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희의 음악여행 ⑪] 난파에게 봄을 묻다
[홍미희의 음악여행 ⑪] 난파에게 봄을 묻다
  • 홍미희 기자
  • 승인 2020.04.20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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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가옥 산책

좋은 계절이다. 어디를 봐도 아름답다. 꽃은 꽃이어서 예쁘고 작게 올라오는 잎은 잎대로 예쁘다. 나무의 껍질마저도 살아서 윤기가 난다. 화려하고 건강하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기간은 짧다. 1년 중 한 달 남짓이다. 나무를 배운 적이 있다. 그때 선생님은 나무의 생은 우리 인생과 똑같다고 말씀하셨다. 3월은 엄마 배 속에 있는 시기이고 싹이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4월은 아이와 같고 5월은 10대로 많이 먹고 배우는 시기이다. 그래서 이때 거름을 줘야 한다. 6월은 20대 모두 결혼하고 싶어 하는 나이, 꽃들도 수분을 한다. 

날씨가 좋으니 걷기도 좋다. 역사박물관 앞을 지난다. 경찰박물관을 지나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서자 길이 좁고 경사도 급하다. 찻길과 인도의 구분이 모호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오른쪽으로 딱 붙어서 걷는다. 그 오른쪽 뒤로 다닥다닥 붙어있던 집들은 많이 없어졌다. 그 골목 안에는 돈가스를 맛있게 하는 집도 있었고 된장찌개가 맛있는 집, 중국집도 있었다. 

눈앞에 바로 강북삼성병원이 보인다. 예전에는 고려병원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이름이 바뀌었다. 병원의 입구에는 어색한 근대식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건물이다. ‘경교장’이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에 종이가 붙어있다. 코로나 때문에 개방을 하지 않는다는 안내다. 김구 선생이 마지막으로 살던 집이고 암살된 집이다. 이 집은 초라하다. 뭔가 남의 집에 빌붙어 살면서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다. 

병원을 나와 위쪽으로 걸어간다. 옛날에는 왼쪽에 작은 집들이 붙어있었다. 이제 그 집들은 사라지고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오고 길은 정리됐다. 교육청의 문 앞은 늘 분주하다. 언제와도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주제도 때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을 뒤로하고 계속 위로 걸어간다. 바로 아래 시내에서 3분만 걸어와도 이곳은 옛날 서울 성안이었고 여기는 성안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옆의 산성에 박힌 돌에서 백 년 전의 모습이 보인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월암공원이다. 

공원의 왼쪽에 작고 전아한 벽돌집이 보인다. 홍난파 가옥이다. 홍난파(1898~1941)는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을 들여오고 소개한 사람이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면서 마지막 2년을 일제에 협조하는 음악을 써서 지금은 친일파로 분류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현재 KBS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경성방송국 관현악단을 창설해서 지휘했다. 우리나라 유명한 음악가 원로 선생님과 일제강점기의 음악 이야기를 하다 “친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있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걸리면 걸리는 거야, 걸리지 말아야지.” 

난파(蘭坡). 난이 가득 피어있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은 음악을 좋아했던 난파 선생의 아버지가 지어주신 아명이다. 아버지는 형제에게 금파와 난파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홍난파의 본명은 홍영후이다. 홍씨의 대부분은 남양홍씨로 남양은 경기도 화성쯤 된다. 이곳에서 태어난 홍난파는 1년 후 서울 정동으로 이사했다. 그의 아버지는 언더우드가 설립한 새문안교회에서 1892년 세례를 받았고, 언더우드의 조선어 선생님이었다. 홍난파 역시 어릴 때부터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교회음악에 접했고 서양음악에 입문했다. 홍난파의 형 금파 홍석후는 국내 첫 면허 의사이자 이비인후과 전문의 제중원 1기로 우리나라 의학계에서 족적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음악사에서 새문안교회의 역할은 크다. 최초로 오선보로 된 찬송가를 만들어 보급했고 새로운 악기를 가르쳤다. 홍난파의 음악 교사였던 김인식도 새문안교회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YMCA 경성 최초의 합창단을 조직했던 사람이었다. 
  
이 집은 1930년 독일계 선교사가 짓고, 홍난파가 마지막 6년 동안 거주한 집이다. 집은 지하1층, 지상 1층으로 조촐하다. 옆에 지나가던 젊은 부부가 “저 집 뭐야?” 하더니 “홍난파 집이래”라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간다. 가까이 가보니 이곳 역시 코로나로 휴관이라는 안내가 붙어있다. 이 집에는 홍난파의 연대표와 봉선화 악보, 책자, 가족사진, 음악회 사진, 1965년 문화훈장증서, 훈장 등이 전시돼 있다. 그는 음악평론가, 잡지 발행인, 방송관현악단의 지휘자, 작곡자 많은 활동을 했다. 평소 이곳은 그의 외손녀가 지키고 있다. 

홍난파는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했던 근대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남들이 보지 못했던 다른 세상을 보고 온 사람이다. 어려웠던 시기에 그의 눈에 비쳤을 세상은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미국에 유학했을 때 홍난파는 윤치호의 도움을 받았다. 윤치호는 60년 동안 일기를 썼는데 우리에게 소개된 그의 일기는 번역본이다. 처음에는 한문과 국한문을 혼용해서 쓰다가 이후에는 영어로 썼기 때문이다. 그는 1921년 2월6일 자 일기에 홍난파에 대해 쓰고 있다. 

최초로 의사면허를 받은 제중원 1기 졸업생들(왼쪽)과 새문안교회.<br>
최초로 의사면허를 받은 제중원 1기 졸업생들(왼쪽)과 새문안교회.

총 유학비용으로 250원을 주었는데 바이올린을 살 수 있도록 250원을 또 보내 달라고 하니 부아가 치민다는 것이다. 거절의 뜻을 밝힌 윤치호에게 홍난파는 구두쇠의 죄악과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니 아무런 수단이 없는 천재는 운명을 비관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악기를 가지고 싶어 한다. 악기에 따라 소리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성악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도 같다. 목소리는 타고나는 것이지만 악기는 다르다. 돈으로 소리를 살 수 있는 것이다. 좋은 소리를 추구하다 보면 좋은 악기는 필수이다. 

홍난파는 미국 유학 중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1937년 흥사단에서 활동한 내용으로 일제에 검거돼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이후 1937년, 38년 2년 동안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애국행진곡을 작곡하며 친일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2년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울 밑에 선 봉숭아야” 이 노래들은 우리 민족의 아픈 마음을 달래 주었고, ‘봉숭아’는 일제에 의해 금지곡으로 부르지 못했던 곡이기도 했다. ‘사랑’, ‘봄 처녀’, ‘성불사의 밤’, ‘사공의 노래’는 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오랫동안 불렸고 시험문제를 내기도 좋은 노래였다. 사장조에 중간에 변박도 있고 가장 기본적인 화음을 사용하고 중간에 변형된 화음을 쓰기도 하고 셋잇단음표와 팔분음표가 적절히 사용된 3박자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일이 부각되면서 교과서에서도 홍난파는 사라졌다.

이 노래들은 대부분 관조적이고 평화로운 가사를 가지고 있다. 이 시기에 불렸던 가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제강점기에 10만매 이상 제작 판매된 노래는 황성의 적, 처녀총각, 젊은이의 봄,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조선팔경, 청춘극장, 황서방 연서, 애수의 소야곡 등 15곡이다. 노래의 가사를 보면 그렇게 현실을 외면하면서 도피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홍난파의 흉상 아래에는 ‘인생은 짧아도 조국과 예술과 우정은 길구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삶을 이루는 화음은 불협과 협을 넘나든다.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물 맑은 봄 바다에 배 떠나간다. 이 배는 달 맞으러 강릉가는 배, 어기야 디여라차, 노를 저어라.” 이 아름다운 봄 노래는 백 년 전 봄 길을 걷는 내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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