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세신사 조씨
[이영승의 붓을 따라] 세신사 조씨
  • 이영승(영가경전연구회 회원)
  • 승인 2019.02.19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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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우나를 좋아한다. 거의 매주 불가마에 간다. 세신은 주로 내가 직접 하지만 피곤할 때는 가끔 세신사(때밀이)에게 의뢰한다. 동네 단골 불가마의 세신사는 몸이 깡마르고 말수가 적다. 친근하지도 않다. 게다가 혀가 짧은지 발음이 어눌해 잘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래서 가급적 말을 피한다. 그러나 세신 하나만은 누구 못지않게 잘 한다. 손님들은 그를 ‘조씨’ 혹은 ‘조씨 아저씨’라 부른다.

하루는 때를 다 민 후 서비스로 목과 어깨에 마사지까지 잠시 해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고향을 물어보았다. 연변에서 온 조선족이라고 했다. 묻지도 않는데 계속해서 나이는 60이며 성은 함안조씨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릴 적 부모님께서 함안조씨가 대단한 양반이라고 했는데 사실이냐?”고 내게 물었다.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다 조상 중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났을 것이라고 얼버무렸다.

다음번 목욕을 갔을 때 대기실에서 함안조씨 내력을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들어갔다. 지난번에는 갑자기 물어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말한 후 함안조씨 시조와 조상의 내력에 대해 간략히 얘기해줬다. 이어서 “명문가의 후예이니 자부심을 가지시라”고 했더니 너무 좋아했다. 세신도 더욱 성의껏 해줬다. 그래서 세신비가 1만 4천원인데 2만원을 주면서 잔돈은 커피라도 한잔 하라고 했다. 작은 인정에 감동받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던가? 오늘따라 손님이 없다며 옷을 갈아입는 내게 다가와 묻지도 않은 자기 신상 얘기를 술술 늘어놓았다.

“때밀이가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손님이 있는 날의 수입은 상당하다. 현 불가마의 세신 영업권을 보증금 2천만원에 매월 70만원 주고 있다. 강남은 이보다 훨씬 더 비싸다. 주말에는 손님이 많아 세신사를 한사람 더 쓴다. 일당은 20만원이고 식대는 별도다.”라고 했다. 나는 목욕탕의 때 미는 권리금이 이렇게 비싼 줄 몰랐으며, 세신사가 이토록 고임금을 받는 전문직인지도 처음 알았다.

다음에 갔을 때부터 나는 그를 ‘조사장’이라 불렀다. 그랬더니 좋아하는 모습이 얼굴에 역력했으며 더욱 정중하게 대했다. 비싼 권리금으로 영업권을 약정해 세신사까지 고용하고 있으니 사장이 분명하지 않은가? 어쩌면 내게 신상 얘기를 한 이유도 ‘내가 이런 사람이니 우습게보지 말라.’는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친근하지 않고 빈한한 때밀이로만 여겼던 ‘조씨’였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기 나이와 엇비슷해 보이는 일당 세신사에게 “손님한테 좀 더 친절하게 대하라”고 주의를 주는 등 사장으로서 사람을 다루는 면모가 너무도 당당했다. 뿐만 아니라 세태와 나라를 걱정하는 식견이 상당했으며 편견도 없었다. 긴 세월 머나먼 이국땅에서 온갖 풍파 다 겪으며 살아왔을 터인데도 혈연에 대한 관심은 물론 조국에 대한 애국심까지 엿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대할 때 그의 행색이나 직업만으로 선입견을 가지고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예외는 못된다. 만약 내가 조사장과 계속 대화 없이 지냈다면 그의 내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며, 호칭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조사장에게는 내가 가장 반가운 손님이 아닐까 싶다. 농담도 곧잘 한다. 나에게도 그는 사람을 대하는 인식에 깨달음을 준 고마운 사람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옛말은 참으로 지당한 것 같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수필문학추천작가회 이사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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