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새로운 시간여행을 시작하면서
[해외기고] 새로운 시간여행을 시작하면서
  • 황현숙(객원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2.17 16: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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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에 썼던 칼럼이 컴퓨터 데스크톱에 아직도 남겨져 있다. 나는 칼럼을 쓰는 동안에는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바탕화면에 임시저장을 해놓고, 글이 신문에 실린 후에는 파일을 따로 만들어서 저장한다. 그런데 2019년 12월의 칼럼을 쓰는 이 순간에 작년에 썼던 칼럼이 바탕화면의 아랫부분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시간의 흐름을 알면서도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았을 거라는 생각으로 다른 파일에 옮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자레인지에서 2분 정도 음식을 데우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꽤 길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올 한 해 동안 내가 살았던 시간은 365일(일 년의 시간)×24시간(하루의 시간)×60분(한 시간의 분량)= 525,600분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2분은 정말 찰나의 시간일 뿐이다. 그런데 2분의 기다림은 더디게 느껴지고 엄청난 숫자의 분 시간은 참으로 빨리 지나갔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가는 시간여행을 하며 미래를 향해서 달려가는 마음이 급해지기 때문일까. 어느새 새로운 시간여행을 시작해야 하는 올해의 끝자락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

작년 12월에 썼던 칼럼 ‘또 한 해가 저물어 가네요.’에 이런 문장이 써진 것을 보았다.

“오늘은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기쁨과 희망을 그리고 내일은 손가락 두 마디만큼의 행복을 지니며 살고 싶은 욕심을 부려보기도 한다.” 과연 올 한해를 나는 그렇게 살아왔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진다. 자꾸만 늘어지는 몸과 마음에 나이 탓이라는 변명을 붙이며 혼자서 위로하고 스스로 위로받는 생활을 해온 것은 아닐지.

그리스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주어진 현재 상황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현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겸손함이 필요할 듯싶다.

두 달 넘게 이어지는 산불뉴스로 마음이 매우 아프다. 꺼지지 않는 뜨거운 열기는 그동안 자연이 받은 상처를 치료해달라는 비명처럼 들린다. 하얀 재가 날아와서 베란다에 쌓이기도 한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솟아오른 빌딩들의 모습이 재난 같고, 숨쉬기 답답한 내 가슴은 기침을 쏟아낸다. 나무에 매달려 불에 탄 코알라의 모습을 보는 것도 아프고, 활활 타오르는 붉은 불길 옆에서 지치고 절망한 모습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소방 구조대원들의 모습도 너무 아프다. 인제 그만 인간들을 용서하고 억수 같은 세찬 비를 내려서 저 뜨거운 불길을 꺼지게 해달라고 신에게 조르고 있다.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 적이 있었다. 그리움을 담고 하늘 위에서 내려다본 땅은 콘크리트 건물로 빼곡하니 채워져서 산의 숨통을 짓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은 틈이라도 있어야 산과 땅이 숨을 내쉬며 살아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불도저로 밀어낸 나무와 흙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당연한 자연의 품인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의 어리석음을 보았다.

지난 두어 달 동안 호주의 맑고 파란 하늘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하얀 뭉실 구름도 흐릿하게 힘이 다 빠진 듯 천천히 흘러간다. 2019년의 마지막 달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묘한 날씨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며 한여름 속의 크리스마스를 다시 맞이한다. 양면성을 지닌 채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사와 날씨는 닮아 있는 것 같다. 아쉬움과 혼란이 뒤섞인 감정의 미묘함 속에서 뒤를 돌아보고 또 보아도 크게 달라진 것 없는 한 해였지만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고 위로하며 마무리를 하고 싶다. “새해에는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게 해주소서.” 하는 희망 사항도, 지켜야 할 스스로와의 약속도 이제는 하지 않는다. 그냥 건강을 지킬 수만 있다면 좋겠다.

작년 부활 시기 무렵에 급성 기관지염으로 병원에 일주일간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창밖으로 바깥을 내려다보면서 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부러워했었다. 내가 퇴원만 하면 저 사람들처럼 마음껏 걸어 다니고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실컷 먹어야지. 그리고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고 걸어 다닐 만큼의 건강이 허락된다면 무조건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없었던 그 일들을 올해에 해보았다. 그저 감사하고 감사해서 감히 다른 바람을 가질 수 없을 만큼.

‘언어의 온도’라는 책에 사람, 사랑, 삶 세 가지의 유사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이라고.”

내년에는 이 세 가지의 유사성을 좀 더 실감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만약에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든다면 다시 시작해서 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도 좋겠다. 드라마 속의 마술 같은 일이 나에게도 생길 수 있다는 꿈 정도는 꾸어도 좋지 않을까. 동전의 양면 같은 일은 일상에서 늘 일어나니까 실망할 필요도 없고, 다시 높이 던져서 뒤집으면 되니 실망할 필요도 없다. 에스키모 속담에 “어제는 재이고, 내일은 나무이다. 오직 오늘만이 밝게 타오르는 불이다”라는 말이 있다. 과거도 있지만, 현재에 충실하게 살다 보면 빛나는 내일이 기다릴 거라는 암시를 던져준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 올 한해에도 “참 애썼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위로의 인사말을 전하고 싶다.

황현숙(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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