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의 우리詩論-11] 류인서의 구두 화분
[김필영의 우리詩論-11] 류인서의 구두 화분
  • 김필영(한국현대시인협회 사무총장)
  • 승인 2018.11.24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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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기억에 남는 시가 있다. 하지만 그런 시를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감동을 주는 시를 찾아내기란 짚단에서 바늘 찾기와 같을 수도 있다. 필자는 2014년 가을부터 감동시를 찾아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시를 찾아 감상 평론도 썼다. 다음은 그가 찾아낸 주옥같은 한국 현대시와 그의 평론이다. 본지는 해외한인사회의 우리 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김필영의 우리시론'이라는 타이틀로 시와 평을 소개한다.<편집자>

구두 화분
 
구두는 젖은 꽃들이 언 발로 들어가는 고해소가 아닌데
어느새 꽃에게 아랫목을 내어준 저이, 언 맨발 벗어들고 말없이 걸어가네
구두는 떨어진 꽃말 짓물러 풍기는 악취 가득한 백년 묵은 화분
미처 도착하지 못한 시린 발들이 남아있네
바람은 언제 구두코에 닿나, 냄새로 지름길을 찾는 꽃들
공기에 곁발을 내주며 티눈의 발가락 뽑아 거리에 던지며 구두 밖으로 달아나네
향기는 언제 꽃바닥에 닿나, 이 길목 꽃으로 가는 복도가 아니야
꽃 밖으로 달아나는 꽃들
시든 구둣발 아래 붉고 푸른 시즙으로 구두점을 찎으며
(류인서 시집, 『신호대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423> 96쪽. 구두화분)
  
“구두에 심긴 꽃, 조화와 균형의 아포리아”

꽃을 심는 화분의 선택에 학문적으로 정해진 모양과 재질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하나 화분에 따라 관상적 가치와 꽃의 수명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화분은 보수, 배수, 통기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유념하며 고르는 것이 좋은데, 요즘엔 소라모양, 찻잔 모양 등의 소품 형태로 만들어진 분도 있고, 조개나 자연석, 고사목 등을 활용하기도 한다. 헌데 ‘헌 구두’를 화분으로 사용한 풍경은 어떠한가? 류인서 시인이 시의 화원에 등장시킨 ‘구두 화분’과 그곳에 심긴 꽃의 조화와 균형을 들여다본다.

시의 화원을 들어서면, 첫 행에 화분으로 등장한 것은 황토로 빚어 수분과 공기를 자유롭게 숨 쉬는 황토분도 아닌, 물질문명을 따라 들어온 프라스틱분도 아닌 낯선 화분이 나타난다. ‘구두 화분’이다. 상식적으로 “구두는 젖은 꽃들이 언 발로 들어가는 고해소가”아니다. 헌 구두의 낡은 재봉선 틈새로 배수가 될 수도 있겠으나 방광도 없는 구두를 누가 화분으로 놓고 간 것일까? 시인인 화자는 ‘구두 화분’에 심긴 꽃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어느새 꽃에게 아랫목을 내어준”이를 찾는다. 꽃을 사러 왔다가 쓰레기통에 깨진 화분과 함께 버려진 화초를 본 것인지, 구두를 화분으로 제공하고 “언 맨발 벗어들고 말없이 걸어” 가는 존재를 환시적(幻視的)으로 이끌어내는 시안(詩眼)이 섬뜩하다.

여전히 화자는 꽃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 꽃의 향기나 이름에 오감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직‘구두’에 대한 주의를 시각과 청각에 더하여 특히 후각을 집중하여 악취 풍기는 화분에서 “미처 도착하지 못한 시린 발들이 남아있”음을 발견한다. 구두화분에서 풍기는 악취는, 구두를 신고 삶의 길을 달렸을 발 냄새가 아닌, 야간근무로 벗지 못한 노동의 땀 냄새가 아닌, 공기를 접촉하지 못한 무좀의 냄새가 아닌, “떨어진 꽃말 짓물러 풍기는 악취 가득한 백년 묵은 화분”임을 알려준다. 꽃이 심긴 곳에서 피어날 향기는 어디로 간 것인가?

중반을 넘어서는 행간에서 화자는 새로운 화두를 제시한다. 화분의 재질에 따른 분류로, 토기분이든, 도기분이든, 유약분이든, 자기분이든 꽃과 화분의 조화가 “구두 화분”보다 조화로운지를 논하지 않는다. 화분의 형태에 따라 원형분이든, 타원형분이든, 정사각분이든, 직사각분이든, 다각형분이든 “구두화분”보다 균형적인가를 논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행간에서는 꽃 스스로 “바람은 언제 구두코에 닿”는지를 탐색하며 “냄새로 지름길을 찾”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꽃이 바람을 찾는 것은 나비가 오는 방향을 감지하려 함일 수 있다. 호흡할 방향을 찾아 올바른 생존을 향한 몸부림일 수 있다.

구두에 갇힌 꽃이 호흡할 방향을 찾는 일은 탈출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명백하다. “공기에 곁발을 내주며 티눈의 발가락 뽑아 거리에 던지며 구두 밖으로 달아나”는 꽃들의 ‘구두탈출’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는 행렬이 연상된다. 배수구 없는 “구두 화분”에서는 뿌리가 숨을 쉴 수 없으며 썩어갈 것이다. 발가락에 티눈이 박이듯 뿌리도 굳어갈 것이다. 향기가 꽃바닥에 닿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꽃이 되려고 심긴 자리가‘구두 화분일 때, “꽃으로 가는 복도가 아”닐 때, “시든 구둣발 아래 붉고 푸른 시즙으로 구두점을 찍으며”, “꽃 밖으로 달아나는 꽃들”처럼 탈출할 것인가?

[필자 약력]
* 한국현대시인협회 사무총장(2017~8)
* 한국시문학문인회 차기회장(2019~2020)
* 시집 & 평론집: ‘나를 다리다’, ‘응’, ‘詩로 빚은 우리 한식’, ‘그대 가슴에 흐르는 시’
* SUN IL FCS(푸드서비스 디자인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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