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외개척기③] 김점배 회장 "소말리아 해역서 총들고 조업해"
[나의 해외개척기③] 김점배 회장 "소말리아 해역서 총들고 조업해"
  • 김점배 오만한인회장
  • 승인 2015.09.0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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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떠나고 없는 곳이 '기회의 바다'...통조림 공장도 세울 예정
▲ 김점배 오만한인회장

세상사 모든 일이 내가 생각하고 세운 계획대로 척척 풀리는 삶이라면 부러울 게 뭐가 있고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런 인생이라면 아마도 세상에서 최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지금의 아프리카나 여타 우리가 생각하는 저개발 국가들이 하루 삼시세끼를 걱정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 대한민국도 불과 40~50년 전에 똑 같은 걱정을 하며 살아가던 나라였다. 나 또한 가난한 나라에서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당시에는 어찌됐든 발등에 떨어진 불, 즉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눈앞에 닥친 최대 선결 과제였다.

때문에 나는 여수수산산업전문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군대 복무를 대체하는 병역특례업체에 들어가 경력도 쌓고 돈도 벌 수 있는 길을 선택해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당시 원양업체도 외화획득 차원에서 5년간 근무를 하면 군대를 필하는 것으로 인정해주는 병역특례제도가 있었다. 그곳에서 5년간 근무를 마치고 나면 방위병들이 받던 4주 군사교육을 거친 후 곧바로 보충역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내 생애 첫 일터는 북태평양 캄차카 반도에서 조업을 하고 있던 동원산업이었다. 하루하루가 바다의 거친 파도와 싸우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이후 인도양에서 참치잡이를 하고 있던 천양수산이라는 회사로 옮겨 배를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만한 첫 번째 사건이 터진다. 이 일은 나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세상이 벌여놓은 일 속에 내가 휘말려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1978년 12월의 오일쇼크 

세계경제는 휘청거렸다. 이란의 유전 노동자들이 팔레비 국왕에 대항해 벌인 파업으로 하루 500만 배럴씩 나오던 원유가 200만 배럴로 감소하고, 이 때문에 1980년 초반에 유가가 배럴당 30달러로 폭등하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기름값이 오르기 시작하니, 신이 아닌 이상 원양업계도 피해갈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산하는 업체가 속출하기 시작했고, 내가 다니던 회사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오일쇼크는 아무런 죄 없는 나를 하루아침에 거리의 실직자로 내몰았다.

마음 속이 바짝 타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당시 기억으로 병역특례자들은 육상에서 두 달 이상 머물 수 없었다. 육상에 머무는 기간이 두 달 이상이 되면 병역특례와 관련한 혜택이 모두 무효처리되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회사는 도산하고 거리에 내몰린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오일쇼크는 나라 경제를 엄청난 혼돈 속에 빠뜨렸고, 경제 주체라면 누구든 가릴 것 없이 힘든 시기였다. 때문에 새로운 직장을 찾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더욱 다부지게 마음의 결기를 세웠다. 때마침 오만 트롤선에 일자리가 있다는 연락이 왔고, 찬 밥 더운 밥 가릴 상황이 아닌 나는 앞뒤 재지 않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동안 병역을 필하기 위해 공들인 시간들을 허사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1981년 한국에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오고 있을 때, 나는 오만 무스카트에 기지를 둔 한국해외수산의 배에 몸을 실었다. 좋은 일 궂은 일 가릴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했던 오만행의 결정은 이후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의 결정은 내 평생의 바탕이 되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내 나이 24살이었다. 세상에 대한 일천한 경험에 밖에 없던 풋내기 청년은 그렇게 인생을 맞서 나갔다.

어찌 보면 먹고살기 위해 원양어선을 탔지만 그 안에서 나는 인생에 대한 순리를 찾을 수 있었다. 모두가 저마다의 꿈을 꾸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니 꿈을 이룬다는 것이 그렇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는 것도 배우게 됐다. 시간과 경험이 가르쳐 줬다. 물론 가장 중요한 교훈도 알려주었다. 때로는 계획과는 정반대로 가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상황이 발생하는 그 흐름에 대해 올라타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의 계획과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그 상황 속에서도 일정한 순리라는 것이 있다. 냉철하게 대응하면서 그 흐름을 올라타고 나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그 흐름을 이용할 줄 아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지혜라고 나는 확신한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온다

내가 처음 오만 무스카트에 갔을 때 그곳은 일국의 수도라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었다. 비포장 된 길거리에는 먼지바람이 일고 있었다. 당시 배에 오르는 기간은 한 번에 30개월로 정해져 있었는데,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서 장기간 생활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굉장히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1회 계약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나는 연이어 60개월을 타겠다고 계약서에 서명해버렸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현지 사람들의 눈빛은‘이 사람 제정신이야’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는 듯했다. 그러나 악바리 근성으로 60개월을 채우고 나자 나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1986년 선장으로 진급하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짜릿한 행복감을 느꼈던 시절이었다.

금봉 202호의 선장을 거쳐 금봉 801호의 선장으로 다시 2년 동안 바다에 나가 일하던 시절은 나에게 꽤 안락한 시간이었다. 선장으로 배를 지휘하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든든한 아내와 자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봉호에서의 행복한 시간이 끝날 무렵 현지 기지국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배를 타는 것에 비해 월급은 적었지만 바다 위에 떠 있는 생활보다는 훨씬 안정적일 것 같다는 생각에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1991년 후반부터 무스카트 기지에서 일하면서 다음 해인 1992년에는 가족들을 모두 오만 무스카트로 불러 모았다.

배를 타다보니 가족들과 너무 오래 떨어져 있는 것이 싫었고,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이 컸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바람과 달리 가족들과 함께 안정감을 느끼며 지내던 행복한 시간도 잠깐이었다. 지상 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경영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이었다. 1993년부터는 조업을 중단하고 회사가 매각되는 상황까지 가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기지장이 회사 매각문제를 처리해야 한다면서 한국으로 돌아가자 현장에 남아있던 나에게 모든 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원성 섞인 비난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졸지에 실업자가 돼버린 선원들은 돌아갈 차비는 물론이고 현지에서 하루 연명할 식대비조차도 끊기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유류회사와 선식 납품 업체를 비롯한 거래 업체들로부터 “빨리 빚을 갚으라”는 채무 독촉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두 손 놓고 상황에 떠밀려 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당장 선원들의 먹는 문제 해결이 시급했다. 급한 마음에 한국에 계신 형님에게 현지 사정을 설명하고 3천만 원을 빌렸다. 그 돈으로 선원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고, 그들이 고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경비를 충당하는 데 보태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런 방식으로 회사가 떠안은 부채를 처리하는데 동분서주한지 6개월 정도가 지날 무렵이었다. 항구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한국해외수산의 배를 구매하겠다는 회사들이 여기저기서 연락을 해왔다. 그래서 4개 회사에 1~2척씩 배를 팔아 넘겼다. 그런데 배를 구매한 회사들이 인도양 해역에서 조업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 오면서 나에게 기지장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내가 선장 생활을 오래했고, 육상의 경험도 있으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처신하려 했던 점에 대해 신뢰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렇다면 한 번 해보겠다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어차피 내 입장에서도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고, 이억 만리 타국으로 나만 보고 따라온 아내와 자식들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여러 선주들이 비용을 공동 부담해 기지국 운영에 필요한 사무실 운영비를 비롯해 나의 급여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기지국 살림이 꾸려지기 시작했다. 생동감을 잃어버린 항구에는 활기가 띠고, 무표정이던 선원들의 얼굴에 실실거리는 웃음기가 보였다. 떠났던 선원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고, 그들의 말투 하나하나에 힘이 살아 있음이 느껴졌다.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한 세상은 왠지 더 밝게 보였다. 모두가 열심히 움직였고, 나도 신명난 일꾼처럼 바삐 돌아다녔다. 그사이 납품업체들에 졌던 빚이 하나 둘씩 정리되고 있었고, 배를 인수한 새로운 선주들은 인도양 해역에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어로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라는 말은 아마도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3년 동안 인도양에서는 풍어의 시기였다. 모든 배들이 바다에 나갔다 하면 만선이 되어 돌아왔다. 참돔과 갑오징어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선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포클랜드 어장의 배들까지 오만으로 들어왔고, 덕분에 나는 그 배들까지도 관리하게 됐다. 1척 2척 하던 것이 어느 순간 10척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풍어가 한창이던 와중에 당사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에게는 행운이 돼버린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나에게 배 2척을 맡겼던 회사 한 곳이 부도를 맞은 것이다. 나는 순간 직관적으로 판단했다.아!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준 기회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앞뒤 재지 않고 배에 몸을 실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직관적 판단에 의지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나의 전 재산을 동원해 부채까지 떠안는 조건으로 배를 인수했다.

나는 즉시 인수한 배로 라사교역이라는 회사를 세워 사업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사업! 내가 사업이라니. 꿈만 같았다. 사업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이 잘 풀릴 것만 같다는 생각과 자신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부푼 꿈, 행복하게 살아갈 내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상상, 이런 기분 좋은 상상에 가슴이 부풀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철하게 마주해야 했다. 기쁨을 뒤로하고 나는 곧바로 상황 분석에 들어갔다.
“왜 회사가 부도를 맞을 수밖에 없었을까? 회사 자체 경영상의 문제인가? 아니면 수산사업의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 것인가?”등등의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한국해외수산이 구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배를 운항하는데 있어 돈과 시간이 효율적으로 관리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당시 한국해외수산의 배들은 소말리아 해역에서 어로 활동을 하고 획득한 어획물을 아랍에미리트연합 아즈만 항에서 하역하는 것이 당연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소말리아 해역에서 아즈만 항구까지 가는 거리가 보통 편도로 일주일이 걸리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릴 뿐만 아니라 시일이 길어지는 만큼 유류 소비량 또한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적자가 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지금의 구조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나 또한 똑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내가 쌓아온 지난날 모든 것들을 허사로 만들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나의 머리 속을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운송 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는 묘수를 찾아야만 했다.

“거리를 단축해야 해. 이것만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때 내 머리 속에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이 오만 남부의 살랄라 항과 유럽 시장을 연계시킨다는 구상이었다. 모항을 살랄라에 두면 여러 문제를 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배들이 활동하는 소말리아 해역에서 아즈만항구까지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소비되지만 살랄라까지는 이틀이면 충분했다. 왕복 10일 정도의 운송시간이 단축되는 효과가 있었다. 또 아즈만항 대신에 살랄라항을 이용하면 한 번 출어 할 때마다 10만 달러 정도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런 명확한 결론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주저할 것이 없었다. 즉시 라사교역의 모항을 살랄라로 옮겼다.

그 다음이 “잡은 물고기들을 어떻게 팔 것이냐”하는 문제였다.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그리스 원양어선 업체인 탈라스가 불현듯 떠올랐다. 탈라스도 오만에서 조업활동을 하던 원양업체였다. 당장 탈라스의 만달리우스 사장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취해 내가 구상한 소말리라 어장과 살랄라항을 연계한 어업전략을 그에게 털어놨다.

만달리우스 사장에게 유럽판로를 뚫을 줄 것을 제안하고, 나는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시장을 뚫겠다는 생각을 전했던 것이다. 생각보다 쉽게 만달리우스 사장이 흔쾌하게 내 의견에 동의해 줬고, 배 1척을 소말리아 어장으로 보냈다. 나도 소말리아 어장으로 우리 배 1척을 보냈다. 두 업체가 연계한 조업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오만은 이미 검증된 어장이었고, 소말리아 어장은 아직 미지의 바다였으며, 모험을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소말리아 어장이 오히려 조업이 잘 되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나와 협력하던 만달리우스 사장이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시장의 활로를 잘 뚫어 주는 덕에 물고기를 잡는 족족 모든 어획물들이 팔려나갔다. 모든 일들이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것처럼 척척 돌아갔다.

우리회사는 현재 소말리아 해역을 중심으로 어로 활동을 하고 있다. 모두가 잘 알고 있겠지만 소말리아가 어떤 지역인가? 해적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지역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소말리아 해역에서 활동하던 배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5년 전부터는 우리회사의 배들만 이곳에서 어로 활동을 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 배에는 AK-47소총으로 무장한 채 보초를 서고 있는 흑인들이 항상 승선해 있다.

모두가 떠나고 없는 이곳이 나는 기회의 바다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말리아 해역에서 나의 바다 인생을 쏟아 왔고, 앞으로도 내가 바다와 함께 하는 한 소말리아 해역에서 그 끝을 맺을 결심이다. 또 소말리아가 정치, 사회적으로 안정되면 그곳에 통조림 공장을 세울 계획도 구상하고 있다. 소말리아 사람들에게 연안어업 기술을 가르치고, 그들이 잡은 물고기로 통조림을 만들 생각이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들에게도 일자리 창출과 소득증대의 효과를 이끌어내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긴 3333킬로미터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는 해양 국가인데도 참치 통조림을 수입하고 있다. 소말리아 어민들이 잡을 물고기로 통조림을 만들어서 판매하면 그들에게도 값싼 통조림을 맛 볼 수 있는 시장이 만들어 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내륙에는 5억 명의 소비자가 형성돼 있다. 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통조림 사업을 한다고 상상해 봐라.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차다.

오만에 대한 단상

내가 오만 생활을 한 지가 벌써 30년이 넘어서고 있다. 횟수로 34~35년이 된다. 한 세대 이상의 세월을 오만에서 보냈고, 내가 살아온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이곳에서 살아오고 있다. 현재 오만 한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처음 오만에 왔을 때 오만 내에는 한국인들의 수가 대사관 직원들까지 포함해서 15명 정도가 전부였다. 상상이 되는가 전 세계에 나가 있는 한인사회 중에 그 구성원이 대사관까지 포함해서 15명 정도라는 것이.

그런데 지금은 150여명 정도로 다른 나라에 있는 한인들의 숫자에 비하면 작지만 각자가 한국인으로서 자신들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특히 오만 같은 경우는 큰 건설업체 직원들이 파견 근무를 나와 일정한 기간을 채우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고, 현장에 건설 관련한 일감을 찾아 단기간 근로하다가 가신 분들이 많아 터를 잡고 사시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교민활동이 크게 활성화 되어있지 않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민사회 내에 교류를 활성화 시키기 위해 모임을 더욱 다양화 시키려고 노력중이다. 일 년에 두 세 번 정도 친목 행사와 명절 이외에 송년모임 등을 통해서 서로 친목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아이들을 위해 한글학교를 지원하고 있고, 요즘에는 선교사들이 와 있어서 현지 사람들 중 십여명을 선발해 한국에 견학을 시키고 있다. 작년에 시작해서 올해 2회째 시작하고 있는데 학생들 위주로 한글 가르치면서 여름방학을 이용해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러다보니 현지 아이들 사이에서 한국에 대해 궁금해 하고 한국을 알고 싶어서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이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심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을 알린다는 차원에서 앞으로 꾸준히 추진해 나갈 생각이다.

중동 하면 치안이 불안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만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치안이 굉장히 좋은 편이다. 중동 지역이 치안 때문에 불안한 것을 사실이지만 오만은 아직까지 치안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들이 없다. 또 시골 같은 정서가 남아 있어서 사람들도 순한 편이다. 같은 아랍인들이라도 무슬림 국가지만 사람들이 선량한 편이고 국민성이 순하다. 그래서인지 정서적으로 우리와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또 오만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역사적으로도 다른 중동 국가들에 비해서 자기들은 뼈대가 있는 집안이라고 생각한다. 오만이 한 때는 아프리카 동부를 지배했던 나라고, 영국과 포루투갈에게 잠깐 당하고 살았지만 자기들은 식민지를 겪지 않았다며 스스로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내가 오만에서 30년 넘는 세월을 살면서 겪었던 것 중 인상적인 것은 오만 국민들이 아직까지 그들의 국왕에 대해 욕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장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정치인들에 대한 정서가 어떤지 내가 직접 언급해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더욱 잘 알 것이다. 하여튼 나는 그 나라 사람들이 왕이 잘하건 못하건 욕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찌보면 결론적으로 왕이 통치를 잘했다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국민들이 국가 지도자를 존경하고 아끼는 그들의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도 행복하겠지만, 존경할 만한 지도자를 만나는 국민들도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리고 중동 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사막, 찌는 듯한 더위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만의 기후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요즘은 어느 상점을 들어가던지 에어컨이 있다. 한 낮에는 더위 때문에 밖에 앉아서 이야기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상점이나 집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다. 그래서 어느 장소를 가던지 건물 안에 들어가면 에어컨이 돌아가야 한다. 또 큰 마트들이 곳곳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상점들도 한 낮에 문을 열고 일을 하는 추세로 가고 있다.

기존에는 1~4시까지 더위 때문에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 생활문화가 형성돼 있었는데 에어컨이 생활문화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측면이 있다. 사람들이 대낮에도 건물 안에서 활동을 하게 됐다는 것은 또 다른 변화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습도는 높지 않고 약간의 바람만 불어도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이 더위를 타는 여름 날씨 정도면 오만에서는 딱 좋은 날씨라고 봐도 될 것이다. 오만은 내가 살아본 경험으로 볼 때 한국처럼 치열하지 않아도 사람 살만한 곳이다.

한국의 청년들에게

사업차 일로, 고향에 계신 부모님, 보고픈 지인들 때문에 매년 한국에 4~5차례씩 들어온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야! 대한민국 남자들 정말 많이 약해진 것 같구나. 특히 청년들에게서는 그런 모습이 확연히 나타남을 강하게 느낀다.

공항에 드나들 때마다 한국 청년들 뒷모습을 보면 이건 뭐 완전히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다. 30여년전만 해도 한국 청년들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면 기세가 등등해 보였는데 요즘 청년들은 자유분방하게 자랐다면서도 그렇지가 못한 것 같다. 그게 뭘 말해 주고 있겠는가? 어떻게 생각해 보면 많이 배우고 창의력이 옛날보다 더 뛰어난 세대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온실 속에서 자랐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자립심이 부족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한 세대 전의 청년들은 더 못배우고, 못먹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자신들의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강한 뚝심으로 인생에 맞서 나가는 오기라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의 청년들에게는 그런 뚝심이 없어 보인다.

요즘 경기도 어렵고, 청년들 취업난에 허덕인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또 젊은 혈기로 가득한 나이에 왕성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고통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원망만 하면서 좌절감으로 하루하루를 그냥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이 글을 통해서 전해주고 싶다.

그리고 한국 청년들에게 한 가지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너무 자신의 스펙에 대해 과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의 스펙을 과신하다 보니 자신을 너무 높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주변의 조건을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 발견하게 됐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서당 개가 어느 날 갑자기 풍월을 읊을 수 있었겠는가? 모든 것이 다 짧지 않은 세월과 그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기울였던 노력들이 나온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 청년들 보면 피땀을 흘려 쏟아 부어야 할 과정들은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덩그러니 주어지는 것을 바라는 경향이 있다. 그 이면에 나 정도 스펙이면 이정도 조건은 돼야지 하는 오만한 생각들이 버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을 굳게 믿는 마음은 중요하지만, 자신을 교만에 빠뜨리는 믿음은 인생에 큰 독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한 순간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란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는 치열한 투쟁에서 쏟아지는 땀방울이 요구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세상에 공짜란 없고, 내가 바라는 현실은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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