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184] 성묘(省墓)
[아! 대한민국-184] 성묘(省墓)
  • 김정남 본지 고문
  • 승인 2020.05.30 06: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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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성묘는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 간단한 제사와 함께 절로 조상께 문안의 인사를 올리는 의식을 말한다. 성묘를 하기 전 먼저 벌초를 하는데, 이는 조상의 묘에 자란 잡초를 베고 묘 주변을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것을 말한다. 벌초와 성묘는 우리 전통문화에서는 매우 중요한 가족 의례 가운데 하나이다. 객지 또는 해외에 오래 나가 있다가도 귀향 또는 귀국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선영을 찾아 성묘로 돌아왔음을 고(告)하는 일이다.

중국 당나라 때의 의례서에는 기제사(忌祭祀)를 지내기 하루 전날 벌초와 성묘를 한다고 적혀있고, 송(宋)나라 때의 주자가례(朱子家禮)에는 3월 상순 조상의 묘를 찾아 제사지낼 때 벌초를 한다고 되어있다. 실학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성격의 책 『오주연문장전사고』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가야국 수로왕 때부터 단오날과 추석 때 성묘를 했다고 하며, 조선시대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에는 한식과 추석에 조상의 묘를 살핀다고 되어있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한식이나 추석 때 벌초와 성묘를 하는 것이 아직까지도 하나의 세시풍속으로 남아있다. 한식이나 추석 며칠 전에는 낫과 간단한 농기구를 들고 조상의 묘소를 찾아 돌보고, 추석이나 한식날에는 가족들이 간단한 주과포를 장만하여 성묘를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왔다. 남의집살이를 하는 머슴이나 거지라도 모두 돌아가신 부모님의 무덤을 돌보고 또 성묘를 했다. 성묘를 떠나는 머슴에게 주인이 새옷과 신발, 허리띠를 마련해 줬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성묘와 벌초는 우리민족이 지켜온 미풍양속이었다. 한식이나 추석 무렵이 되면, 공동묘지가 있는 벽제나 파주, 그리고 용인을 향하는 성묘객으로 주변의 도로가 막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효(孝)를 강조하는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왕이 먼저 그 효를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준 것이 바로 성묘였다. 왕이 선왕 또는 선대 왕들의 능에 성묘를 하려고 궁 밖에 나가는 것을 능행(陵幸)이라 했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은 대부분 서울지역을 벗어나 경기도 일대에 있어 왕이 능에 성묘(참배)하러 갈 때는 보통 1일에서 3일이 걸렸고, 1년에 보통 2~5회 능행을 했다. 행차하는 과정에서 백성과의 접촉을 통해 민심을 직접 듣고, 백성들의 호소를 받아주어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은 덤이었다. 정조는 무려 63회에 걸친 능행을 했다. 이중 상당 부분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정조는 몇 차례씩 아버지의 능참길에 오르는데 때때로 눈물짓고 통곡하기를 그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열한 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고 달래기 위한 일이라면 만사를 무릅쓰고 강행했다. 죽어서도 끝내 아버지의 곁에 묻혔는데, 화성에 있는 융건릉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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