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47] 이순신 장군 vs 넬슨 제독
[유주열의 동북아談說-47] 이순신 장군 vs 넬슨 제독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19.10.28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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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의 함선은 적선에 접근하고 있었다. 부관들은 함선이 적선과 가까워지자 제독이 적병에 노출될 것을 우려했다. 제독은 의연했다. 그때 총알이 날아왔다. 제독의 가슴에 총알이 박혔다. 제독은 쓰러졌다. 제독은 자신의 얼굴과 군복을 덮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제독은 숨을 거두었다.

1598년 12월26일 노량해전에서 왜병의 저격을 받고 쓰러진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아니다. 1805년 10월21일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영국의 넬슨 제독 최후의 장면이다. 해전에 앞서 기함 빅토리호에 ‘영국은 제군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길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는 넬슨 제독의 독전 깃발이 유명하다.

동서양 해전사에 불멸의 두 영웅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넬슨(1758-1805) 제독은 총알이 날아오는 적선과의 근접전에서 용감하게 진두지휘하다 전사했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이순신 장군이, 런던의 트래펄가 광장에는 넬슨 제독이 동상으로 남아있다.

1592년(임진년) 8월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거둔 한산도의 학익진(鶴翼陣) 기록은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일기에도 남아있다. 그는 용인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한산도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에 크게 패배했다. 야스하루는 군량이 없어 13일간 미역 등 해초로 연명하면서 무인도로 떠돌다가 뗏목으로 겨우 탈출했다. 학익전은 학의 양 날개로 감싸듯 유효 사거리 안에 적을 최대한 집어넣어 포격 괴멸시키는 전법이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일본 해군성은 러시아 발트 함대와 싸울 제독으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를 임명한다. 그는 초급 장교 시절 영국을 포함 각국의 해전사를 연구한 경험이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시 조선 수군과 싸운 일본 수군의 기록물을 열심히 읽었다. 도고 제독은 일본 전사에 이순신 장군이 수없이 등장하면서 그의 빼어난 전술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한산도 해전의 학익진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1905년 5월 러시아 발트 함대는 영국의 불허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대서양을 남하하여 희망봉을 돌고 인도양을 거쳐 대한해협으로 들어왔다. 진해만에 대기 중이던 도고 제독의 연합함대는 일직선으로 진입하는 러시아 함대를 학익진으로 감싸 포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러일전쟁의 변곡점이 된 쓰시마 해전이었다.

쓰시마 해전을 승리로 이끈 도고 제독은 ‘동방의 넬슨(The Nelson of the East)’으로 칭송을 받았다. 도고 제독은 자신을 넬슨 제독에 비교될 수 있지만,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는 비교될 수 없다면서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스승이라고 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임에도 불구하고 도고 제독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을 감추지 않고 군신(軍神)으로 예우했다.

호레이쇼 넬슨은 영국의 시골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외삼촌의 도움으로 해군 사관이 되고 서인도제도의 영국 식민지에서 근무하면서 그곳에서 결혼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영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에 돌입하자 넬슨은 동맹국 나폴리 왕국을 방문 영국의 지중해 함대 지원을 요청했다.

시칠리아 등 이탈리아반도의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는 프랑스를 의식하여 넬슨의 요청에 소극적이었다. 당시 나폴리 주재 영국 대사 해밀턴경의 젊은 부인 엠마는 나폴리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엠마 부인은 나폴리 왕국의 마리아 왕비를 움직여 넬슨의 요청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의 딸로 루이 16세와 함께 프랑스 혁명으로 희생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언니였다. 1793년 10월 넬슨은 나폴리 왕국의 지원으로 프랑스와 첫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 후 넬슨은 코르시카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고 산타크루스 전투에서 다시 한쪽 팔에 부상을 입고 절단한다. 그가 1798년 8월 영국의 인도 지배를 견제하려는 나폴레옹 군대와 나일강 전투에서는 한쪽 눈과 한쪽 팔을 잃은 상황이었지만 대승을 거두었다. 나일강 전투를 치르고 귀국하는 길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가 나폴리 왕국을 침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넬슨 제독은 배를 돌려 나폴리로 향했다.

5년 전 나폴리 왕국의 지원에 대한 보답과 자신을 도와준 엠마 부인과의 재회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넬슨 제독과 엠마 부인의 재회는 두 사람을 사랑에 빠지게 했다. 엠마 부인은 해밀톤 대사를 버리고 넬슨 제독과 함께 귀국하여 런던 교외에서 동거에 들어갔다.

두 사람의 혼외 스캔들은 영국을 흔들었지만, 영웅 넬슨에 대한 국민의 기대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넬슨 제독은 이에 화답하듯이 1801년 코펜하겐 해전에서는 전세 불리로 퇴각하라는 지휘부의 명령을 어기고 전투를 승리를 이끌어 영국 국민을 열광시켰다.

1805년 넬슨 제독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지브롤터 인근의 트라팔가르에서 마주쳤다.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영국 침공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넬슨 제독은 27척의 함대를 2열로 만들어 일직선으로 전진하는 33척의 연합함대의 중앙을 뚫고 직각으로 돌입했다. 이른바 ‘넬슨 터치’라는 전법이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적을 궤멸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넬슨은 ‘넬슨 터치’ 전법으로 전 유럽이 놀랄만한 대승리를 거두었다. 적의 총구에 노출된 넬슨은 이 해전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다. 47세의 나이로 자신을 사랑하여 가정을 버린 엠마 부인이 기다리는 런던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의 시체는 코냑 브랜디 통에 담겨 런던으로 돌아왔다.

필자소개
한중투자교역협회(KOITAC) 자문대사, 한일협력위원회(KJCC) 사무총장. 전 한국외교협회(KCFR) 이사, 전 한국무역협회(KITA) 자문위원, 전 주나고야총영사, 전 주베이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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