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나의 인연은 기묘하다. 악기하나 만져 보지 못한 나에게 특별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니까 40여년전 복잡한 버스 안에서 어떤 분이 황당하게도 ‘음악’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받은 것. 뒷골목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던 나의 운명을 일순간 바꿔 놓은 것이다. 이때부터 음악 이론과 레슨을 받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나중에사 안 것이지만 이 분은 미국의 어느 주립교향악단 지휘자로 발탁되었다고 들었다.
어려움도 없지 않았다. 음악을 전공하려했지만 집안에선 때마침 당시 경제개발 정책으로 상승세를 타던 ‘공대’를 권유했다.
서울에서 자취를 해가며 주말이면 부산에 내려와 여러 음악단체들과 교분을 쌓아가며 학업도 열심히 해서 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보일러에 관한 특허도 30여개 획득해 에너지절약형 보일러인 콘덴싱 보일러의 국내최초 개발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성공은 뒷전이고 오히려 ‘음악’이 내 삶의 모든 것이요 구심점이 되버렸다.
사실 어린 시절 미술공부도 하여 입상한 적도 있고, 유단자로서 주먹세계와 통하여 담력과 용기와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공대과목과 예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창작과 정교한 설계 기술력이 하나로 묶어져 시너지 효과를 내지 않았나 싶다. 그 결과 1,000여회 이상의 음악회를 지휘하고 500여편 이상의 곡들을 직접 편곡과 작곡을 하는 이력도 쌓게 됐다.
10여년 전 80여명으로 구성된 메시야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한국인의 얼이 녹아든 정서와 우리가락에 깊이 빠져들었다. 세계에 오케스트라 없는 곳이 없지만 한국음악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이다. 미친 사람처럼 우리 작곡가들의 작품을 고르고 분석해 가며 연주했다.
모차르트,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브람스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우리 아리랑은 우리가 자랑해야 한다. 지난해인가 뉴욕 필하모닉이 북한을 방문하여 거쉬인 '파리의 미국인', 드보르작 '신세계교향곡', 미국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 등을 연주한 적이 있다. 이때 북한 청중들은 긴장감 속에서 무표정했지만 아리랑을 앵콜 곡으로 연주하자 분위기가 크게 술렁이었다고 한다.
지휘를 맡은 ‘로린 마젤’은 “아리랑 연주 후 북한인들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라며 남북통일에 대한 자신감도 느껴졌다”고... “음악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그렇다. 음악으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세계 곳곳의 한인 오케스트라와 상호 방문을 구체화해 보고 싶다. 한인 월드 오케스트라협의체라도 발족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