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콩나물 단상
[해외기고] 콩나물 단상
  • 황현숙(객원 칼럼니스트)
  • 승인 2018.11.12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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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동안 기관지염으로 인한 기침치료를 위해 많은 분량의 항생제를 먹었다. 그 후유증으로 소화 장애가 생겼고 음식의 맛조차 쓰게 느껴져서 한동안 제대로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옛날부터 어른들이 충고하던 “사람은 밥 힘으로 산다. 나이가 들수록 식사를 잘해야 건강하고 병이 나지 않는다”는 불변의 진리를 요즘에 와서야 실감하고 산다. 소화제를 상비약으로 준비해놓고 가려먹는 음식의 종류도 점차 늘어난다. 소화도 잘 되고 입맛에 맞는 양념을 할 수 있는 반찬을 찾다보니 콩나물이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어린 시절부터 고기보다는 나물이나 생선을 즐겨 먹는 편이어서 엄마는 막내딸을 위해서 다양한 나물 반찬을 곧잘 만들어주셨다. 그 중에서도 콩나물 무침이나 콩나물국, 콩나물 장조림을 좋아해서 자주 밥상에 올려주었다. 아삭아삭하게 잘 삶은 콩나물에 참기름 몇 방울을 떨구고 약간의 고춧가루와 깨를 넣는다. 엄마의 손맛으로 조물조물 무친 콩나물 무침에 갓 구운 조기나 가자미 살을 같이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요즘은 옛날에 먹었던 음식이 자꾸만 그리워지니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인가보다. 오늘 저녁에는 약으로 얼룩진 나의 위장을 콩나물 무침과 시원한 콩나물 순두부국으로 달래봐야겠다.

콩나물이라고 하면 일반 서민들의 밥상에 흔히 오르는 밥반찬인데 무심코 먹으면서 영양분이나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콩나물에 어떤 영양분이 들었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완벽한 건강식품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콩나물 무침 두 접시(약 400g)면 어른이 하루에 필요한 비타민 C를 충당할 수 있는데 바로 콩이 만들어내는 ‘발아’ 때문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B1, 칼륨, 미네랄, 칼슘, 식이섬유 등이 들어있어서 다이어트에 유용하고 특히 임산부에게 도움이 되는 성분들이 들어있다고 한다. 싼 가격에 다양한 요리도 가능하니 콩나물 예찬론이 나올 만도하다. 글로벌 시대에 영양가 풍부한 콩나물비빔밥과 해장국을 현지인의 입맛에 맞게 개발해서 한식의 세계화에 한 몫을 보태도 좋을 듯싶다.

콩나물과 연관되어서 근대 한국 엘리트여성에 얽힌 슬픈 기사를 읽었다. 1930년대면 한국이 일본의 통치아래에 있어서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차별을 받았다. 특히 여성들은 잘못된 유교사상으로 인해서 남녀차별과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더욱 힘든 생활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런 당시대에 한국사회를 놀라게 만든 한 여성의 부고기사가 1932년 4월24일 동아일보 신문에 실렸다. ‘최영숙씨 지난 23일 자택에서 별세’ 라는 짧은 기사였다. 그녀는 서대문 밖의 작은 가게에서 콩나물을 팔던 여자였다. 화제가 되었던 배경에는 27세라는 젊은 나이도 있지만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해외 유학파로서 경제학사 학위를 받은 조선 최고의 인텔리 여성이었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중국 회문학교에서 수학하고 1926년 유럽으로 유학을 갔다.

동아일보 1926년 7월23일자 기사로 이 여성은 이미 소개된 적이 있었다. 22세의 최영숙씨가 하얼빈에서 유럽 아시아 연결기차를 타고 동양인 최초로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는 기사였다. 유학의 이유는 비록 여성이지만 조국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일하고 싶다는 의지를 품고 그 먼 나라로 공부를 하러 갔다고 밝혔다. 몇 년 후에 스톡홀름 대학에서 정치경제사 학위를 받고 조선 최초의 여성 경제학사가 되어서 금의환향 했다고 한국 언론들은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의 현실은 그녀가 유럽에서 공부했던 경제학을 실천 할 수 있는 사회 여건이 되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니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생계를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급선무여서 그녀는 서대문 밖 교문동에 점포를 얻어서 콩나물장사를 하게 되었다.

1920년대는 세계 공항으로 인해서 경제가 아주 어려운 시기였으며 조선은 특히 일본의 강점기 시대였으니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했다. 그러니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힘든 상황인데 여성의 취업이란 기대할 수가 없는 사회였다.

최영숙씨는 5개국 언어를 구사하고 그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인텔리 여성이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없는 시대에 살다간 불운한 여성이었다. 1932년 5월호 ‘삼천리’ 잡지에 그녀에 대한 기사가 이렇게 실렸다. “배추, 미나리, 감자, 콩나물을 만지는 것이 당시의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 최영숙 양의 일상직업이 됐답니다.” 힘든 생활을 하면서 건강이 나빠진 그녀는 한국에 돌아 온지 5개월 후인 1932년 4월23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참으로 안타가운 사연이 아닐 수 없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뛰어난 능력의 한 여성이 시대를 잘못만나서 허망하게 사라진 사실이 참으로 가슴 아프게 여겨진다. 조선의 경제를 위해서 일하고 싶었던 최영숙씨는 콩나물 장사를 시작할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정당한 여성인권과 권리를 찾기 위해 사회운동을 펼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조선의 불운했던 한 여성엘리트의 일생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콩나물 안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황현숙(객원 칼럼니스트)
황현숙(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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