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시가 있는 아침] 기수급고독원 - 이경림
[신지혜의 시가 있는 아침] 기수급고독원 - 이경림
  • 뉴욕=신지혜 시인
  • 승인 2019.08.23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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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림 시인
이경림 시인

기수급고독원

흘러가는 구름을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산비탈 공터에 홀로 울울한 팽나무를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우듬지 근처, 위태롭게 얹혀 있는 까치 둥지의 검고 성근 속을,
담장을 뒤덮은 개나리덩굴 아래 고양이처럼 앉아 있는 검은 줄무늬 돌멩이를,
엄동에 종일 생선 리어카에 붙어 서서 떨고 있는 반백의 저 사내를,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거두절미하면,
‘급 고독’
헐벗고 고독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는
이천년 전 어느 장자(長者)의 전설과는 상관없이
속으로 급히 꽂히는 말, 급 고독(孤獨)……
급! 고독(高獨). 

급전 쓰는 마음처럼 급(急)
쓸쓸,
쓸쓸함의 최고봉
쓸쓸함의 낭떠러지!

발치에 차이는 빈 깡통을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이녁으로 몸 들이밀기 무섭게 얼어붙은 저 빨간 장미를,
입 헤―벌리고 종일 똥 떨어지기 기다리는 창백한 저 변기를,
기수급고독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천지에 널린 고독 사이를 흘러다니다
급(給), 고독(孤獨)하여
급(急), 고독(高獨)이 된 그를, 나를, 

기수급수도원이라 불러도 좋겠습니까

노을이 벌겋게 산등성이를 먹어치우는 저녁은
고독을 나눠주기 알맞은 때
저녁이 이녁에게
급! 고독
전보라도 날리기 좋은 때
저녁의 장지문 안에서 한 그림자가 오래 먹을 갈아 천천히 쓰기를,

이녁은 비록 협개(挾塏)하나 천림(泉林)은 번울(繁鬱)하고 인벽(人壁)이 사방 구만리(九萬里)니 가히 고독(高獨)의 가람(伽藍)을 지을 만하지 않은가*

*기원정사(기수급고독원)의 건립 비화에서 빌려옴


이 시의 설법에 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보라, 가사를 걸친, 어떤 풍채 좋은 선사께서 바로 우리 앞에 좌정하고 계신 듯하다. 당신들은 이 기수급고독원에 지금 어떤 깨우침을 얻고자 찾아왔는지? ‘팽나무’, ‘까치 둥지’, ‘돌멩이들’, ‘반백의 사내를’, ‘빈 깡통을’, ‘장미를’, ‘변기를’, 이 기수급고독원의 풍경을 한눈에 받아 안는다. 
   
자, 찾아보라! 시 구절마다 선문답같은 화두가 숨어있고 법문이 고여있다. 그렇다. 여기가 바로 거기, 외로움으로 홀로 있음의 고독에 처한 모든 존재의 군상들이 모여있는 곳, 비록 삶의 진탕과 가파른 낭떠러지의 고독이지만, 그러나 이제 당신은 그 고독 너머, 높을 고의 급(急), 고독(高獨)을 서로가 또는 멀리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시인이 우리를 일깨운다.

이 시가 우리에게 번뜩이는 지혜를 전해준다. 우리는, 시인의 존재론적 사유와 예리한 성찰의 시적 공력과 함께, 저 높은 ‘홀로있음’에 고개를 끄떡이며, 저절로 두 손 포개어 합장하게 되고야 만다. 이제부턴 급! 고독이다.
 
이경림 시인은 1947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고, 1989년 『문학과비평』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토씨찾기』 『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상자들』 『내 몸 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급! 고독』, 엽편소설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산문집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시론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등이 있다. 지리산문학상 윤동주서시문학상 애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필자소개
《현대시학》으로 등단,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대상, 미주동포문학상, 미주시인문학상, 윤동주서시해외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세계 계관시인협회 U.P.L.I(United Poets Laureate International) 회원. 《뉴욕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보스톤코리아》 《뉴욕일보》 《뉴욕코리아》 《LA코리아》 및 다수 신문에 좋은 시를 고정칼럼으로 연재했다. 시집으로 『밑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도서>을 출간했다.

신지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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