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희의 음악여행 ⑦] 투명한 가을 강변에서 만난 ‘오르골’
[홍미희의 음악여행 ⑦] 투명한 가을 강변에서 만난 ‘오르골’
  • 홍미희 기자
  • 승인 2019.11.02 0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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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6일 가을,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끼리 소풍을 가기로 한 날이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강화도의 일몰을 보자며 강변으로 들어서는데, 차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이 가는 사람이 중요하지”라며 가평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단풍을 기대하며 창밖을 보지만 밖에 보이는 산들은 아직은 힘없이 푸르다. 어느 정도 서울을 벗어나자 옆으로는 북한강이 흐르고, 공기는 청명해지면서 산의 위쪽에도 조금씩 노랗게 단풍이 입혀지기 시작한다.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라 경치 좋은 곳에서 차나 한잔하자고 계속 주변을 보며 가다보니 왼쪽 옆으로 ‘쁘띠 프랑스’라는 곳이 보인다. 언뜻 보이는 예쁜 건물들이 잠시 시간을 내서 사진도 찍고 산책하기에 좋은 곳인 듯하다. 그렇지만 막상 들어가려 하니 입장료가 있어 의견이 분분하다. 그때 일행 중 한 명이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생각을 하자”고 한다. 다들 좋다며 들어가 보니 밖에서 집 몇 채만 있는 것처럼 보인 것과는 달리 이런 저런 볼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밖에서 보이던 조그만 집들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테마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입구의 왼쪽에는 생떽쥐베리가 사랑한 어린왕자가, 오른쪽에는 오르골 연주관이, 광장에서는 공연을 하고, 그 옆에는 이벤트관. 앞에는 작은 에펠탑... 이외에도 30가지가 넘는 많은 테마들이 줄지어 있다. 그리고 요즘 관광지에서는 아주 중요해진 사진이 잘 나오는 포인트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어. 들어오길 잘했네...” 오르골 연주관을 보니 입구에 공연 시간이 적혀있다. 제일 가까운 공연시간은 4시35분.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앞의 어린왕자 건물에 들어가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다 보니 벌써 시작시간이 지나 있다. 재빨리 갔는데 뭔가 이상하다. 입구가 막혀있다. 의외로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다. 공연장은 3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규모로 이미 좌석은 꽉 차고 입구까지 사람들로 막혀있다. 살살 들어가 보니 이미 공연은 시작되었다. 작은 무대에는 크고 작은 오르골이 놓여있고 진행하는 분이 손에 흰 장갑을 끼고 설명하고 있다.

사진=쁘띠프랑스 홈페이지
사진=쁘띠프랑스 홈페이지

진행자가 설명하고 있는 오르골은 실린더형 오르골이다. 진행자는 “이 오르골은 실린더에 핀이 박혀져 있고 50초정도 재생이 가능합니다. 이 시대의 오르골은 오직 수작업으로만 만들어져 제작기간만 1년 정도가 소요됐습니다. 또 당시 집 한 채의 가격으로 매우 고가의 악기였습니다.” 하자 여기저기서 “와~”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귀족들만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오르골은 18세기경 스위스에서 만들어졌는데,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스위스의 정밀한 시계산업이 있어서 가능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실린더가 돌면서 핀과 막대기가 정확한 지점에서 만나야 정확한 음정과 박자가 연주되기 때문이다.

실린더형 오르골은 손잡이를 돌리거나 태엽을 감으면 실린더에 박힌 핀이 옆에 있는 쇠막대기와 부딪히며 소리가 난다. 투쓰는 말 그대로 이빨처럼 생긴 쇠막대기인데 짧은 막대기에서는 높은 음이, 긴 막대기에서는 낮은 음이 울린다. 또, 오르골의 크기가 클수록 큰 소리가 나고, 막대기의 수가 많을수록 음역이 넓어져 다양한 음을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오르골은 실린더의 핀과 투쓰가 부딪히는 금속의 소리에 박스의 나무통에서 울리는 소리가 합쳐져 오르골 특유의 맑고 영롱한 소리가 낸다. 그런데 실린더형 오르골의 가장 큰 단점은 단지 한 곡만 연주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린더형 오르골의 내부(왼쪽),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던 오르골
실린더형 오르골의 내부(왼쪽),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던 오르골

이러한 단점은 18세기 산업혁명을 지나 19세기 독일에서 원판 즉, 지금의 LP판처럼 생긴 악보, 디스크를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해결되었다. 원판을 많이 만들어 여러 개를 사용하며 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곡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일부의 계층만 소유할 수 있었던 오르골은 가격이 저렴해져서 일반 가정에서도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진행자는 당시 가정에서 사용되던 오르골을 보여주면서 연주하기 전 눈을 감고 감상하라고 한다. 곡이 끝나자 “이 곡은 ‘천사의 소리’라는 자장가였습니다. 잘 주무셨나요?” 센스 있는 진행자다.

그리고 이번에는 공장에서 만들어낸 커다란 원판형 디스크를 꺼내 보인다. 이렇게 큰 디스크를 넣어야 하니 오르골도 크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 장식장만한 크기이다. 진행자는 “이렇게 큰 디스크는 어디에 보관했을까요?”라고 질문한다. 다들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오르골 아래의 장을 열어 보인다. 그곳에는 지름이 60cm 정도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디스크가 20개 정도 보관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이 많은 매장에서 연주하던 오르골로 소리가 매우 큽니다”라고 설명한다. 곡을 들려주는데 의외로 커다란 소리에 사람들이 또 한 번 놀란다. 정말 매장에서 쓰는 것이 가능했겠다.

오르골은 시계, 장식품, 장난감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어졌다. 오른쪽은 커다란 매장에서 연주되던 큰 오르골, 아래 부분의 캐비넷에 원판모양의 디스크를 보관한다.
오르골은 시계, 장식품, 장난감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어졌다. 오른쪽은 커다란 매장에서 연주되던 큰 오르골, 아래 부분의 캐비넷에 원판모양의 디스크를 보관한다.

곡이 끝나자 이번에는 종이에 구멍을 내어 만든 악보를 보여준다. 진행자는 “이것은 풀피리의 원리를 생각하면 됩니다”라며, 곡에 맞춰 박수를 치라고 유도한 후 천천히 오르골의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한다. 우리의 귀에도 익숙한 스콧조플린의 ‘엔터테이너’이다. 처음에는 느리게 돌리다가 점점 빨리 돌리자 곡도 따라서 빨라진다. “아직도 유럽의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형태의 스탠딩 오르골입니다. 원래는 종이악보를 사용했지만 훼손이 심해 지금은 필름지로 만들어서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웃고 있지만 사실은 힘이 2배로 많이 듭니다.”

진행자는 연주가 끝났음을 알리고 사람들은 밖으로 나간다. 조용해진 연주실 안에서 스탠딩 오르골, 유럽의 거리에서 악사들이 연주하는 악기를 생각하자 떠오르는 곡이 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의 마지막곡인 제 24곡 ‘거리의 악사’이다. 이 곡의 원제는 ‘Der Leiermann’이다. 여기서 라이어만은 라이어를 연주하는 사람이다. 라이어는 우리말로 손풍금이라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손으로 돌리면 음악이 나오는 악기이다. 가곡 ‘겨울나그네’의 마지막 풍경은 쓸쓸하다. 라이어를 돌리며 연주하는 늙은이. 그 앞에는 빈 접시가 있고, 사람하나 없는 주변에는 개들만 몇 마리 어슬렁거린다. 힘없는 노인이 돌리고 있는 라이어의 박자 역시 빠를 리 없다. 추운 날씨, 부는 바람, 나이든 노인, 떠돌이 개, 이런 겨울의 풍경을 묘사한 ‘거리의 악사’는 멜로디도 움직임이 없이 단조롭다. 반주 역시 화려함은 배제되고 단선율의 멜로디로 연주되다가 가끔 거칠고 투박하게 탁! 탁! 화음을 연주한다. 반주와 주고받는 노래의 선율 역시 쓸쓸하게 연주되다가 점점 힘없이 사라진다. 생각해보니 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못 듣고 끊어버릴 때가 많았다. 젊었을 때는 단조로운 선율이 지루했고, 나이든 지금은 마지막의 외로움이 온 몸으로 느껴져서 끝까지 듣고 있는 것이 괴롭다. 슈베르트는 31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런 인생의 쓸쓸함을 어떻게 알고 표현했을까 싶다.

축음기, 거리의 악사
축음기, 거리의 악사

그런데 이 오르골 사업은 80년 정도 지나서 막을 내리게 된다. 이유는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 때문이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 것이 1877년 이었는데 실제 납관식 축음기가 만들어진 것은 10년 후인 1887년의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콧조플린의 ‘엔터테이너’는 1900년 초에 만들어진 곡이다. 그리고 슈베르트는 1828년 사망했다. 오르골의 전성시대는 1800년대였구나 혼자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듯 했던 오르골은 월남전이 일어나면서 미군들의 향수를 달래기 위한 물건으로 인기를 모으게 되어 다시 현재에 이르게 된다. 청명하고 아름다운 오르골의 소리처럼 가을 소풍은 맑고 즐거웠다. 길에서 만난 시작되는 단풍도, 맑은 공기도, 같이 간 사람들도, 함께 먹은 음식까지 모든 것이 감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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