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희의 음악여행 ⑯] ‘순수’와 ‘의도’ 사이에서
[홍미희의 음악여행 ⑯] ‘순수’와 ‘의도’ 사이에서
  • 홍미희 기자
  • 승인 2020.09.2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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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란 무엇일까? 음악의 사전적인 의미는 ‘박자, 가락, 음성 따위를 갖가지 형식으로 조화하고 결합하여, 목소리나 악기를 통하여 사상 또는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음악의 존재 이유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정의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이들은 ‘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주제를 표현하고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표현방법에 따라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성악곡과 기악곡이다. 성악곡은 가사가 있기 때문에 사람의 감성을 쉽게 자극하고 작곡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기악곡은 가사가 없이 음의 높낮이와 박자를 통해서만 작곡자의 의도를 표현하고 있어 주제의 전달이 어렵다. 성악곡이 가사로 주제를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기악곡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작곡자의 의도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쉬운 것은 곡의 제목을 보고 유추하는 방법일 것이다. 바다, 폭풍, 달빛··· 그러나, 기악곡에 이런 식으로 구체적인 제목이 붙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고전파 시대의 음악은 뚜렷한 제목이 없이 소나타 1번. 교향곡 1번 등 악곡의 형식과 번호로만 표시되었다. 고전파 시대의 마지막 작곡자인 베토벤은 1827년 사망했으니 기악곡에 제목이 붙은 것은 불과 20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시대 제목 하나를 예로 들면 ‘Beethoven: Piano Sonata No.17 In D Minor Op.31 No.2 III. Allegretto’이다. 여기서 번호를 뜻하는 말이 두 가지 있다. No.와 Op.이다. No.는 일반적으로 교향곡이나 소나타 등을 작곡한 순서대로 붙일 때 사용한다. Op.는 라틴어 Opus의 준말로 작품번호이다. 즉, 악곡의 종류와 관계없이 전체적인 작품의 번호 순서는 Op.를 쓰고, 악곡형식으로 매기는 번호는 No.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작곡자가 여러 곡을 동시에 작곡했을 때는 곡마다 Op.를 붙이지 않고 그 시기의 작품을 하나로 묶고 그 안에서 No.를 붙이기도 한다. 베토벤 이전에는 악보의 출판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아 모차르트(K) 바흐(BWV)처럼 후세의 학자들이 작곡자들의 악보를 정리하면서 작품번호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등 여러 기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 Op.는 음악사적으로 볼 때 베토벤이 직접 작품번호를 공식적으로 쓰면서 저작권의 의미가 부여되는 계기가 된다.

이제 위에서 예로 들었던 ‘Beethoven: Piano Sonata No.17 In D Minor Op.31 No.2 III. Allegretto’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베토벤이 작곡한 피아노곡으로 소나타 형식이다. 그리고 피아노곡 중에서 17번이고 라단조이다. 작품번호는 31번이며 그중에서 2번째 작품으로 3악장은 약간 빠르게 연주된다”는 뜻이다. 사실 이 곡은 ‘Tempest’라는 부제로 훨씬 잘 알려져 있다.

이는 베토벤이 이 곡을 이해하고 싶으면 셰익스피어의 ‘Tempest’를 읽어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제목만 쓰면 곡을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될 텐데 왜 길게 제목을 붙였을까? 이 시대의 작곡자들은 음악은 어떤 목적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로 표현돼야 하는 순수한 것이고 절대적인 규칙 속에서 아름다움이 나타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악에서 고전파 시대는 악곡의 형식이 완성되고 그 형식미가 가장 극에 달했던 시기이다. 그래서 음악의 형식이 가장 엄격했던 순간에 오히려 음악은 가장 순수함을 지니는 아이러니를 가진다. 고전파 시대 형식의 완성은 소나타 형식이다. 그래서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소나타나 교향곡을 들으면 뭔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같은 형식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나타 형식은 도입부에서 5도로 발전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끝을 맺는다. 또한 기악곡의 경우 소나타 형식을 포함한 3개의 악장으로 구성되며 교향곡 역시 소나타 형식을 가진 4개의 악장으로 빠르기까지 정해진 규칙에 따른다. 이렇게 다른 목적성 없이 음악만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이 절대음악이다.

역사에서 모든 것이 최고의 순간에 이르면 그에 반하는 것이 나타난다. 절대음악의 시기가 지나면서 나타나는 것이 표제음악이다. 음악에 제목이 붙기 시작한 것은 낭만파 시대의 일이다. 슈베르트(1797-1828), 베를리오즈(1803-1869), 쇼팽(1810-1849), 슈만(1810-1856), 리스트(1811-1886) 등이 초기 낭만파에 해당한다. 이들은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를 문학이나 미술, 무용 등 다른 예술과의 융합을 통해 표현했다.

또한 악곡의 연주시간도 짧아졌기 때문에 음악을 어렵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음악에 제목 하나 붙이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곡의 제목을 붙이는 방법에 따라 순수하게 음악 자체를 표현할 수도 있고, 음악을 표현수단으로 하여 인간의 감정이나 사상을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음악의 목적성이 달라진다.

표제음악의 시작이라고 여겨지는 베를리오즈가 작곡한 ‘환상교향곡’은 그가 짝사랑했던 영국의 여배우 스미드슨에 관한 곡으로 ‘병적으로 예민한 감성을 타고난 젊은 음악가가 희망이 없는 사랑에 절망해 마약을 먹고 깊은 잠을 자면서 환각에 빠진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5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악장마다 제목이 붙어있다. 이중 ‘무도회’라는 제목을 가진 2악장의 멜로디는 참 아름답다.

5악장의 파격적인 구성뿐 아니라 2악장에서 왈츠의 형식을 도입했는데 정작 주제선율은 바이올린이 조용하게 연주한다. 이 부분을 들으면 ‘베를리오즈의 격정적인 삶 속에 그녀가 이렇게 조용히,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음악가로도 알려진 그가 만든 교향곡은 오히려 악기편성이 매우 화려하고 규모가 크다.

왼쪽 사진 은 프랑스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  오른쪽 사진은 미국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1984년 BBC TV, 로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왼쪽 사진 은 프랑스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 오른쪽 사진은 미국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1984년 BBC TV, 로얄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그리고 또 시대와 관계없이 표제음악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작곡자로는 비발디가 있다. 1725년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를 작곡하면서 곡의 처음과 부분 부분에 분위기에 맞는 시(소네트)를 써 넣었기 때문이다. 협주곡이란 독주악기가 다른 악기군과 같이 연주하는 곡이다. 이 곡은 제목이 사계이기 때문에 4개의 곡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 각 계절마다 3개의 악장이 있기 때문에 전체의 곡은 12개로 구성된다. 제시된 악보는 겨울의 2악장이다. 악보의 위 쪽에는 “집안의 난롯가는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밖에는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다.”라고 써 있다. 비발디가 살던 베네치아는 겨울에도 비가 내리는 일이 많았나 보다. 겨울 1악장과 3악장의 거센 바람소리, 덜덜 떨리는 소리와는 다르게 겨울의 2악장에서는 따뜻한 집안의 겨울을 묘사한다. 악보에 보이는 바이올린 1,2의 pizz.는 피치카토로 바이올린을 활로 연주하지 않고 손으로 뜯는 주법이다. 솔로가 아름답게 주제 음을 연주하는 동안 나머지 악기들은 피치카토로 한 음 한 음 뜯으면서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를 묘사한다. 또한 첼로는 낮게 통주저음으로 연주하면서 바로크시대 음악의 특징을 살리고 있다.

기악곡과 성악곡의 차이는 문학에서 은유보다는 직유가 훨씬 이해가 빠른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은유와 직유 중 어떤 것이 사람의 마음을 더 울리는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 마찬가지로 절대음악과 표제음악 중 어떤 것이 더 음악적인지에 대한 정답 역시 없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17번을 음악 자체로 감상할 수도 있고, ‘Tempest’로 생각하며 비바람 치는 날씨와 사나운 마음에 공감하듯이 절대음악을 표제음악처럼 들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비발디의 사계를 계절의 느낌에 국한해서 듣기보다는 현악중주와 독주악기의 구성, 그리고 바로크 시대에 강약을 조절하면서 작곡한 기법 등 음의 다양함을 상상하며 듣기도 한다. 요즘 같은 시절 이런저런 곡을 들으면서 표현방식의 차이를 통한 음악의 표현과 본질에 대한 생각에 잠시 빠져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비발디, 겨울 2악장 악보 일부분
비발디, 겨울 2악장 악보 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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