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110] 숭늉
[아! 대한민국-110] 숭늉
  • 김정남<본지 고문>
  • 승인 2016.06.11 0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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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한국인은 추운 겨울은 물론 사시사철 구수한 숭늉으로 식사를 마무리했다. 가마솥에 밥을 지을 때 바닥에 있는 쌀은 누렇게 변화를 일으키면서 단맛과 구수한 향을 내는 누룽지가 된다.

여기에 물을 붓고 뜸을 들이면 숭늉이 만들어진다. 한국인은 밥을 다 먹고, 또 숭늉을 마시고 나서야 식사를 끝낸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만의 식문화라고 할 수 있다. 양식에서의 후식이라는 개념과도 다른 식습관인 셈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부엌은 솥이 고정된 구조로 되어있어, 솥을 씻으려면 물을 부어 솥바닥에 들러붙은 누룽지를 떼어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숭늉이 만들어졌다고 짐작된다.

쌀 한 톨도 버릴 수 없는 상황에서 누룽지를 그냥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숭늉은 밥의 완결이요 식사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일본에서는 솥이 고정식이 아니요, 중국에서는 밥을 지을 때 물을 충분히 넣었다가 끓으면 물을 퍼낸 뒤 뜸을 들였기 때문에 숭늉이 발달하지 않았다.

숭늉은 한자로는 숙수(熟水) 또는 숙랭(熟冷)이라고 불렸다. 음식문화를 연구하는 박정배에 의하면, 12세기 초, 송나라 때 손목(孫穆)이 지은 백과전서인 ‘계림유사’에 ‘숙수를 익은 물이라 한다’(熟水曰泥根沒)고 했고, 19세기초 발간된 ‘임원경제지’에서도 숭늉을 숙수라고 했다고 한다.

숙랭은 조선 숙종 때 박두세(朴斗世)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단편산문 ‘요로원야화기’ 등의 문헌에 나온다. 이 ‘숙랭’이 시간이 지나면서 ‘숭늉’으로 됐다는 것이 언어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서긍의 고려도경(1123년)에는 “고려의 관원과 존귀한 사람들이 숭늉을 제병(提甁-들고 다니는 물병)에 넣어 다닌다”고 했고,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1795년)에는 “식사 끝난 뒤 숭늉을 마시고 나서는 다시 반찬을 먹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이처럼 한민족은 오래전부터 식사의 마무리로 숭늉을 먹었다. ‘구급간이방’(1489년)이나 ‘동의보감’(1610년)같은 의학서에도 등장할 만큼 숭늉은 음식 겸 약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만큼 한민족에게 익숙하다.

한민족에게는 숭늉과 관련한 속담도 많다. “숭늉에 물 탄 격”, “김 안 나는 숭늉이 더 뜨겁다”, “숭늉과 같은 친구” 등이 그것이다. 숭늉에는 은은한 장판색 같은 빛깔이 있고, 역시 그렇게 구수한 맛이 있다.

그러나 그 빛깔은 있는 듯 하면서도 없는 것 같고, 그 맛은 없는 듯 하면서도 있는 것 같다.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그 맛을 알 수 있으며 따라놓고 보아야 그 빛깔을 볼 수가 있다.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짓던 시절, 쌀을 씻은 물로 숭늉을 만들었을 때의 그 구수한 맛과 우유빛 색깔은 그것을 맛 본 사람만이 기억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전기밥솥이 보급되면서 일반가정에서는 누룽지를 만들 수 없게 되었다. 거기다 후식으로 널리 보급된 커피에 숭늉의 자리와 맛을 빼앗기더니, 숭늉은 급속도로 우리 밥상에서 사라져 갔다.

저녁상 물릴 때의 그 구수하고 따스한 숭늉 한 그릇은 고향을 생각나게 하고, 내가 살던 옛집을 떠올리게 한다. 이어령의 말처럼 “숭늉 속에는 무뚝뚝하면서도 정에 겨운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있고, 외할머니 같은 손길이 있고, 우륵이 타는 가야금 소리가 있고, 춘향의 옷자락 같은 음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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