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칼럼] 우리는 ‘사람’이다
[대림칼럼] 우리는 ‘사람’이다
  • 전은주(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20.03.02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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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소설가나 시인이 어떤 존재일까? 문혁시절 사람들에게는 등급이 있었다. 군인과 노동자, 농민은 상위를 차지하고 예술가는 일곱째였고, 지식인과 교수는 ‘고린내 나는’ 아홉째였다. 그것은 ‘혁명 전사’로서의 쓰임새라는 ‘조건’에서였다. 

소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하고 머리를 흔들면 잊어버리는 감정이나, 쉽게 지워버려도 되는 껄렁한 생각이나 부질없는 행동을 말하고, 시인은 금새 사라져 버리는 노을에서 느끼는 사람들의 외로움이나, 흐린 날에 내리는 빗줄기와 삶의 고통이나, 잘난 사람들이 행하는 멸시에 찬 표정과 몸짓에 아파하는 못난 사람들의 절망이나, 가버린 친구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들을 말한다. 그래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하찮은 이야기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이라는 ‘조건’에서 말하는 ‘사람 이야기’이다.

요즈음 세태 이야기를 좀 하자! 코로나19에 대한 소식이 실시간 특집으로 방송사 뉴스 화면마다 마치 스포츠 경기의 스코어 보드처럼 숫자(數字)가 나열된다. 확진자 몇 명, 사망자 몇 명, 완치자 몇 명, 현재 한국은 몇 명, 일본은 몇 명, 중국은 몇 명, 그리고 순위는 몇 등…

시청자의 눈길이 가장 먼저 숫자에 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북새통 속에서도 숫자는 냉정한 객관만 드러낸다. 내가 거주하는 나라, 또는 그 지역의 확진자 수의 표기에 따라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아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 또는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일본은 크루즈호의 감염자들을 처음에는 자국의 확진자 수에 포함했다가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입항을 거부시키고 통계에서 자국과 분리했다. 그것이 올림픽 개최와도 연관된 중요한 지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정부가 감염자 수를 축소하기 위해 검사 대상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한국의 경우 그 숫자는 ‘신천지’ 사이비 종교를 대중에게 알리는 지표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곧 다가오는 총선과 맞물려 상대를 헐뜯는 조건으로도 활용되기도 했다. 

대체 그들은 어떤 ‘조건’에서 그 숫자를 활용할까? 공포나 두려움은 우리의 정신을 한 가지 생각만 하도록 편집시킨다. 숫자가 말하는 그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숫자에 집중하게 하고, 확대 재생산하고 격렬하게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정부나 구호반을 공격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현재 일어나는 사태를 객관적으로 알리기 위하여 숫자를 공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종바이러스 같은 재난 앞에서, 국가는 응당 더 적극적으로 구체적으로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여, 국민 스스로가 ‘방역의 주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해야 한다. 그 숫자들은 국민에게 두려움이나 공포감을 주는 것보다는 국민이 지녀야 할 경각심, 연대의식에 방점을 두어야 하지만 그것을 비난하는 쪽에서는 그것을 이용하기도 한다. 

2015년, 메르스가 한국사회를 강타했던 시절, 그 당시 박근혜정부가 비난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공표한 숫자들이 아주 교묘하게 ‘사람’을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들은 사망자 소식을 전할 때 마다 만성질환자나 고령이라는 정보에 방점을 두었고, 정부가 발표한 공식 문서에도, “사망자 중 고령이나 만성질환자가 90%가 넘는다” 같은 사실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니까, 원래 아프거나 또 언제 사망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90%였으니, 어차피 곧 죽을 존재(사람이 아니라)들이었다는 숨은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 경우 그들이 의도하는 방향에 따라 자신이 그 속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었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 나와 관계가 없을 경우에 불구경하듯 동정하고 불쌍하게 여기면서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는지도 모른다. 

최근 한국의 코로나19 뉴스는 숫자에서 사람의 이야기로 바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두 번째 사망자 B씨는 폐렴 증세로 부산대병원에 후송된 뒤 숨졌다. 10여년 동안 청도대남병원(정신병원)에 갇혀 있다가 병 때문에 처음 폐쇄병동 밖으로 나왔다고 알려졌다. 병원을 나설 때, 바깥에 나가니 기분이 너무 좋다. 빨리 갖다 오겠다고 했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어쩌면 언론이 2015년처럼 ‘정신병동에 10년 머물렀던 만성질환자 1명 사망’에 방점을 두었다면, 그 숫자 뒤에 은닉되어 10년 만에 처음 병원을 나서는 그 환자의 ‘하늘을 나를 것 같은 홀가분함’이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십여 년을 갇혀 살며 바깥세상을 동경하던 이름 모를 한 사람의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코로나로 인하여 열흘 정도 집에서 두문불출하는 것도 이렇게 갑갑한데, 그 사람은 어떻게 폐쇄병동에서 10여년을 살았을까? 그 ‘사람의 답답한 일생’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 순간, 2,000명 중의 확진자 1명이 아닌, 한 사람이 느껴졌다. 숫자를 읽을 때 우리가 가졌던 냉랭한 마음이 문득 부끄러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도 곧바로 사라지고 다시 숨 가쁘게 숫자가 재빠르게 도약을 한다. 한국의 경우 2월28일, 571명으로 환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중국 다음으로 환자가 많다는 식으로 바뀐다. 그것은 얼핏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 때문처럼 보인다. 그것은 28일, 대통령이 국회에 가서 환자가 많은 경북·대구 시민들을 위로할 계획을 발표하고, 특별지구로 지정하여 그들의 아픔을, ‘사람’인 그들의 고통이나 절망을 함께 하고자 하는 특별계획을 발표하면서, 그곳의 ‘사람이 먼저’임을,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알리는 순간 이후에 일어났다. 야당은 중국과 왕래를 금지해야 하고, 정부의 방역 대책이 처음부터 잘못이었으며, 장관을 경질해야 한다는 등 ‘강력한 비난’을 시작했다. 그들은 눈 똑바로 뜨고 자신들이 방역을 다 맡은 듯이, 방역원이나 의사가 과로로 숨지고, 하루에 한 시간밖에 잠들지 못하고, 피를 말리며 질병과 사력을 다해 싸우는 ‘사람들’을, 손님이 없어 칼국수 재료 300인분이 남아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가 순식간에 팔아주고, 저금통을 비워 자발적으로 헌금을 내기 시작하는 그런 ‘사람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마스크 사고 또 사려고 박 터지게 줄을 서고, 마스크를 확보하려고 엄청나게 몰려드는 이기심을 고발하는 영상을 보내 그 여리디 여린 ‘사람들’을 힐난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환자의 숫자를 보라! 사망자 숫자를 보라! 신천지 교인과 교육생의 숫자를 보라! 정부는 이 숫자를 어떻게 줄일 것이냐! 소리치고 호통치며, ‘사람’을 향해 가려는 국민의 관심을 숫자에다 다시 묶고 매듭을 조여 맸다.

공포나 조작에 의해 숫자 뒤에 사람이 있음을 망각하기 쉽다. 미국 독감으로 만 명으로 죽었는데 뭔 호들갑이냐는 식의 뉴스나, 중국의 연평균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10만 명인데 코로나 사망자 수는 2천명밖에 안된다거나 하는 형식을 취한다. ‘세월호’ 때 학생들의 죽음을 교통사고 숫자로 비교하면서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는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숫자에 따라서 갑자기 큰일이 별것 아닌 일이 된다. 그 사망자 중에 가족이 들어있거나 애인이 들어있다면 아마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코로나를 처음 세상에 알렸던 무한병원의 이원량 의사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는 것 역시 의사 1명의 사망이 아닌 義人 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했기 때문이다.

카뮈는 소설 『페스트』(흑사병)에 이런 한 단락을 남겼다. “사망자가 일만명이라면 커다란 영화관을 가득 채운 관중의 다섯 곱이다. 극장 다섯 군데에서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그들을 시내의 큰 광장으로 데리고 간 다음 모두 죽여서 무더기로 쌓아 놓는다. 그 시체 더미 위에 가장 낯익은 사람들의 얼굴을 올려는다.”

우리도 카뮈처럼 만 명위에 가족의 시체를 올려 숫자들을 사람으로 ‘환원’시킬 필요가 있다. 코로나 19의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 2,000여명을, 내 가족, 친구, 이웃, 동료와 모든 아는 얼굴들을 합치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연민을 느끼게 될지도, 더 이상 그 숫자들이 단순한 통계만으로 끝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그 숫자들은 살아 움직이는 사람으로 환원해야 된다. 어쩌면 실제로 지금 무한에 사는 누군가는 가족과 친구를 함께 잃어버린 아픔에 지독하게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숫자와 우리가 멀리서 경험하는 숫자는 분명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다. 그 숫자 모두가 사람이다! 이것은 변함없다. 

이 사태는 머지않아 몇 명의 사망자를 내었다는 통계와 함께 종식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뉴스를 보며 숫자를 확인하고 일상으로 복귀할 것이다. 다시 어떤 ‘조건’에 내 던져진 채 어느 순간에는 그 숫자들조차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아니, 숫자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기록해야 한다. 아니, 기록할 것이다. 소설가들은 소설로, 수필가들은 수필로, 시인은 시로! 작가들은 우리가 쉽게 넘어가 버리고, 잊고, 무시해 버리는 일들을 다시 우리에게 일깨워 우리를 ‘사람’으로 되돌아가게 하리라 믿는다. 아니, 그것이 작가들의 사명이다. 그것을 작가들이 일깨워 우리를 ‘사람인 우리’로 되돌아오게 해야 한다.

소설가 김훈은 “6.25로 인해 이산가족 70만 명이 발생했다”는 통계보다 소설가 박완서의 작품 한 편을 읽는 것이 더 동족상잔의 비극을 느껴지게 한다고 했다. 문학은 역사와 사회가 낳은 굵직한 사건들 속에서 사라져간 사람들을, 그 속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조명하고 독자가 인물에 감정이입하게 하여 사건을 통해 인식을 전환하게 하는 일을 돕는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 전환을 통해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역사가 숫자를 기록하더라도 문학은 사람을 기록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사람이며, 우리가 사람끼리 산다는 것을, 그것을 통해 우리의 인식의 전환을 반드시 해야 한다.

필자소개
전은주: 연변대학교 문학석사, 연세대학교 문학박사, 현재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객원연구원, 2008년 계간 ‘창작21’ 시인 등단, 연변작가협회 회원,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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