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ova 여행담
Kosova 여행담
  • 월드코리안
  • 승인 2010.07.1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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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차랑 / 스위스 Menziken

농담으로 했던 말이 진담으로 되어버렸다.

우리 집사람 학생 중 말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집중도 못해서 벌을 받기도 많이 했는데 Lager(수련회)를 가거나 반에서 행사가 있으면 매번 춤추기를 좋아하던 한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때로 결혼식 때 추는 춤을 추자며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다. 그래서 한번은 아내가 “그래! 네가 결혼하면 가서 봐 주겠다.“라고 농담했는데, 5년 후에 정말 그 아이의 결혼 초대장이 왔다.

’코소보’ 아이들 하면 학교에서 문제를 많이 일으키고, 폭력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나라는 전쟁이 있었고 살육이 있었던 곳, 참혹한 살생이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선 범죄는 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행위라고 인식이 되어 있기에 여자 둘만 (아내와 학교 비서로 있는 친구) 보낼 수 없기에 내가 동행하기로 했다.

코소보는 비행기로 2시간이 소요된다. 여름방학을 보내기 위해 이동하는 많은 귀향인들로 공항이 붐볐다. 비행장은 옛날 여의도 보담 더 작은 규모이고, 짐이 나올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관광객이 없는 코소보에 우리 세 사람이 짐을 기다리며 멍청이 서 있으니 독일말 하는 사람들이 말을 건네왔다.

왜, 어떤 일로 왔느냐? 오늘저녁엔 어디서 잘거니 등등. 모두다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관심 있어했고 호기심 반 걱정 반 인 것 같았다. 인심이 좋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고마웠다. 겨우 짐을 찾아 나오니 봘론과 쉬프론이 기다리고 있다. 너무 늦었기 땜에 빨리 출발했다. 막 달리다간 갑자기 핸들을 흔들어 준다.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길에 구멍이 사방에 뚫려 있다. 그것을 피하느라 이렇게 위험하게 운전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교통질서는 알만 하겠지. 우리도 어릴 적에 우리 길이 그랬기에 이해할 만했다. 도중에 차가 구덩이에 빠져 있기도 하고, 개들이 차도를 횡단하는 것도 예사였다. 젖소들이 차도를 지나 귀가하는 것은 물론이니 이런 환경에서 운전해야 하는 운전기사들의 졸림은 어림도 없다.

도중에 보니 새 집들을 많이 짓고 있었다. 설명을 듣고 보니 전쟁 때 폭탄에 폭발 당했거나 불 질러진 집들이란다. 같은 집들이 서너채 줄줄이 있는 것은 형제들 집이란다. 헐어진 집들은 세르븐 사람들이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지금은 살지 않기 때문에 황페해 있거나 때려 부순 것이라고.

한 시간 이상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하니 그의 식구들이 다 나와서 반겨 주었다. 식구 8명에 동네 여자들이 다 모여 신부가 입을 옷이며 패물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아서 동네 전체가 시끄러울 정도다. 경찰이 올까 걱정했더니 누가 결혼하면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하는 것이 이 곳의 전통이란다.

조금 있으니 갑자기 정전이 되어 버린다. 가동전기가 공급되는데 하루에 몇 시간만 전기가 들어 오고, 물도 하루에 2시간 정도만 나온다고 한다. 대변도 제대로 못 볼 정도니 샤워는 아예 생각을 말아야 한다. 나한테는 딱 적성이다 싶었다.

그날은 일찍 자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터키 커피와 접시에 치즈, 소시지, 토마토 등 식사를 주면서 전 식구가 다 나와서 혹시나 필요한 게 있는가 부족한 게 있는가 옆에서 지켜봐 주며 어눌한 독일어지만 지극히 정성을 다해 우리를 손님 대접 해 주었다. 그 학생 외는 한번도 본적도 인사 나눈 적도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정성 들여 대접해 주니 미안 송구스러웠다.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 손님대접이 제일이라고 자부했는데 이들은 훨씬 더 하다.

지난3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고, 43도 까지 수온이 올라가는데도 이들은 우리가 불편할까 항상 염려해 준 친절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코소보인에 대한 우리 인상은 정 반대로 바뀐 계기가 되었다.

삼일째부터는 옛날 수도였던 Prizelen에서 호텔방을 사용했다. 1인 15유로, 식사로 피자 1.5유로, 송아지 비프스테크 5유로, 커피 0.5유로. 이렇게 저렴해서야 우리가 가져간 돈을 언제 다 쓸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농담이지만 너무 저렴해서 나온 노파심?). 이 곳에서 호텔직원 월급이 130유로이며 이것으로 5명 식구가 살아야 한단다.

결혼식
결혼식은 3일이 걸린다. 첫날은 패물을 신부집에 갖다주고 신랑집에서는 동네어른들, 친척, 아이들이 다 모여서 춤추며 놀고, 음식은 콜라나 탄수음료에 과자종류였다.

누가 방문하면 전 식구가 다 줄을 서서 한 손으론 악수를 하고 왼손으론 자기 가슴에 대어주며 손님에게 인사를 전한다. 진심이란 뜻이란다. 가난해서 술이 없는가 보다 했더니 아니었다. 종교전례상 술이 없단다. 우리도 정이 많고 손님을 최고로 대접하는데, 다만 문제가 있다면 술을 마신 후 싸우거나 말썽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런 장면을 전혀 볼 수가 없다.

술기운으로 우리는 기분을 살리는데 이 사람들은 술 없이도 음악에 맞춰 둥그래 춤을 추면 신을 내는 것이 정말 좋았다. 다들 화장하고 멋있는 예복들을 입고 나와서 춤추며 축하해 주었다.

둘째 날은 다시 패물을 가지러 가고, 잔치는 첫날보다 더 크게 벌여진다.
삼일 째는 두 곳에서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어 잔치를 하는데, 그날은 남자들이 더 우수하다. 현악기 연주자들이 와서 방안에 빙 둘러 앉아 있는 축하객들에게 독립운동가들을 현모 하는 노래를 비롯하여 끝이 없이 노래하고 연주하여서 하객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다. 밖에선 집시들이 태평소 같은 악기에 북을 가져와서 새로운 손님이 오면 연주를 한다.

그러면 식구는 물론 친척들까지 다 나와서 줄을 서서 인사하고 방에 들어가 앉으면 담배 한가치를 권하고 음료수를 대접한다. 당연히 나는 남자들 사이에 있었으니 남자들 세계만 보고 왔지만, 나이 많은 어른은 절대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눈만 깜빡 해도 젊은 사람들이 얼른 다가와서 필요를 들어 주었다. 덕택에 나도 편리를 많이 만끽했다. 음식이 나왔고 (스위스 학교의 Mensa 음식 정도), 식사 후 오후 2시에 신부를 모시러 출발한단다.

맨 앞에 국기를 달고 집시 음악가들은 중간쯤 짐칸에 앉아서 음악을 연주한다. 이동하는 자동차들이 줄을 서 있는데 세어보니 50대나 된다. 가다가 길이 좁아지면 다른 자동차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교통이 말이 아니다.

이동 도중에 반은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우리는 30분 정도 기다려야 했고, 가는 도중에 불이 난 자동차들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세르븐인들이 코소보 가족이 탄 자동차에 불을 질러 다 죽였다고 끔직한 말을 해준다.

무서운 얘기들인데 우리 한국전쟁 때도 더 심했지 덜 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다른 팀이 도착하고 신랑 아버지가 야단 법석하는 것을 처음으로 봤다.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부집에 도착하자마자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어 가보니 동리남자들이 다 모여 줄을 서서 인사를 하는 예식이 시작되었다.

나도 자연적으로 악수를 하며 왼손은 가슴으로 가져갔다. 인사 후 학교마당에 빙 둘러 앉아 있으니 먼저 담배 두 개비를 신부아버지가 권하고 음료수가 나오고 집시들이 음악연주 하니 함께 갔던 남자들이 춤을 추는데 정말 보기에 좋았다.

처음엔 solo로 춤을 추다가 나중엔 손잡고 빙 둘러 춤을 추었다. 그리고는 바로 일어나 또 출발이다. 차들은 다 울굿불굿 꾸며서 신부를 납치(?)해 가는 분위기다. 결혼은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고 동리와 동리의 결합이고 전 동리사람들이 다 참석하니 절대 이혼이란 말은 있을 수 없는 형편이다.

귀향 길에서는 신랑아버지가 위험지구에서 기다렸다가 모든 차들이 다 도착하여 줄을 서면 다시 출발하곤 했다. 자동차들이 내내 시끄럽게 빵빵거리며 신랑동네로 되돌아 왔다.

기다리던 신랑이 규수를 잡고 집안으로 데리고 오는데 동리사람들이 빽빽하게 둘러 서서 구경하느라 발 디딜 틈이 없다. 신랑신부가 문설주에 소금을 문지르고 방으로 들어 갔다가 잠시 후에 밖으로 나와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춤을 추었다. 모두들 치장을 하고 예복을 입고 춤을 추니 참으로 아름답기만 했다.

저녁에는 피로연이 큰 식당에서 있었다. 생음악이었는데 얼마나 소리를 크게 틀어 놓았는지 바로 옆 사람의 말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는 귀빈석에서 대접을 받았는데 이번엔 전식, 후식, 고기, 생선 등 만찬이었다. 술도 있었고 300명이 앉아있는 식탁을 빙빙 돌면서 춤을 추었는데 나도 손잡고 춤을 추니 손님들이 대단히 좋아했다.

어떤 노인은 기분이 좋아 자기가 쓰고 있던 모자도 주면서 박수를 보내며 끝날 때까지 엄지를 올려주면서 미소를 보내왔다. 자기 문화를 받아주었다는 의미로 보였다. 새벽 2시에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지극히 인상 깊은 날과 결혼식을 되새겨보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코소보는 가깝지 않지만 여름방학에는 결혼식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고향으로 온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매일 결혼자동차 Korso를 서너대 볼 수 있었다. 자동차 번호는 스위스 차가 제일 많았고, 이 중에서 아르가우(AG) 차가 절대적으로 다수였다. 독일, 벨기에 등 유럽에서 다 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말이 어디서나 통하니 의사소통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고, 자연은 한국적이었다. 산과 들이 많았고 그래서 고향에 온 기분이었다. 이슬람 종교지만 머리에 수건을 두른 여자들이 드물었고 신변에 위험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동냥하는 짚시들이 많았지만 행인을 괴롭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아침 5시에 뮤엣찐이 부르는 노래인데 너무나 안정을 주는 조용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멜로디였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에 그 소리를 듣지 못하면 하루의 중요한 부분을 놓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곳에서10일 동안 있으면서 배운 것도 체험한 것도 많았던 것 같다. 주인집 식구들도 너무 친절했고, 모든 정성을 다하여 손님으로 대접해 주어서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이 든다.

헤어지기 전에 모든 식구들과 큰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했는데 생선요리였다. 1킬로당 9유로로 식사비가 저렴하였고, 서비스하는 종업원들도 친절하고 재빠르게 서빙을 했다. 이런 점은 스위스 식당들도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분이 좋아서 식사비를 부담하겠다 하니 절대 그럴 수가 없단다.

변명으로 이건 한국식 전통이라고, 마지막 파티는 손님이 주인에게 베푸는 것이 우리식이라 하면서, 신랑 아버지와 둘이서 실갱이를 벌이니 손님전부가 쳐다보고 박수를 보낸다. 그래서 결국 내가 이겼다.

그 집 식구들도 생전 보지 못했던 일이라 박수를 보낸 것이다. 절대 권위를 쥐고 있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답을 주는 아버지가 결국 한국인에게 꼼짝 못하고 진 것이다. 그들의 친절에 고마워서 조금이라도 우리의 마음을 표시하고 싶은 거였다.

나는 누구에게나 코소바 여행을 권하고 싶다. 앞으로 독립이 되면 관광나라가 될 거라 믿는다. 물론 어디를 가나 공동묘지가 새로 생겼고, 어떤 학교 건물에서는 집단 총격을 해서 동리인들을 무차별하게 살상한 곳도 아직은 있지만, 자연 조건이 좋고 여러가지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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