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내 고향 문화유적 답사
[이영승의 붓을 따라] 내 고향 문화유적 답사
  • 이영승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 승인 2018.08.13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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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로지향(鄒魯之鄕)은 맹자가 추나라 사람이고 공자가 노나라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현을 존경하고 도덕과 학문을 숭상하며 예의를 지키는 선비의 고장을 말한다. 안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추로지향이다. 도산서원 입구에 세워진 공자의 77대 종손 공덕성(孔德成)의 친필 ‘추로지향’ 비석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나는 안동에서 태어난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안동은 유교문화와 씨족문화가 발달한 역사의 고장이다. 조상제사는 고조부까지 4대를 모시지만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조정에서 사당과 토지를 내려 영구히 모시도록 했다. 이러한 신위(神位)를 국불천위(國不遷位)라 하며, 지방 유림에서 공론으로 결정한 불천위를 향불천위 또는 유림불천위라 한다. 안동 지방에는 퇴계선생과 서애, 학봉 등 불천위가 무려 47위로 다른 지방에 비해 월등히 많다.

고려대에서 수필을 배워 등단한 ‘여울회’ 문우들이 내게 몇 번이나 안동으로 문화유적 답사를 가자고 종용했다. 지도교수님의 동의로 문학기행이 전격 성사되었다. 안동에는 문화유적지가 워낙 많아 하루일정으로는 대상지를 선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청에 연락해 자료를 받고 인터넷을 검색하는 등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첫 답사는 ‘하회마을’이었다. 임진왜란 때 7년간 영의정을 지내며 나라를 구한 서애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2,010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 부자(父子)가 모두 다녀갔으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도 방문한 곳이다. 낙동강이 마을을 감싸고 돌아가는 전경은 실로 장관을 이룬다. 강 건너 부용대 아래 솔밭 속에 서애 선생이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했다는 옥연정사(玉淵精舍)가 아득히 보였다.

다음 방문지는 임하면 ‘내앞마을’이다. 이곳은 학봉 김성일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의성김씨 집성촌이며 ‘하회마을’과 함께 영남의 4대 명당마을 중 한 곳이다. 학봉은 선조 때 일본의 침략 여부를 간파하기 위해 조선통신사 부사(副使)로 파견되었던 대학자이며, 서애와 함께 퇴계의 수제자 중 한분이다. 안동은 전국 기초 자치단체 중 독립유공자가 가장 많이 배출된 곳이며, 이를 상징하여 2,007년 이곳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안동에 대해 말하려면 ‘병호시비(屛虎是非)’를 알아야한다. 병호는 서애를 모시는 병산서원(屛山書院)과 학봉을 모시는 호계서원(虎溪書院)의 각 첫 글자이다. 벼슬은 서애(영의정)가 학봉(관찰사)보다 높았으나 나이는 학봉이 4살 위며, 두 분은 퇴계선생의 양대 수제자이다. 두 분 중 누구의 위패를 퇴계의 좌측에 배향(配享)할 것인가를 놓고 1,620년대부터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양측 제자들은 물론 하회와 내앞 두 문중 간의 위세 다툼으로까지 확산되어 400년째 내려오고 있는 대 사건이다.

다음 방문지는 고성이씨 종택인 ‘임청각(臨淸閣)’이었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노라’라는 시구에서 임(臨)자와 청(淸)자를 인용하였다. 1,519년 건립 당시는 99칸이었으나 전란 때 불타고 지금은 70여 칸만 남아있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이 바로 임청각의 종손이다. 선생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고 식솔과 함께 만주로 떠났다. 22년간 독립운동에 처절히 몸 바치다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시신을 환국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채 이국땅에서 서거하셨다. 임청각은 석주 3대를 포함 10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명실공히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임청고탑(臨淸古塔)은 하회청풍(河回淸風), 도산명월(陶山明月)과 함께 안동팔경 중 하나다. 다행히 종손의 삼촌이 계셔 직접 상세히 설명해주시니 후손인 필자의 체면이 섰다.

점심은 안동 댐 입구에 있는 토속 음식점에서 ‘간고등어 정식’으로 했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 경’이라 했던가? 점심 식사가 늦어서인지 소찬을 대접했는데도 맛있다며 극찬을 했다. 시간 관계로 당초 계획했던 안동 댐 구경은 제외하고 도산서원으로 직행했다.

가는 도중에 ‘군자리(君子里)’라는 간판과 고택들이 보이자 일정에 없지만 일행들이 한번 보고 싶다고 하여 잠시 들렀다. 군자리는 옛 ‘외내마을’의 별칭인데 그 유래는 이렇다. 400여 년 전 이 마을에 일곱 분의 군자(광산김씨: 후조당(後彫堂), 양정당(養正堂), 설월당(雪月堂), 읍청정(挹淸亭), 산남(山南), 봉화금씨: 일휴당(日休堂), 면진재(勉進齋)가 태어났다. 모두 퇴계의 제자들이다. 군자리란 이름은 퇴계 제자 한강 정구 선생이 안동 부사 재임 시 이곳을 방문했을 때 후손들의 덕행을 칭송하며 “이 마을에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감탄하여 후일 군자리라 불리게 되었다. 외내마을이 안동 댐으로 수몰되자 광산김씨 다섯 정자는 이곳으로 옮겼으며, 봉화금씨 두 정자는 영남대학에 기증되었다. 봉화금씨 두 군자 중 맏집인 일휴당의 부친 금재(琴榟)가 이곳 광산김씨 입향조인 김효로의 사위이며, 일휴당의 누님은 퇴계의 맏며느리이다. 퇴계의 묘 앞에는 특이하게 며느리의 묘가 있다. 평생 퇴계를 모신 맏며느리가 ‘죽어서도 시아버지의 혼을 모시고 싶다’하여 안장되었단다. 필자의 장인이 일휴당 종손이라 수차 들었던 얘기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정점인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도착했다. 이곳은 퇴계가 그토록 소원하던 후진양성의 꿈을 실현한 학문의 전당이다. 서원입구에 들어서자 매화꽃 봉우리가 향기를 뿜으며 우리를 반겼다. 매화를 보는 순간 퇴계와 매화 간에 얽힌 사연들이 떠올랐다. 퇴계는 고향에서 학문을 닦으며 꿈을 실현코자 평생 72회나 사직서를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향 인근에라도 오고 싶어 지방관직을 자청하였으며, 48세에 단양 군수로 부임하게 된다. 속설에 의하면 이때 18세의 관기 두향을 만나는데 두향은 미모일 뿐만 아니라 시, 거문고 등 다방면에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8개월 후 퇴계가 풍기 군수로 전보되어 떠나면서 두향에게 이별의 시 한수를 건넸으며, 두향은 손수 키운 매화 분재를 선물했다고 한다.

물론 허구일 것이다. 어째든 퇴계의 매화 사랑은 너무도 지극해 매화를 빙설, 옥설, 청진옥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의인화하여 매형, 매처, 매선, 임이라고도 불렀다. 때로는 자신과 매화의 역을 바꾸어 증답시(贈答詩)를 주고받기도 했으며, 매화를 소재로 한 107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그 중에 퇴계가 한양에서 고향으로 마지막 내려오면서 애지중지하던 매화 분재에게 고한 작별시 한수를 소개한다.

頓荷梅仙伴我涼(고맙게도 그대 매화 나의 외로움 함께하니)
客窓蕭灑夢魂香(나그네 쓸쓸해도 꿈만은 향기롭네)
東歸恨未携君去(귀향길 그대와 함께 못가 한스럽지만)
京洛塵中好艶藏(서울 세속에서도 고운 자태 간직해주오)

도산서원은 율곡과도 인연이 깊다. 16세에 신사임당을 여인 율곡은 실의에 빠져 19세에 금강산으로 입산한다. 2년 후 하산하지만 나아갈 바를 몰라 방황하다가 이곳 도산서원으로 58세 노학자 퇴계를 찾아온다. 퇴계는 율곡의 비범함을 간파하고 35세 연하인 그를 자기와 대등하게 예를 갖춰 대한다. 율곡은 이곳에 3일간 머물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은 후 居敬窮理(공경한 마음을 견지하여 학문을 탐구하라)라는 네 글자를 받아 평생 좌우명으로 삼는다. 퇴계는 율곡이 떠난 후 제자 월천에게 보낸 편지에 後生可畏(젊은 후배가 두려울만하다)라 감탄한다. 율곡은 10개월 후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이라는 불후의 명작으로 장원급제를 하였다. 율곡은 49세에 일찍 세상을 뜨지만 퇴계에 이어 우리나라 성리학의 거목으로 추앙받고 있다. 흔히들 인류가 낳은 두 성인 공자와 노자의 만남을 ‘세기적 사건’이라고 한다. 혹자는 이때 퇴계와 율곡의 3일간 만남을 그에 버금가는 대사건이라고도 한다.

퇴계는 임종하기 전에 자신의 장례식과 묘지를 절대 호화롭게 하지 말 것을 유언하였다. 그의 작은 비석에 새겨진 退陶溪晩隱眞城李公之墓(도산으로 물러나서 만년을 숨어산 진성이공의 묘)라는 소박한 열 글자는 퇴계가 유언에서 남긴 친필이다. 비보를 들은 선조 임금은 영의정을 추증하고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라는 서른 한자나 되는 긴 시호를 내렸다.

서원 경내를 둘러본 우리 일행은 전교당 난간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눈앞에는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450여 년 전 민족의 큰 어른 퇴계는 이곳 서당에서 학문을 탐구하며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그 때도 저 강물은 유유히 흘렀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숙연해졌다.

안동의 자랑 중 하나가 ‘국학진흥원’이다. 진흥원 내에는 ‘유교문화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당초 계획한 이곳은 시간관계상 볼 수가 없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처음부터 하루 일정으로 계획한 것이 잘못이었다.”며 한 번 더 오자고 했다. 그날을 기약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추천작가회 이사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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