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나는 이렇게 해외특파원이 됐다–1
[해외기고] 나는 이렇게 해외특파원이 됐다–1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0.09.10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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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동포 기자의 이민 40년 취재증언(證言)

1975년 12월의 칼바람은 무척 매서웠다. 나는 도시 한 변두리 아파트에서 이민 짐을 싸고 있었다. 기술하나 없이 무모한 캐나다행이었다. 서울 중구 한복판에서 태어나 서울 밖을 벗어난 적 없는 나는 이 메마른 고향도시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다가올 미지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나는 한 국영기업체에 다녔고, 승진도 눈앞이었다, 회사는 지금도 남들이 선망하는 일류직장이다. 그러나 당시 답답한 유신정권 하를 떠나 다른 바깥 세계를 갈구하는 마음이 있었다. 캐나다에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먼저 이민해 있었다. 이 때문에 가족초청 이민을 수월하게 생각했다.

허나 캐나다대사관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민 면접 시 합격점수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 전문기술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통역여자가 절망적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캐나다 영사에게 매달렸다. “내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지금 캐나다에는 어머니와 남매 등 나머지 가족이 모두 살고 있다. 식구들이 큰 캐나다 땅에 함께 모여 살게 기회를 달라”고 하소연했다. 영사는 말없이 한참 시간을 끌었다.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통역 여자는 “인도적 차원에서 받아준 것 같다”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가까스로 면접이 통과되자 곧 직장을 그만두었다. 주변에선 놀라움과 염려의 눈길을 보냈다. 인사차 국회의원인 삼촌 집에 들르자 “넌 여기 좋은 직장이 있는데 도대체 왜 캐나다에 가나. 무슨 꿀단지가 있냐?”고 못마땅해하셨다. 오래 헤어질 섭섭함과 내 막연한 이민행에서 나온 꾸지람으로 들렸다.

1981년 초 첫 교포기자 시절 당시 캐나다 피에르 트뤼도 총리의 모습.

토론토에 닿자 주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무료영어학교에 다녔다. 6개월 코스다. 이 기간이 끝나면 보조금이 끊긴다. 곧 공장 노동일을 했다. 몬트리올에서 막 토론토로 이사한 항공기 부품 수리 공장이었다. 노무자 근무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종료 시간 벨이 울리면 누구든 중도에 기계처럼 일을 딱 멈추는 게 신기했다. 한국에선 사무실에만 근무하다 종일서 일하니 고역이었다. 비행기 라디에이터 부품을 닦고 수리하는 일이라 늘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몸에 밴 냄새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6개월이 후딱 지나갔다. 이렇게 나날을 계속 보낼 순 없었다. 공장 일을 통해 영어 실력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는 틈을 내 온타리오 주(수도 토론토)정부기관을 찾아갔다. 당시 주정부에선 이민(영주권자)자 훈련을 위해 2년제 전문대학(테크니컬 College) 무료 학습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공부를 마칠 때까지 최소생활비도 주는 정부프로그램이다. 이 혜택은 주로 장애인들이나 극빈자층을 위한 사회복지 배려정책이다. 지금은 이 무료교육프로그램이 사라진 지 오래됐다고 한다.

사실 전에 한번 주정부기관을 찾았다 실패한 적이 있었다. 담당 상담원은 내 사회보험 카드(캐나다 주민등록) 기록을 보더니 “당신은 예전 찾아와 면담했는데 왜 또 왔느냐”며 굳은 표정이다. “정말 무슨 기술이든 배우고 싶다. 지금 공장 노동일은 내게 맞지 않는다. 고민 끝에 마지막 상담을 위해 다시 왔다”고 더듬거렸다. 그는 “네 영어 실력으로 강의나 제대로 들을 수 있겠나”고 했다. 비꼬는 소리처럼 들렸다. “한국에선 영어를 ‘Spoken English(회화)’보다 ‘Written English(문법)’ 위주로 가르친다. 그럼 한번 영어시험 볼 찬스를 달라. 시험을 치르고 실력 부족이면 즉시 포기하겠다”고 고집했다. 내 이력서엔 국문학부전공과 경제학 학위가 있었다. 그는 다시 서류를 훑어보더니 “그럼 네가 다른 기능직보다 어카운팅(회계)을 택한다면 시험 보게 해주마”고 기회를 줬다. 나중 알았지만 어카운팅 시험점수는 다른 기능직보다 두 학년 정도 높았다.

1981년 2월 캐나다에서의 첫 취재 기사.

3주 후 지정해준 대학에서 영어와 수학 두 시험을 치렀다. 시험 전 미리 영어테스트 관련 알아보니 스펠링, 문법, 작문, 독해력 등이었다. 특히 작문에 자신 없어 막연히 한 제목을 정해놓고 준비했다. “교육이 얼마나 인생에 중요한가?” 책자를 읽고 단어, 문장 등을 외워두었다. 작문 시험은 2개 영어 제목 중 하나를 택해 20분 내 쓰는 문제다. 제목 중 하나가 ‘TV가 실생활에 끼치는 영향’이었다. ‘교육’ 대신 ‘TV’로 바꾸어서 외운 문맥을 활용해 무난히 넘겼다. 후에 작문 채점 결과가 ‘Satisfactory’(만족한)로 매겨져 있었다. 그 후 테스트 결과가 좋았는지 본과대학(세인트 제임스 캠퍼스)에 등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날 약 100여 명 중 8명이 본과로 직행 됐는데, 그 속에 끼게 됐으니 무척 행운이 따라준 셈이다. 다른 탈락자는 예과에서 6개월 영어훈련을 받고 재시험 뒤 본과 행 여부를 가린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회계 공부는 별 흥미 없었다. 일생을 숫자 속에 묻혀 지낸다는 게 따분하게 생각됐다. 반에는 10여명 외국인 학생들과 어울리는 분위기가 좋았다. 교우들은 이탈리아, 헝가리, 중국, 자메이카, 남미 등 각처에서 온 이민자들이다. 이들에서 받은 인상은 세계 어느 인종이든 거의 동일한 사고방식과 인간미를 지녔다는 사실이다. 사람을 차별 않는 귀중한 체험도 이때 얻었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토론토 경찰이 집으로 찾아왔다. 이유는 내 친척이 직장인 GM차 딜러에서 절도사고를 내고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세일즈맨인 그가 고객이 차구입비로 맡겨놓은 현금 3천여 달러를 갖고 잠적한 것이다. 어처구니없었다. 회사에선 즉시 고발조치를 취했고, 경찰은 그의 행방을 찾다 내게까지 온 것이다. 회사 참조(Reference)란에 내 연락처가 있었나 보다. 친척이니 일단 돈을 갚아줘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캐나다 같은 선진신용사회에서 절도, 사기 등 부정행위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당시 내겐 얼마간의 돈이 있었고, 당장 사용할 데도 없었다.

러시아 특파원 증명서

GM 딜러를 찾아가 정확한 분실금액을 확인하고 보증수표로 전달했다. 머리가 새하얀 밥 월쉬(Bob Walsh) 사장은 “내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며 무척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대신 일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 영어 소통도 힘들고, 학교에 다녀 시간도 안 맞는다. 더구나 자동차 관련해 아무 지식도 없다”고 고사했다. 사장은 “나는 한국인 세일즈맨이 필요하니, 시간 날 때만 일해 달라. 세일즈맨 회의나 매장근무도 필요 없다. 차 한 대 못 팔아도 매주 기본급 200달러와 세일즈맨 차를 제공한다”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더 이상 거절이 어려웠다. “그럼 절대 큰 기대는 말라. 평일 틈날 때와 토요일 쉴 때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판매실적은 저조했지만, 그런대로 체면치레는 했다. 8개월이 지났다. 차 세일즈맨생활은 좀 익숙해졌으나 끝까지 붙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학교는 1차 수업이 끝나 본격적인 2차 회계 공부 시점에 왔다. 학교와 차 딜러 모두를 정리하고 교포사회 일간지 창간에 참여키로 했다.

1981년 봄 첫 일간지 한국일보가 출범하자 기자 겸 광고/사업국장을 겸직했다. 편집국장은 故 이석현 아동문학가가 맡았다. 어느 날 토론토 이민자 동기들 소식을 접했다. 그들은 꽤 재산을 모으고 있었다. 내가 공장과 학교, 차 딜러, 신문사로 전전할 때, 그들은 마트(편의점) 등 자영업(스몰 비즈니스) 한 길로 전념해 사업성 장을 이룬 것이다. 불과 수년 사이 재정상황이 확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1주일 내내 일한다. 바쁜 일상이니 돈을 벌어도 쓸 시간조차 없다는 게 불만이다. 훗날 시대적 평가지만 1970-80년대는 세계적 호황기로 캐나다 역시 경기가 좋아 정부든, 개인 비즈니스든 그때가 “천국 시절”이었다고 회자된다.

필자소개
(사)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사)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현재)
(사)대한언론인회 국제교류위원회 간사(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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