비 기술은 군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단 내에 차라는 차는 모두 내 손을 거쳐 정비를 했다. 뒤돌아 보면 군대 생활은 내 인생에 많은 득이 됐다. 각종 군용 차량을 대상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을 3년 동안 쌓은 것이다.

나는 제대 후에 곧 바로 카 센터를 차릴 계획이었다. 군대 가기 전의 적금은 순전히 그 목적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수술이 급했다. 피부암이 악화돼 안구까지 침범, 실명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그 수술만 하면 오래 살 것이라는 의사 말대로 어머니의 수술에 쓰고 나니 수중에 돈이 없었다. 외국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당시는 해외에 파견 근로자로 나가는 일도 꽤 까다로웠다. 국가기술자격증 소지 여부와 상관없이 별도로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사전에 실시하는 적격자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신체검사를 거쳐 기업의 추천을 받아야 해외에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실력이 괜찮았던지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시험을 본 지 1주일 만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주) 대우의 보츠와나 도로공사 현장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당시 파견 근무는 기본적으로 1년을 근무하고, 필요하면 1년씩 연장하는 식이었다. (주) 대우 소속으로 2년 근무를 마친 뒤 일단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어머니께 아버지 병원비 대느라 팔았던 논, 밭 일부를 사서 되돌려 드렸다. 하지만 빚을 진 형제가 있어 그것을 갚아주고 나니 또 빈털터리가 되었다. 다시 해외로 나가 돈을 벌어야 했다.

다른 나라로 갈 수도 있었지만 2년 살아본 보츠와나가 내겐 익숙했다. 마침 보츠와나에서는 (주)대우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 중 세명이 로바찌에서 1988년말경 정비공장 세워 자립했을 즈음이었다. 로바찌는 수도 가보로네에서 60Km쯤 지방도시다. 마침 그들이 정비공장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했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현지에 가서 보니 정비공장은 이미 깨져 있었다. 두 달여 만에 동업 관계에 파탄이 난 것이었다. 타국 땅에서 한국인끼리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게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이다. 나는 공장에 남은 한 사람과 동업 형태로 힘을 합쳐 재건해 보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심란하던 차에 귀국해 한국에서 결혼을 했다. 아프리카 뿐 아니라 외국에서 사업을 하려다 보면 가족 특히 부부가 함께 하는 것이 성공률을 높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그래서 아프리카 선교사를 후원하는 사람의 중매를 통해 서둘러 결혼하고는 다시 보츠와나로 건너갔다.

로바찌에서 잠시 살아본 아내는 모든 것이 불편하고 힘들다며 자기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런 아내를 설득하려면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정비기술만큼은 자신 있었던 나는 고민 끝에 독립을 결심했다. 주변에서는 독립을 권유하는 얘기들이 많아 용기를 얻었다.

1991년 수도 가보로네에서 킴스오토라는 간판을 내걸고 마침내 독자적인 정비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초기에는 많이 힘들었다.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온갖 일을 다할 수 밖에 없었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정비 일만 할 때는 언어가 별반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현지 종업원들과 일할 때도 간단한 말 몇 마디면 큰 불편이 없었다.

막상 사업을 벌여놓고 보니 언어가 큰 문제였다. 관공서를 상대해야 할 일도 많았다. 하지만 내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읽고 쓰는 것은 물론, 기초도 부족했다. 보츠와나는 공용어가 영어다. 그리고 전체 국민의 80% 가량 차지하는 츠와나족의 고유 언어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뭐든 해보려는 젊은이가 있다면 영어는 필수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영어로 정비공장 광고지 하나를 만드는 데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주)대우에서 과장을 했던 사람이 영어로 문안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A4 용지 한 장 크기로 광고 전단지를 만들어 차 있는 집을 찾아다니며 직접 돌렸다. 흑인도 아닌 외국의 동양인이 광고 전단을 돌리자 현지인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주)대우 공사 현장에서 정비를 맡았다는 경력이 작용했던 듯 손님들이 하나, 둘씩 가게로 찾아왔다. (주)대우가 건설한 도로는 지금도 보츠와나에서는 가장 좋은 도로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점차 손님들이 늘어나면서 혼자 일을 하다 현지인 종업원도 두게 됐다. 많을 때는 그런 종업원이 180명까지 있었다. 현지에서는 2000년까지는 가장 규모가 큰 정비공장이었다. 당연히 손님도 가장 많았다. 현지인들은 실력이 모자라 정비공장을 거의 안했다. 다만 토착 백인 몇몇 사람이 정비공장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다른 한국인이 운영하는 정비공장이 가보로네에 1개, 수도권에 2군데가 더 있었다. 그러나 우리 업체와는 경쟁 상대가 안됐다. 손님들이 어느 때부터 내게 차체의 판금, 도색도 같이 해보라고 권유를 했다. 사고로 망가진 차체를 원형처럼 수리하려면 그것도 필요한 영역이었다. 관련 공장을 견학한 뒤 판금, 도색까지 영업 분야에 추가하기로 하고 공장을 증축했다. 공장을 넓힐 때 돈이 좀 부족해 일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이 때도 현지에 정착한 한국인의 도움을 받았다. 현금 거래를 많이 하는 (주)대우에서는 보증을 해줬다. 1년 동안 이자만 내는 거치식이었다. 1년 후부터 원금 일부와 이자를 매달 갚아 나갔다.

공장 증축 후에는 수동적인 영업 방식을 바꿨다. 그 전까지는 손님들이 공장으로 끌고 들어오는 차량만 취급했었다. 능동적인 고객 유치를 위해서는 레커차가 필요했다. 레커차는 당시 민간 정비공장 어디에도 없었다. 내 손으로 직접 다른 차를 개조해 레커차를 만들었다.

레커차가 생기고 난 뒤 손님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사고가 나면 나는 현장에 달려가서 경찰들의 사고 수습을 도왔다. 그리고 경찰의 조사가 끝나면 레커차로 차고차량을 공장으로 끌고 오는 식이었다. 가보로네 시내와 주변에서 일어난 사고 차량의 90% 이상을 우리 정비공장에서 수리해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했다.
당시 보츠와나 정비공장의 이익률은 수리비의 40% 안팎이었다. 우리 돈으로 한 달 매출 3억원에 순이익만 1억원을 벌었다. 환율도 좋은 때였다. 그런 호시절이 3년쯤 이어졌다. 우리 공장이 잘 나가자 주변의 백인, 인도인 정비업체들도 차츰 레커차를 도입했다.

나는 또 다른 마케팅 수단을 도입했다. 고장 난 차량을 수리하는 동안 다른 차를 임시로 대여해주는 방법이었다. 나는 사고 차량 일부를 사들여 수리한 후 킴스오토라는 로고를 새겨서 대여용으로 활용했다. 3년쯤 지나니 다른 경쟁 업체도 이를 따라 했다.

이때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채용한 아이디어가 캐시 백 전략이다. 한국의 신용카드 회사들이 많이 쓰는 캐시 백 영업과 똑같은 개념이다. 손님한테 이익금의 일부를 돌려주는 것이다. 보험회사가 지급하는 인건비의 10%를 차량 소유주에게 되돌려주는 방식이었다. 보험회사에 손해를 끼치지 않으니 굳이 시비를 걸지 않았다. 우리 정비공장에 차량 수리를 맡기는 현지인들이 다시 급증했다.

나는 수도권 밖으로 진출하는 전략도 썼다. 이를 위해 프랜차이즈 형태로 마할라페, 팔라페, 프란시스타운, 세레비피퀘 등지에 분공장을 신설했다. 분공장 책임자는 대부분 한국인들이었다. 아프리카로 건너온 한국인들에게 공장을 하나씩 차려주는 방식이었다. 솔직히 아프리카에서는 한국인을 종업원으로 고용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한다. 고용해서 득될 게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한국인들의 자립을 도와주려는 생각도 담아서 분공장을 차렸다. TV 드라마 ‘상도(商道)’에서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은 “장사꾼은 돈을 남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남긴다”고 말했다. 그 대사가 무척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아프리카 교민 사회에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다른 업체 종업원들이 사장에게 불만 터트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비난을 해도 “가는 길이 다르다”며 귀담아 듣지 않았다. 처음에는 분공장도 전부 킴스오토라는 간판을 달았다. 그러나 나중에 세금 문제 등이 발생할 수 있어 간판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런 프랜차이즈 전략은 성공적으로 보였으나, 후회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흔히 하는 말로 내 맘 같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우선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 처남조차도 두 번이나 정비공장을 프랜차이즈 형태로 차려줬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망했다’고 할 만큼 큰 피해를 봤다. 일이 잘못되니까 다들 내게 손가락질하고, 비난했다.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나는 2009년경 공장 경영에서 손을 뗐다. 프란시스타운 공장은 한국인에게, 마할라페 공장은 흑인 친구에게 넘겨줬다. 세레비피퀘 공장과 그 전에 사둔 땅을 팔아 남은 빚을 정리했다. 부품 값 등 결제를 미처 못한 돈이 꽤 많았다.

요즘은 정비사업 일선에서 손을 떼고 보츠와나를 비롯한 아프리카에 한국을 알리고, 한국 기업의 진출을 돕는 컨설팅을 하고 있다. 보츠와나 한인회장을 네 번째로 다시 맡은 것도 그 일환이다. 현재 교민수가 130여명인 한인회는 1991년도에 만들어졌다. 그 때 나도 창립에 앞장섰다. 한인회는 한때 갈등이 있어 유명무실해지기도 했지만 2000년도에 나는 교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재건을 했다. 2004년부터 2년 임기로 두 번을 하고, 2011~2012년에 이어 2015~2016년 임기를 또 하고 있다.

이번에 한인회장을 맡으면서 나는 이전과는 다른 운영을 제안했다. 보통 한인회라면 단결과 화목을 맨 앞에 내세운다. 그보다는 우리 교민이 보츠와나에서 생활할 때 권리를 보장받고,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민간 외교 차원의 노력에 우선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교민 자녀들이 모국을 알고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모국의 발전상도 직접 보고, 모국애도 키우는 모국 방문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다행인 것은 보츠와나 교민들은 다른 아프리카 교민들에 비해 먹고 살 만해 이런 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한인회 간부들이 솔선수범을 하고 있어 이 또한 좋은 결실을 맺을 것으로 본다.

내가 이언 카마 보츠와나 현 대통령과 ‘의형제’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간 사실이다. 참으로 우연한 계기였다. 전에 보츠와나에서 가난한 노인, 장애인들을 위해 몇 번 집을 지어준 적이 있다. 2000년대 중반 움막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한 노인의 집을 지어 준공식을 하는 날 지금의 대통령이 열쇠를 전달하기 위해 직접 현장에 참석했다. 당시는 부통령 신분이었다.

그날 이언 카마 부통령이 현장에서 연설을 하면서 자신이 받은 감동을 피력했다. 그 말 끝에 “앞으로는 카마와 형제라고 하면 보츠와나 어디서나 사람들이 너를 인정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 때부터 나는 보츠와나에서 특히 정부 인사들 사이에 대통령과 의형제로 통한다.

이언 카마 부통령은 2088년 제 4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언 카마는 현직 대통령이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보츠와나 독립영웅으로 국부처럼 추앙받는 세레츠 카마 대통령이어서 그 권위는 대단하다. 요즘 나는 보츠와나 정부를 상대로 일을 할 때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보츠와나 역시 장차관을 만나기란 참으로 어렵다. 사전에 약속을 잡으려 하면 거의 불가하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장차관 등 고위 관료를 꼭 만날 필요가 있을 때 가끔 나만이 쓸 수 있는 비장의 방법을 쓰기도 한다. 장차관 등이 면담 약속을 잡아주지 않으면 새벽같이 사무실 도착애 그 앞에서 무작정 기다린다. 면담을 못하면 대통령한테 바로 가겠다고 떼를 쓰다시피 하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 허락해 주는 식이다.

그런 기회를 활용해 보츠와나에 한국과 한국 기업을 알리고 있다. 나아가 보츠와나 정부 사업에 한국 기업을 소개하고,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프리젠테이션 일정을 잡는데 발로 뛰어 돕고 있다. 내가 이런 일을 하면서 양국간 경제협력이 그 이전보다 매우 활발해졌다고 감히 자부한다.

보츠와나는 대부분의 산업을 남아공 백인 정부에 의존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예를 들면 들면 전력의 경우 보츠와나는 남아공에서 송전받다가 지금은 에너지 자립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중국이 600만 메가와트 짜리 발전소를 완공했는데 현재 제대로 가동이 되지 않아 정부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래서 보츠와나 정부는 300메가와트짜리 발전소를 새로 건설하려 추진 중이다. 새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에 한전 등 우리 기업이 참여하면 좋을 것같다.

나는 2014년 한전 송전 라인 컨설팅 사업, 대우건설의 철도 다리공사 수주 등을 옆에서 도왔다. 한국 기업이 보츠와나 면허시험장을 건설을 수주했는데 소개한 지 10년 만의 성과였다. 보츠와나 전자정부 시스템 구축, 인공위성 사업도 현재 추진 중이다. 한국 사람으로서, 또 보츠와나 시민으로서 한 사람의 희생과 노력으로 두 나라 관계가 얼마나 돈독해질 수 있는 지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이 지금 나의 욕심이라면 욕심이다.

보츠와나에서 지금 수요가 있는 사업 영역으로는 의료 계통이 꼽힌다. 예를 들면 안경사, 안경 검안사도 성공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 비해 아프리카는 안경 가격이 무척 비싼 편이다. IT 분야도 진출이 유망한 분야다. 아프리카는 아직 시작 단계다. 컴퓨터는 보급된 지 오래 됐지만 시스템이 미흡하다. 한국 기업이 데이터 센터를 지었다, 실력만 있다면 성공 가능성이 충분하다. 보츠와나 뿐만 아니고 다른 아프리카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기회와 비전이 있는 땅이 아프리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젊은층 취업이 문제가 된다면 아프리카에서 필요한 기술이 뭔지 파악해 정부 차원에서 교육을 시켜 내보낼 수도 있다. 정부 지원금을 잘 활용해 아프리카 각국 한인회와 연결시켜 그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돕도록 노력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런 자금으로 젊은이들이 가서 현장을 보고 가능성을 타진하는 방안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보츠와나를 비롯한 아프리카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추진할 생각도 있다.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우리 국민들은 가난, 병마, 내전, 가뭄등의 부정적인 단어 정도만 떠올린다. 하지만 내가 살아본 아프리카는 나라들마다 최고 국가로 만들려고 구상하고 추진 중인 곳이다. 미국에 사는 조카도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한 내 설명을 듣고 보츠와나로 건너 왔다. 한국의 젊은이들도 이를 기회로 잘 활용했으면 좋겠다.

 
 
 
▲ 김채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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