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가기] 연암 박지원의 발자취를 따라서
[참가기] 연암 박지원의 발자취를 따라서
  • 이예본(영구개발구제일고등학교)
  • 승인 2017.10.07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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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친선우호협회가 주최한 ‘연행로 답사’에 참가

지난 9월 한중친선우호협회가 주최한 ‘연행로 답사’에 중국 영구(잉커우)의 황승수, 이예본 학생이 참가했다. 두 학생은 고미숙 작가의 열하일기를 몇 차례 읽으며, 이 행사를 준비해 왔고 여행 후에는 답사 후기를 각각 남겼다. 이예본 학생의 후기를 먼저 소개한다.<편집자 주>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어두컴컴한 새벽 3시에 영구 빠위첸을 출발해 심양사범대학으로 향했다. ‘연행 길로 다시 걸어보기’ 행사는 1박2일 기간 동안 빠듯한 일정으로 진행된다. 오전 6시30분 공식행사를 갖고 7시에 출발하기로 돼 있었다. 한밤중에 혼자 3시간 가까이 걸리는 장거리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거라면 무서울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 함께 참가하는 승수가 있었고 영구한국인회 홍찬수 부회장이 동행해 주셨다.

▲ 심양사범대학교 앞에서 ‘연행 길로 다시 걸어보기’ 출정식이 열렸다.
차에서 자다가 내린 심양은 우리 빠위첸보다 더 쌀쌀했다. 대학 내 국제교육학원에서 사행단 선생님들을 만나고 연행길 지도가 그려진 옷으로 갈아입으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어머니가 도시락으로 싸주신 유부초밥과 삼각 김밥이 있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입맛이 없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회식이 열렸다. 연행 길 행사의 축사를 듣고 기념촬영을 했다. 조선시대 사행단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여정이 시작됐다.

버스에서 설명을 들으며 단동으로 갔다. 연행 길은 말 그대로 조선시대에 조정에서 파견돼 명나라 혹은 청나라의 황제를 알현하러 남경 또는 연경(현재의 북경)에 가는 길이다. 사행단이 몇백년간 지나 다녔던 그 길을 다시 걸으며 의미를 되새기고 한중간의 우호를 다지는데 뜻을 같이했다. 중간에 통원보 휴게소에 들러 쉬는 시간을 가졌다.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는 화장실은 중국 여행길의 묘미(?)다.

단동에 도착한 후 먼저 압록강대교를 가보았다. 무역의 증대를 위해 중국 측에서 거금을 들여 건축한 다리이지만 북한 측의 공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서 개통이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다음 행선지는 압록강단교였다. 단교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국군의 철수작전을 돕고자 유엔군의 폭격으로 끊어진 다리다.

▲ 이예본 영구개발구제일고등학교 학생.
나는 이 단교에 3번이나 와봤지만 올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중국 변방에 와서야 볼 수밖에 없는 같은 민족이 사는 북한. 다리 끝에서나마 그 곳의 사정을 살펴본다. 압록강 다리를 걸어오면서 다리의 중간에 서서 단동과 신의주의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단동은 개혁개방 몇 십 년 만에 고층빌딩이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형형색색의 불빛 속에 살아가는데 신의주는 여전히 과거 1970년대의 모습에서 정체돼 있는 도시다. 중국 땅은 나날이 발전하는 반면 북한은 세습적인 정치와 폐쇄적인 경제로 인해 빈곤에 처해 있다.

두 나라의 엄청난 차이를 또 한 번 느꼈다. 전주식당에서 맛있는 전주비빔밥을 처음 먹어봤다. 한국 전통비빔밥과 맛이 비슷했다. 우리 일행은 대다수가 대학생으로 구성됐고, 오로지 2명만이 고등학생 신분으로 참석했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조금은 가까워 진 것 같았다.

점심을 든든히 먹고 관우묘에 갔다. 박지원이 그의 작품인 <열하일기>에서 문지기를 무지하다고 묘사한 곳의 유적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높은 문턱을 넘어 들어가니 큰 고대식 건물 안에 관우와 다른 여러 신상들이 있었다.

향을 피운 지 오래되지 않았는지 그 냄새가 가득했다. 삼국시대 명장 관우가 중국에서 재물의 신이 된 일화를 들었다. 다음으로 북한군 초소가 보이는 강가에 갔다. 이 양관쇄관은 옛 세관이 있었던 자리라고 한다. 저 멀리 몇 년 전에 올랐던 호산산성이 보인다. 호산산성의 문을 지나 압록강 유람선을 타러 갔다. 유람선도 3번째 타는 것인데 북한 사람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흥분됐다. 강바람은 은근히 세서 어떤 분의 모자가 날아가 강물에 빠졌다.

수레를 끄는 북한 아저씨를 보았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와 양들도 보았다. 한 분이 북한 군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자 군인도 멀리서 인사를 했다. 세상 어느 나라든 인사를 받아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유람선이 온 길을 따라 되돌아 갈 때 북한의 나룻배 한 척이 빠르게 접근해 와서 우리 배와 묶어 고정시키고 북한산 물건을 판다.

▲ 박지원의 열하일기 루트.
유람선 선장이 우리에게 북한인 사진을 찍지 말라고 경고를 주었다. 북한 상인은 북한담배와 인삼주 등을 팔며 외화벌이를 했다. 나는 돈이 없었을 뿐더러 딱히 살 것이 없었다. 재작년에 유람선을 탔을 때도 북한 상인이 물건을 팔았다. 나는 북한이 이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외화벌이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고요한 압록강 위에 따스한 햇살만이 강물 위를 비추고 있었다.

구련성 세무석비가 있는 곳에 도착해보니 초등학교가 세워져 있고 그 곳의 역사를 알려주는 석비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세무국은 사행단과 같이 온 상인의 물품에 관세를 부여하는 곳이다. 관세 부여의 의미는 자국 상품의 보호를 위해서라는 것이 생각났다. 버스 타고 얼마 가지 않아 구련성 옛 성지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도 두 개의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녹이 슨 철로 보호되고 있었다. 이렇게나마 연행 길의 역사가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저녁에 온천호텔에서 쉬었다. 이 호텔은 사행단이 온천목욕을 한 오룡배온천에 위치해 있다. 숙소를 배정받고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사행단이 온천욕을 한 곳에서 우리도 피로를 푸니 정말 사행단이 된 것 마냥 편안했다. 룸메이트 언니와 대화를 하면서 친해졌고 피곤했던 하루 만큼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

아침 일찍 책문에 갔다. 이 곳은 사행단에서 직위가 높은 자들이 묵었던 곳이고 다른 사람들은 노숙을 했다고 설명을 들었다. 1년에도 몇 차례인데 노숙을 했다니 고통과 수고가 가히 놀라울 따름이었다. 과거 책문은 지금까지 계속된 땅 매매로 한 공장지로 전락해 버렸다. 졸린 눈을 비비며 유적지를 자세히 보고 차에 올랐다.

곧이어 봉황성에 도착하니 크고 멋진 문이 나를 반겨주었다. 조금 들어가 보니 봉황성 관아 유적지가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유치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때 할아버지 한 분이 손에 검은 봉지를 들고 다가오셨다. 해설하시는 선생님이 그 분을 반기시며 그 할아버지가 사행단 통역집안의 후손이라며 소개해 주셨다.

 
할아버지가 고이 쥔 봉지에서 조심스럽게 꺼내신 것은 바로 족보였다. 낡고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서 그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깊이 실감할 수 있었다. 사행단과 관련된 족보를 직접 본 것이 신기했고 이 할아버지가 연행길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그 할아버지의 손자 분은 지금 대련 모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다. 할아버지 아드님이 오셔서 족보를 읽고 해석해 주셔서 더욱 자세한 역사를 알게 되었다.

점심을 중국식당에서 배불리 먹었다. 일행 중 같은 빠위첸 출신인 학교 선배를 만나서 정말 반가웠다. 식당 문 앞에 자주색과 분홍색의 들꽃이 만개해 행인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식당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역참이 있었다. 역참은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 전송하며 접대하는 일을 위하여 마련된 교통·통신 기관이다. 지금은 그 당시의 벽의 일부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다음 행선지는 청석령이다. 일정표를 보니 걷는 시간이 많이 할애되어 있었다. 평소에 운동을 많이 못해서 등산에 자신이 없었다. 난 은근히 걱정되기도 해서 산행 준비물을 간단히 챙기고 버스를 내렸다. 산을 오를 때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하니 그 곳에 또 관우묘가 있었다. 향내가 진동하는 관우묘에 갔다가 나와서 더 깊은 산속으로 가니 그 내려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훨씬 험난했다.
무성한 잡초를 밟고 넘어 내려가다 길이 막혔는지 기념촬영을 하고 다시 돌아왔다. 차에서 긴 휴식시간을 가지며 노래를 들으며 산행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풀었다. 다음 일정으로 요양에 도착해 백탑을 보러 갔다. 백탑은 생각과 달리 하얗지 않고 황토색이었다. 이 탑도 종잇장처럼 오랜 세월 동안 노랗게 변색된 것일까? 요나라 시대에 지어진 것이라 추정되는 이 탑은 8각에 정교한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

 
요시대에 만들어진 사탑과 불상, 불화, 불경 등은 오늘날에도 상당수 전해지는데, 섬서성의 각산사탑, 베이징의 천녕사탑, 요녕성의 요양백탑 등은 조형미가 뛰어나 불교 예술의 발달 수준을 알려준다고 한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나열된 세 개의 도시 중에 두 개의 도시는 잘 알려진 서경과 북경이다. 중국의 남경은 난징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동경이 어디일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요가 발해를 격파하고 ‘동경’이라 고쳤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요양현’이다.(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98쪽 그린비 출판사) 역사의 실타래를 풀어가고, 조각퍼즐을 맞춰가는 희열을 맛보았다.

마지막으로 호텔식당에서 일정을 위해 수고해주신 선생님들의 말씀을 듣고 만찬을 가졌다. 식사 후 우리는 고속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 먹은 솜 같은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해 바로 침대로 직행했다. 연행 길을 직접 체험한 우리는 이제 몇백년 시대를 뛰어 넘어서 지금 21세기의 사행단이다. 한중 양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고 우호를 다지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개인 외교관인 것이다. 사행단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연행 길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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