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외개척기④] 임도재 회장 "아프리카서 플랜트 건설업 개척"
[나의 해외개척기④] 임도재 회장 "아프리카서 플랜트 건설업 개척"
  • 임도재 아프리카중동한인회총연합회장
  • 승인 2015.09.0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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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공장 발전소 부품공급..."성공은 도전자의 몫"
▲ 임도재 회장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내 자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도전해보라고 권하는 게 목적이다. 나는 젊었을 때 무지무지하게 고생했고 그 덕분에 지금은 비록 타국이지만 자리를 잡았다. 젊은이들이 이 글을 읽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갖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혹시 ‘가나’라는 나라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가나는 아프리카 서부 기니만(灣)에 면한 연안 국가이다. 해안지대가 황금해안(Gold Coast)으로 알려지면서 유럽 각국의 각축장이 됐고 1874년 영국의 식민지가 된 곳이다. 80여 년의 식민 지배를 끝내고 1957년 3월6일 독립하고 1960년 국민투표에 따라 공화국이 됐다. 정식 명칭은 가나공화국(Republic of Ghana)이다. 독립 이후 수차례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었고 2000년에 치러진 선거에서 1981년부터 쿠데타로 장기 집권한 제리 존 롤링스 정권이 패배하여 독립 이후 최초로 민선 정권으로의 교체가 이루어졌다. 영연방으로 아프리카통일기구(OAU)에 가입해 있다.

내가 가나에 처음 도착한 것은 1993년 3월20일이었다. 내 나이 41살 때였는데, 그때부터 20년 넘게 가나에서 살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식민 지배를 오래 겪어서 그런지 외국인에게 영주권을 잘 내주지 않는다. 외국인의 95%는 영주권이 없어 거주허가나 취업허가를 해마다 경신해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나는 가나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영주권 소지자다. 업무차 한국에 왔다가 가나에 도착하면 마치 집에 온 느낌이다. 가나 사람이 다 된 것 같다.

나는 198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해외근무를 시작했다. SK건설 전기협력업체 소장이었다. 공사장 전체에서 내가 거느린 한국인 기능공이 60~70명 됐다. 의무 계약기간 2년을 마치고 1984년 귀국했다. 그런데 영국인 공사감독관이 SK건설에 왜 나를 귀국시켰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내가 SK건설 직원으로 알았던 것이다.

SK에서 연락이 왔다.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SK건설 정식직원으로 가게 됐다. 외국인들은 그가 어디 소속이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당시 SK건설에는 전기 기술자가 3명 있었는데 내가 추가된 것이다.

이번에는 사우디 아브하주(州) 까미스뮤사이트 지역 병원 공사였다. 사우디 국립병원으로 SK건설로서는 첫 번째 해외 병원 공사였다. 시작부터 하자 보수까지 3년이 걸렸다. 그리고 1988년 12월말 귀국해서 SK 울산공장에서 2년을 근무했다. 그때 SK 최종현 회장이 내건 슬로건이 ‘원유에서 섬유까지’였다. 원유를 정제하면 나프타가 나오는데, 이 나프타를 정제하면 에틸렌, 프로필렌 등 기초 유분이 나오고 이를 다시 정제하면 플라스틱, 섬유, 의류, 세제, 화장품, 약품 등 수많은 화학제품의 원료가 나온다. SK그룹의 주력인 유공에서 원유를 정제하고 그 부산물로 섬유원료를 생산하는 수직계열화가 이뤄질 때였다.

1991년 초 SK건설의 두 번째 해외 프로젝트로, 이번에는 태국 국영 석유회사 건설사업이었다. 휴양지로 유명한 파타야 근처였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돼 약속된 기간 내에 잘 마무리됐다. 태국 사람들이 예정된 공기 안에 끝난 첫 번째 공사라는 말도 했다.

그런데 나는 이 공사를 끝까지 하지 못했다. 공사 도중인 1992년에 회사가 아프리카 가나의 저유소 공사를 수주했으니 그리로 가라는 것이었다. 가나 저유소 공사는 우리나라 수출입은행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으로 시행하는 공사였다. EDCF는 개발도상국의 교통, 통신, 전력 등 경제 인프라사업 및 환경, 교육, 보건 등 사회 인프라사업에 대한 지원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 및 복지증진과 더불어 우리나라와의 경제교류 확대에 기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위치에서 개발도상국의 ‘내일’을 지원하는 사업인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기업에게 아프리카는 불모지였다. 대우그룹과 동아건설이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시행하는 토목공사가 전부였다. 플랜트 공사로는 우리가 처음이었다. 회사에서는 “아프리카는 힘든 곳이니 경험 많은 네가 가라”였다. 나는 아프리카는 못 가겠다고 버텼다. 오랜 해외생활로 지쳐있을 때였다. 결국 회사와 타협해 8개월간 파견근무를 하기로 했다. 당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해외 나가본 사람이 또 나가던 때였다.

저유소 공사는 세 군데서 이뤄지고 있었다. 내가 맡은 두 번째 저유소 공사는 순조롭게 끝났다. 문제는 세 번째 저유소 공사가 지지부진했다. 진척이 안 되니까 그것도 내가 맡으라는 것이었다. 공사장은 수도 아크라에서 800km 떨어진 오지였다. 비포장도로여서 아크라에서 자동차로 가면 10시간 넘게 걸렸다. 자재 운송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마을 주민들이 협조를 잘 해줬다는 점이다. 아무 것도 없던 시골마을에 거대한 기름 탱크가 세워지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당시 저유소 공사는 에너지성이 발주한 것인데 에너지성 차관이 이 지역 출신이었다. 사이먼 아빈저 차관은 나중에 이 지역의 국회의원이 됐는데 그는 우리가 일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의 아프리카의 첫 번째 인맥이었다.

저유소 공사를 마치고 우리는 가나에서 하나뿐인 가나국영정유공장 증설공사를 추가로 맡게 됐다. 애초에는 8개월만 있기로 했는데, 이 공사로 14개월 동안 가나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공사는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되었다. 그때까지 가나의 큰 공사는 대개 영국업체가 도맡았었다. 아빈저 에너지성 차관은 내게 “한국업체가 영국업체 못지않다. 당신이 원하면 일감을 주겠다.”고 말했다.

SK는 철수를 결정한 때였다. 나도 귀국할 것인지 여기에 남을 지를 결정해야 했다. 승부심이 발동했다. 이 기회에 내가 직접 일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동안 눈여겨본 가나는 성장하는 시장이었다. 차량이 늘어나고 석유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게 보였다. 그때까지 가나의 한국인은 수산업이 대부분이었다. 가나가 참치잡이 원양어선의 전진기지여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가나 제2의 도시인 테마에 거주했다. 반면에 나는 오지에 근무해 한국인이라곤 한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 얼굴도 현지인처럼 새까맣게 변했고 생활도 그들처럼 살았다.

가나에 도착한 지 5년 만인 1998년 3월17일 내 회사를 설립했다. 글로텍건설이라 이름 지었다. 플랜트 건설업으로 시작해 지금은 토목, 도로공사, 주택개발까지 한다. 외국 업체가 현지 업체와 경쟁하는 것은 무리이므로 우리는 현지 업체가 못하는 공사만 입찰했다. 그 점은 우리가 유리했다. 우리는 장비가 모두 현지에 있으니 다른 외국업체보다 10% 정도는 싸게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SK건설이 가나에서 철수할 때 크레인, 굴착기, 포크리프트 등 기존 장비를 내가 모두 인수했기 때문이다. 그 외의 건설 기자재를 전부 수입했다. 한국산 중고 철판이 가격이나 품질에서 제일 알맞았다.

당시 이곳에는 목공은 있지만 용접, 배관, 전기공은 드물었다. 먼저 그들에게 기능훈련교육을 시켰다. 제일 필요한 용접공은 한국인 기능공의 70%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단순 기능공도 처음에는 태국인, 중국인, 필리핀인을 쓰다가 차츰 현지 인력으로 대체했다. 외국에서 현지인 아닌 외국인을 불러 쓰면 단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나는 현지인 채용으로 단가를 낮출 수 있었다. 또 현지인을 교육시켜 기능공을 양성한 것은 내가 그곳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데 중요한 포인트였다.

나는 가나에서 처음 5년간은 보통 새벽 2,3시까지 일했다. 잠은 하루 3,4시간밖에 못 잤다. 회사 안에 숙소를 마련하고 일하다가 졸리면 숙소에서 잠깐 자고 또 일하는 식이었다. 지금도 우리 회사는 토요일에 일한다.

한때 나는 참치잡이를 한 적도 있다. 배 한 척을 사서 참치를 잡아 가공공장에 넘겨주는 일이었다. 손해는 보지 않았으나 왠지 나와 맞지 않았다. 3년을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지금은 플랜트 건설업에 집중하고 있다. 정유공장이나 발전소 짓는데 들어가는 산업부품을 공급하는 일이다. 이후 플랜트 건설업계 1위, 석유 저장시설 유지보수 분야 90%를 차지하고 있다. 부품공급을 하려니 무역업과 운송장비 유통업을 같이 하고 있다. 연 매출액은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6천만 달러 수준이다. 아프리카 한인 건설업체 중에서는 우리 회사가 제일 크다.

가나는 1957년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사회주의 국가로 출발했다. 초대 대통령 엔크루마는 이집트의 나세르,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와 함께 제3세계 반미(反美)세력의 기수였다. 그러다가 2000년에 치러진 선거에서 민선 정권으로의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시장경제가 도입돼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도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 등 사하라사막 이북은 회교 국가들이다. 이디오피아, 소말리아 등 동부국가들은 농업 빈민국이다. 반면에 남부와 서부지역은 자원이 많고, 2차대전 후 식민지에서 독립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이지리아, 적도기니, 앙골라 등 서부 연안에서 남부지역 국가들은 모두 산유국이다.
석유든 다이아몬드든 자원이 많으면 이권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내전으로 이어진다.

다행히 가나는 민선정권이 들어선 후 급속히 정치적 안정을 찾았고, 나라가 안정되니까 외국자본이 들어왔다. 경제성장률이 9% 이상으로 산유국이 된 지 4,5년밖에 안 됐는데, 해마다 놀랄 만큼 발전하고 있다. 도로, 항만 등 인프라 건설에 열심인 서부 아프리카의 모범국가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전임자인 코피 아난 전 유엔사무총장이 이 나라 사람이다. 기후는 건기와 우기 둘뿐이다. 1년 내내 덥지만, 건조한 날씨여서 그늘에 들어가면 서늘하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피부색에 다소 열등감을 갖고 있다. 외국인들과 어울리는 걸 꺼려하고, 그래서 우리가 다가가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나는 현지인의 생일이나 집안일 등에 열심히 참석했다. 가나 사람들은 토요일에 장례를 치른다. 장례 전까지 시신을 냉동보관했다가 토요일에 손님을 초대해 장례식을 치른다. 내가 참석하면 피부색이 달라서 그런지 굉장히 고마워한다. 아직 가난한 나라여서 가로등이 없는 거리가 많다. 이런 도로의 경계석에 페인트칠을 해주면 야간운전에 도움이 된다. 모기 퇴치, 길거리 청소 등 조그만 봉사활동도 꾸준히 했다.

내가 특히 보람 있게 생각하는 일은 2009년 가나 항구도시 테마 국립병원에 안과병동을 신축해 기증한 일이다. 그동안 치료시설이 미비해 백내장 등 각종 안과질환으로 실명하는 가나인들을 보고 사재를 털어 안과병동을 건립한 것이다. 이 병동을 통해 국내 안과 자원봉사단체인 ‘비전케어’와 함께 현지인들을 상대로 무료로 안과 진료도 했다. 이 병원에는 나의 이름을 딴 ‘코피 임’ 수술실도 있다. ‘코피’는 금요일에 태어난 소년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동안 외국인은 돈 벌면 도망가기 바빴는데, 나는 돈을 벌면 장비 확충 등 재투자와 함께 봉사활동 등 현지 사회 환원에 힘썼다. 내가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그들도 내게 마음을 열었다. 한국인이 현지에서 한국인들끼리만 어울리면 결코 그들과 동화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가나 거주 한국교민은 현재 1천명을 넘었다. 절반 이상은 수산업에 종사한다. 가나에 한인회가 처음 결성된 건 1978년이다. 30년 넘게 설날에 윷놀이도 하고 체육대회도 했는데, 매번 남의 시설을 빌려서 했다. 그러다가 2007년에 교실 9개와 운동장을 갖춘 한인학교를 개교했고, 2011년에 내가 70만 달러를 기부해 한인회관을 건립했다. 가나 한인의 90% 이상이 거주하는 가나 제2의 항구도시 테마에 건평 450평(부지 총 7,600평) 규모의 한인회관을 건립한 것이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최초로 건립된 한인회관이다.

인도는 가나에 진출한 지 100년이 넘었고, 중국은 가나에 10만 명이 넘지만 아직 교민회관이 없다. 한인회관은 건물 외부 부지에 잔디구장, 배구장, 수영장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고, 실내에는 농구장, 배드민턴, 태권도 전용도장, 한국상품 전시장, 도서실, 회의실 등이 있는 스포츠 복합시설이다.

이 나라 역시 우리처럼 교육열이 높다.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고, 고등학교부터는 1년 학비로 30만 원쯤 내야 한다. 학비가 없어 고등학교에 진학 못하는 아이 30명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태권도를 열심히 배우는 학생 위주로 선발했는데 지금까지 6백~7백여명이 지원했다. 장학생 출신 중에는 지금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가나는 지역별로 종교가 다르다. 북부 아프리카와 달리 이슬람교는 20% 정도이고, 기독교가 40~50%를 차지한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은 내 종교, 남의 종교에 민감하다. 종교가 다르면 교류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같은 종교인끼리만 뭉치는 경우도 자주 본다.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남의 종교를 존중하지 못하면 그들과 어울리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외국에 종교생활 하러 나간 것도 아닌데 남의 종교에 너무 편협한 사람도 있어 해본 소리다.

지금 아프리카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물 사업이다. 먹는 물이 부족해 우물 파기 등 상하수도 사업이 유망하다. 자동차나 전자제품 조립공장과 함께 에너지·발전도 유망한 사업으로 꼽힌다. 전력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 서비스산업과 금융업 등도 진출해볼 만하다.

산업화 초기단계이니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일거리를 찾아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아이템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현지에 대한 이해와 함께 난관을 극복할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이제 한국도 몸으로 때우던 시절은 지나갔다. 전문가적 식견으로 끈기 있게 파고들면 승산이 있다고 본다. 생활환경만 따지면 미국이나 유럽이 훨씬 좋다. 그러나 거기서 우리가 빼먹을 게 얼마나 있겠는가?

아프리카의 한인업체들은 아직 볼륨이 크지 않다. 가발공장, 자동차부품, 통신제품 판매, 수산업 등을 많이 한다. 최근에는 유통업에 뛰어든 사람도 늘고 있다. 다행이라면 한국에 대한 인식이 좋다는 점이다. 아프리카에 중국인들이 많아졌다. 중국이 대외원조를 무기로 아프리카의 거대 프로젝트를 싹쓸이하고 있다. 중국인들과 경쟁하기보다 우리가 가진 기술적 우위 업종을 찾아서 중국인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중국의 자본과 한국의 기술, 아프리카의 노동을 적절히 조화시킬 필요가 있다.

아프리카로 가는 길은 멀다. 예전에는 홍콩이나 싱가포르를 경유해서 갔다. 요즘에는 두바이 등 중동을 경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항공편도 많고 시간도 줄어든다. 아프리카의 한인들의 중동 경유가 많아지면서 2008년부터 아프리카·중동한인회총연합회가 발족했다. 아프리카 55개국과 중동 16개국 한인회장 모임인데, 쿠웨이트 박정길 회장이 초대 3년을 맡아주셨고 2012년부터는 내가 회장을 맡고 있다. 2012년 6월에는 서울 구로구 에이스트윈타워에서 서울사무소 개소식을 가졌다. 재일민단, 유럽한인총연합회에 이어 세 번째로 서울에 본국 사무소를 연 것이다.

아프리카와 중동은 지역은 넓은 반면, 통신과 인터넷 환경은 열악한 편이다. 서울 연락사무소에서 소식을 모아서 각지로 보내는 일을 한다.  아프리카·중동한인회총연합회 회장의 가장 큰 임무는 무엇일까? 나는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을 아우르는 한인 네트워크 형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비즈니스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각 나라의 특장점을 알려주고 한국인이 진출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 특히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도전하고 관심을 갖는데 일조하고 싶다.

아프리카는 아직 저개발 지역이어서 사회구조가 단순하다.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쉽다. 쓸데없이 머리 쓰지 않아도 일하기나 생활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과거 영국 식민지로 영어가 공용어여서 아이들이 공부하기도 좋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어학연수도 많이 온다. 말라리아 등 전염병이나 풍토병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생활이 건전하면 전혀 문제없다. 나는 아프리카에 처음 가서 1주일 말라리아 약 먹고 지금까지 한 번도 먹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아직 아프리카에 관심이 없는데, 사실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는 산유국이다. 미국과 중국이 오래전부터 석유를 보고 아프리카에 공을 들이고 있다. 우리는 이제 대기업이 아프리카 진출을 시작했고, 정부도 전자정부 시스템 수출을 시도하고 있는데, 아직 부족한 게 많다. 10년 이내에 기반을 잡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 다 뺏길까 두렵다.

2015년 3월 나는 서울시역도연맹회장에 취임했다. 서울시 역도연맹회장이 1년 넘게 공석이라며 주위에서 맡아줄 것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재외동포 기업인으로 국내 경기단체를 맡은 것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나는 취임사에서 서울시역도연맹 전체가 도약함과 동시에 역도인 모두의 숭고한 노력과 정신이 찬란히 빛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역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에너지로 승화시켜 대한민국 역도 발전에 일조하겠다고 밝혔다.

역도는 고대 올림픽은 물론이고, 근대 올림픽이 새로 시작된 제1회 아테네올림픽부터 2016년 브라질 리우올림픽까지 모든 하계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몇 안 되는 종목 중의 하나이다. 장미란, 전병관 선수 등을 배출한 올림픽 효자 종목이다. 서울시역도연맹 회장으로 전국소년체육대회, 전국체육대회, 전국시도 학생역도 경기대회, 서울특별시장 배 역도경기대회 등을 주최 및 주관하는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역도인과 역도 꿈나무 지원도 회장의 중요한 임무다.

이날 행사에는 이진영 전 이집트한인회장, 김종익 전 남아공한인회장, 탄자니아한인회 이태조, 채풍석 전 회장, 원현희 아프리카·중동한인회총연합회 사무총장 등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의 한인 인사들이 참석해 나의 회장 취임을 축하했다.

충남의 공주대학교는 재외동포 연수와 교육에 힘쓰는 국립대학이다. 750만 해외동포 차세대 교육을 위한 한민족교육원 건립 때 시설금 지원 등 후원을 조금 했다. 재외 동포사회도 고국에 기여해야 한다는 내 소신에 공주대학교는 2013년 11월 나에게 명예 경영학박사를 수여했다. 당시 전날 내린 눈으로 캠퍼스가 하얀 설국을 이룬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서만철 총장은 ‘학위수여사’에서 나에 대해 32년간 아프리카 경제현장에서 발로 뛴 지역전문가이자 성공한 기업인이며, 한인사회의 리더로 4년간의 가나한인회장에 이어 아프리카·중동한인회총연합회를 이끌고 있는 나에게 학위를 수여하게 돼 기쁘다고 밝혔다. 내가 현지 공립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국립병원에 안과병원을 지어 기증하고, 한인회관을 건립하는 등 나눔과 봉사를 통해 한인사회의 위상을 높였다고 덧붙였다. 또 내가 한민족 차세대교육을 위해 공주대에 4억 원을 기부했다면서, 사업으로 이뤄낸 부(富)를 다음 세대 교육을 위해 기부하는 정신을 높이 사고 모두가 배워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충남 서산이 고향인 나는 중부권의 명문 국립공주대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게 돼 감명 깊다고 밝히고,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당부의 말’이라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했다.나의 특강은 아프리카에 대한 소개로부터 시작됐다.

“내가 32년 전 처음 도착했던 아프리카는 상상을 초월하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려는 현지인들의 노력을 이해하게 되면서 정착을 결심하게 됐다.” 55개국으로 이뤄진 아프리카 대륙은 12억 인구에 노벨상 수상자가 16명이나 되며, 전체 인구의 40% 이상이 15세 이하인 젊은 대륙이자 미래가 밝은 곳이다. 아프리카중동지역의 한인사회에 대한 소개도 곁들였다. “한인들은 한인회를 중심으로 인종과 피부색을 뛰어넘어 서로 돕고 격려하며 현지사회와 돈독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랜 디아스포라(이산·離散)에도 정체성을 잃지 않은 유대인 같은 정체성을 우리 민족도 간직하고 있다.”

나는 도전과 융화를 강조했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라. 도전은 두려운 일이지만, 성공 또한 도전하는 자의 몫이다. 이해하고 융화하는 자세를 가져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려면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나는 어디에 있든지 한국인의 정체성을 잃지 말라고 주문했다. 같은 말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며, 세계에 뛰어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에게 한 말은 사실 내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정신만 갖고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도전을 기대한다.

 

▲ 임회장 가족
 
 
 
▲ 공주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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