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날실과 씨실로 짜나가는 삶
[해외기고] 날실과 씨실로 짜나가는 삶
  • 황현숙(객원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7.08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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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활동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하며 지내는 상황이 됐지만, 왠지 갇혀있다는 생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지난 몇 달 동안 숨죽이고 집안에서 보냈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일 거다. 미디어에서는 바깥에만 나가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색무취의 공기가 에워싸서 한 방에 죽음의 길로 보내질 듯한 공포감을 부추겼다. 그 시간들은 나에게 심한 피로감을 안겨 주었고 정서적인 불안감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조금씩 풀려나는 현시점에서 닫혀있는 하늘 문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린다. 계획만 세워놓고 미처 가보지 못했던 낯선 도시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가 점차 커지고 있다. 이젠 일상에서 절망을 걸러내고 희망을 건지는 건강한 삶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됐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바다가 있고 그 바다가 얼마나 깊고 푸른지는 자신이 열심히 노를 저어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렇듯 마음이 허해질 때면 떠오르는 한 사람, ‘법정 스님’이 있다. 

무소유의 화두로 유명했던 법정 스님의 책을 책장에서 끄집어내 다시 읽기 시작했다. 법정 스님은 난 화분 두 개를 선물로 받고 아기처럼 돌보면서 인간의 집착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었다.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고 했다. 이런 무소유의 정신을 본받자고 머리로 동의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가슴으로 실천하는 이들은 많지가 않다. 물질 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면서 내 것을 버린다는 마음은 결코 쉽지가 않을 테니까.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철저하게 몸으로 실행했던 승려로서 길상사에 얽힌 일화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법정 스님의 글에 한동안 빠졌던 시기에 마침 한국을 방문하게 되어서 길상사를 직접 방문하고 취재할 기회가 생겼다. 법정 스님이 1995년에 설립한 길상사는 서울 성북동에 자리하고 있는 대중사찰이다. 유신정권 시절에 권력의 뒷거래가 이뤄지던 안방 정치의 요정(옛 이름: 대원각)으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길상사가 설립된 유래는 정권이 바뀌면서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여주인이 법정 스님께 건물을 기부해서 사찰로 탈바꿈하게 됐다. 길상사는 1997년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 길상사’라고 이름을 바꾸고 대중 속으로 친근하게 다가서는 전교를 펼쳤다. 법정 스님은 단 한 번도 주지 직을 맡지 않았고 회주스님으로서 대중들을 위한 설법만을 간혹 행하였다고 한다.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며 대중들이 스스로 불법을 깨우치기를 바랐던 수행자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길상사 내부는 대웅전을 끼고 오른편을 바라보면 합장하고 있는 작은 보살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은은한 미소를 띤 보살의 아름다운 얼굴은 마치 성모 마리아상을 연상시키는 우아한 모습으로 보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조각가가 가톨릭 신자여서 그런 이미지가 조각상에 담겨 있었던 모양이다.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와 고풍스러운 모양의 정자는 마치 깊은 산속에 와있는 것처럼 아늑한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서울 도심에 길상사와 같은 운치 있는 사찰이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서울 시민들에게는 참으로 행운이라고 여겨졌다. 세속에 찌든 몸과 마음을 잠시 내려두고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다 보면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게 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사상이 향불의 연기처럼 서서히 피어오르기를 바라며 은은하게 들려오는 목탁 소리에 두 손을 맞닿았다. 

나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불교문화와 철학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한국에 갈 때마다 기회가 닿는 대로 합천 해인사나 양산 통도사 같은 큰절을 찾기도 하지만 작은 산사를 찾아가서 스님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무척 좋아한다. 그 이유는 종교를 떠나서 정적과 묘한 안도감이 감도는 곳에서 삶의 무게를 나눌 수 있는 여유와 스님이 주는 편안한 분위기를 좋아해서다. 몇 해 전, 강원도의 외진 국도를 운전하고 가던 중에 들렀던 작은 암자에서 주지 스님으로부터 좋은 차 한 잔을 대접받았고 귀한 향나무 염주까지 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당당하게 밝히고 밥상 앞에서 성호를 긋고 식사 전에 하는 기도까지 바쳤다. 주지 스님과의 우연한 만남이 참으로 소중한 인연이었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주지 스님이 “나는, 신부와 수녀 친구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라는 말에 더 친근함을 느꼈던 것 같다. 

한국의 큰 절에서는 일반 사람들이나 외국인들을 위한 ‘템플 스테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한국민족의 전통과 불교문화를 체험할 수 있고 외국인들에게는 부처의 말씀과 한국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하늘 문이 다시 열려서 한국을 찾게 되면 내 안의 나를 찾는 체험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 “내가 왜 이럴까?”하는 한탄보다는 내 속에서 잠자고 있는 나를 일깨우고 싶다. 컴퓨터를 하다 보면 갑자기 화면이 정지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는 Refresh 키를 누르고 잠시 기다리면 정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혼란스러운 이 순간에 잠시 숨을 고르는 현명한 인내심이 필요할 듯싶다. 법정 스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인간의 삶은 날실과 씨실로 짜나가는 한 장의 천이다. 지금 이 자리, 그대가 더하는 실은 무슨 빛깔인가?”

황현숙(객원 칼럼니스트)
황현숙(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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