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촌만필] 삼전도 비문(碑文)을 보며 광해를 생각하다
[선비촌만필] 삼전도 비문(碑文)을 보며 광해를 생각하다
  • 김도 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
  • 승인 2020.04.0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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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에 세워진 삼전도 비
잠실에 세워진 삼전도 비

귀양살이 14년째 되는 1637년 봄,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제주에서 관노(官奴)로부터 전해 들은 비극적인 삼전도(三田渡) 소식에 광해는 망연자실했다.

군왕이었던 그가 죄인이 되어 구차하게 동물적 생존을 이어가면서 온갖 학대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폐군(廢君) 광해가 삼전도 소식에는 악몽에서 깬 듯 하늘을 쳐다보며 울부짖었다고 야사는 전하고 있다.

그런 분노의 대상이 침략자 청 태종에 대한 저주였을까? 아니면 인조와 조선 조정의 무능, 또는 당쟁에 몰두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한탄이었을까? 나는 잠실 석촌호 옆에 서 있는 삼전도비(大淸皇帝頌德碑)를 볼 때마다 이런 상념에 잠기곤 한다.

17세기로 접어들자 중원의 패권질서는 요동치고 있었다. 갈수록 강성해져 요동을 장악한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말기적 증상에 신음하던 명(明)을 공격했다. 다급한 명은 조선에 임진왜란 때의 은혜를 갚으라며 지원군을 요청해 왔지만 명과 후금(後金)의 패권전쟁으로 조선의 지정학적 위기는 커가고 있을 때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수습하던 광해는 급변하는 대륙의 정세를 살피며 후금의 기세(氣勢)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숭명(崇明) 사대주의에 물든 사대부들의 의리론(義理論)과 명의 계속되는 압박으로 강홍립을 도원수로 한 1만의 지원병을 명에 파병하게 됐다. 광해는 강홍립에게 “어쩔 수 없어 명을 돕는 것이니 후금의 동정을 살펴 함부로 이기려 하지 말고 때를 보아 조선의 입장을 후금에 설득하라”는 은밀한 지령을 내렸다.

결국 강홍립은 부차 전투에서 패하자 후금에 투항하여 ‘후금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광해의 속뜻을 전했다. 이렇게 망해가던 명과 새롭게 일어나는 후금 사이에서 현실적인 중립, 실리외교를 구사함으로써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반정(반正)으로 집권한 인조와 반정 세력들은 급변하는 대륙의 정세를 외면한 채 노골적인 숭명사대와 오랑케론으로 청(淸)을 자극, 정묘, 병자양란을 자초하여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나락으로 빠뜨리고 말았다. 

청의 강요에 의해 세우게 된 삼전도 비문에는 광해가 우려했던 공허한 명분론의 혹독한 대가(代價)가 어떤 것인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1637년 11월, 삼전도(지금의 잠실)에 세워진 「대청황제 송덕비」 비문에는

“조선이 미욱하여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귀순하니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했다.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군사를 거두었으니
모든 사람이 노래하고 칭송했다.
임금이 살게 된 것은 황제의 은혜 덕분이며
황제께서 우리 백성을 살리시려고 군사를 돌리셨다.
만년토록 황제의 덕이 조선에 빛날 것”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급박하게 돌아가던 주변정세를 읽으면서 조선의 생존전략에 골몰하다 폐군이 된 광해가 삼전도 비문을 보았다면 숭명 의리론에 함몰된 인조와 조정 신료들의 몽매함은 물론 파당정치에 매몰됐던 광해 자신의 과오를 한탄하지 않았을까?

임진왜란 때 왜군이 문경새재를 돌파하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황급히 몽진을 떠나 평양성에 도착했을 때 17세의 광해를 세자로 책봉했다. 위급한 전시라 영변에서는 조정을 나누는 분조(分朝)까지 단행했다.

조선 초유의 분조를 이끈 광해는 의병을 모으고 백성을 선무(宣撫)하는 등 전시체제에 군왕이 해야 할 책무를 전장(戰場)에서 직접 수행했던 세자였다. 외침(外侵)의 위기를 실감했던 광해로서 중립, 실리외교를 펼치며 후금의 의심(疑心)을 막아보고자 노심초사했던 그가 굴욕적인 병자호란의 참상을 유배지에서 듣고 실성(失性)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전쟁의 역사에서 피할 수 없는 일방적인 전쟁이 많았다지만 피할 수 있었으나 집권자들의 공허한 명분론이나 만용(蠻勇), 오판으로 전쟁이란 비극을 자초하여 망국의 한을 남긴 경우도 있었으니 병자호란이 바로 그런 전쟁이었다.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패륜을 저지른 ‘혼군(昏君)’으로 반정의 결정적 명분을 제공한 자신의 혼미(昏迷)했던 과거를 돌아보면서 자책하지 않았을까?

명군(明君)의 자질과 경륜을 갖추고 있었다는 광해, 그러나 이어지는 국란과 불우했던 세자 시절의 트라우마, 그리고 서자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불안했던 왕권으로 정적을 양산했던 그의 폭정(暴政)들이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바로 광해 자신이었기에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인간사의 법칙을 여기서도 발견하게 된다.

대청황제 송덕비를 세운 지 4년이 지난 1641년, 피할 수도 있었던 병자호란의 비극을 지켜본 광해는 66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40년 전 ‘왜란’에 이어 반복되는 지정학적 위기상황을 냉정하고 지혜롭게 관리해야 할 절박한 순간에도 인조는 반정(反正) 명분이었던 숭명, 의리론에 함몰되어 ‘호란’이라는 국가적 재앙을 자초한 그의 용열(容悅)함이 삼전도 비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오늘 같은 국제질서의 전환기적 재편기엔 더욱 ‘삼전도 굴욕’의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잠실에 세워진 삼전도 비
김도 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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