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38] 건축가 페이(貝)와 황태손 이구
[유주열의 동북아談說-38] 건축가 페이(貝)와 황태손 이구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5.27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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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베이징의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했다. 주말이면 서쪽 교외 황제의 수렵장이었다는 샹산(香山)에 자주 갔다. 도심에서 멀지 않는 곳에 역사와 자연이 공존한 곳으로 가을이면 아름다운 단풍으로 유명했다. 샹산 입구에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시구가 큰 돌에 새겨져 있었다. “서리 맞은 단풍은 2월의 꽃보다 더 붉다.(霜葉紅於二月花)” 두목이 이곳에 와보고 지은 것처럼 샹산의 불타는 단풍에 꼭 맞는 시였다.

샹산에는 아담하면서 자연과 잘 어울리는 호텔이 있었다. 샹산호텔(北京香山飯店)이다. 호텔의 메인 라운지 천정이 유리로 마감되어 자연채광이 들어오는 것이 특징이었다. 라운지를 지나면 산에서 내려 온 계곡물로 만들어진 연못이 나오고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객실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1982년 개관한 샹산호텔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이오 밍 페이(I.M. Pei 貝聿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페이는 상금 10만불 전액을 중국의 건축학도들에게 장학금으로 내 놓았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당시 중국 정부는 페이에게 베이징의 중심지에 존 핸콕 타워 같은 아름다운 유리 건물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는데 페이가 베이징의 고풍스러운 도시의 미관을 해친다고 도심에서 떨어진 샹산에 리조트형 호텔을 건축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의 한 사람인 이오 밍 페이가 지난 5월 16일 뉴욕에서 102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세계는 그를 애도했고 뉴욕타임스는 페이지 한 장을 할애하여 그의 생애를 보도하고 그의 업적을 기렸다.

페이는 1917년 4월 은행가의 아버지를 둔 광동성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페이 츠이(貝祖貽)는 중국은행의 광저우 지점장으로 근무 시 쑨원(孫文)정권의 미움을 받아 일시 가족과 함께 영국령인 홍콩으로 피신했다가 오해가 풀려 상하이 지점장으로 다시 발령을 받았다고 한다.

페이는 아버지를 따라 홍콩과 상하이에서 생활했다. 당시 상하이에서는 와이탄(外灘 Bund)을 중심으로 서양식 호텔이 건립되고 있었다. 페이는 25층 높이의 파크 호텔(國際飯店) 건축현장을 지나면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가림막의 작은 구멍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일본 건축계의 대부인 단게 겐조(丹下健三 1913-2005)도 동양의 파리라고 불렀던 상하이에서 유년생활을 보냈다. 단게는 스미토모(住友) 은행의 상하이 지점에 근무하는 아버지와 함께 상하이 생활을 하면서 어린 눈에 조계지의 서양건축에 매료됐다고 한다. 신주쿠우의 도쿄도청을 설계한 단게는 1987년 동양인으로 페이에 이어 두 번째로 프리츠커 상을 받았다.

상하이에서 고교과정을 이수한 페이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처음 입학한 대학이 펜실베이니아 대학(유펜)의 건축학과였다. 그는 고전적인 건축을 가르치는 유펜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모더니즘 건축 연구가 활발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으로 전학했다. 페이는 석사 과정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뉴욕의 도시 개발업자에게 스카우트되어 도시개발 관련 건축 업무에 종사하다가 1955년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설립했다.

페이는 대학시절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로부터 영향을 받고 바우하우스 교장을 역임한 발터 그로피우스를 사사하여 기하학적 정확성을 가진 콩크리트 유리 그리고 강철을 건축자재로 한 모더니즘적인 건축을 설계했다. 그의 작품 중에는 1989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의 요청으로 설계한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가 유명하다. 박물관 출입구의 유리 피라미드 계획은 많은 반대를 불러왔다. 르 몽드 지는 “디즈니랜드 별관”이라고 혹평을 했으나 지금은 파리를 상징하는 명소가 됐다.

페이가 어린 시절을 보낸 홍콩에도 그의 작품이 있다. 지상 70층으로 당시 아시아 최고의 고층 건물이었던 중국은행 타워 건물이다. 1990년 건립됐으며 5개의 철골 기둥에 의해 지지되는 유리 타워는 풍요의 상징인 대나무 형상이라고 한다. 중국은행은 주권이 반환되기 전 홍콩에서 중국을 상징하는 건물로 페이의 설계가 필요했다. 중국은행의 간부들은 페이의 아버지 츠이를 먼저 만나 설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이는 1997년 일본의 종교단체(神慈秀明會)의 요청으로 시가현에 미호 미술관을 건축했다. 미호 미술관은 30만평의 시라가키(信樂) 자연에 감추어져 긴 터널을 지나고 계곡을 이어 주는 구름다리를 건너야 만날 수 있다. 어두운 동굴을 지나 만나는 도연명(陶淵明)의 무릉도원 같은 미술관이다. 페이가 어린 시절 뛰놀던 쑤저우(蘇州)정원과 서양의 건축기술을 결합하여 자신의 상그리라(hidden paradise)를 만들어 낸 것이다.

페이는 대한제국의 황실과도 특별한 인연이 있다. 페이의 건축사무소가 설립된 다음 해인 1956년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여사의 외아들 황태손 이구(李玖 1931-2005)가 입사했다. MIT 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한 이구는 대학 선배이면서 동양인 페이를 존경하고 있었다.

갓 입사한 이구는 우연히 건축사무소 사내 게시판에서 자신이 원하는 아파트가 매물로 나와 있음을 알게 됐다. 찾아 간 아파트에서 줄리아 멀록(1923-2017)을 만나게 됐다. 줄리아는 이구보다 8살 연상의 우크라이나 이민자 가족 출신으로 뉴욕생활에 싫증을 느껴 스페인으로 이주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지만 나이와 인종을 극복 서로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됐다. 이구와 줄리아는 페이의 축하 속에 1959년 10월 뉴욕의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결혼했다.

이구는 하와이 대학의 동서문화센터 설계에 참여하는 등 페이의 신임을 받고 장래가 촉망되는 건축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63년 일본에 거주하던 양친이 귀국함에 따라 이구는 뉴욕 생활을 접고 줄리아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서 부모님을 모셨다. 이구는 서울대학교 등 국내 주요대학에서 건축학을 강의했다. 뇌출혈로 병원생활을 오래 한 영친왕이 1970년 별세하고 종친들과 신한항업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실패했다.

종친들의 강요에 의해 애기를 낳지 못하는 줄리아와 1982년 이혼한 이구는 1989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일본과 한국을 전전하면서 고독을 달래야 했다. 2005년 7월 자신이 태어 난 집의 정원에 건립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의 객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필자소개
한중투자교역협회(KOITAC) 자문대사, 한일협력위원회(KJCC) 사무총장. 전 한국외교협회(KCFR) 이사, 전 한국무역협회(KITA) 자문위원, 전 주나고야총영사, 전 주베이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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