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역사이야기] 구리시 동구릉(东九陵)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구리시 동구릉(东九陵)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0.12.2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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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번째 능(陵) 수릉(綏陵)

조선 순조(純祖, 재위 1800∼1834)의 원자로 왕세자(효명세자)로 책봉되고,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翼宗·1809~1830)과 부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1808~1890)를 합장한 무덤이다.

효명세자는 1830년(순조 30) 5월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숨을 거두었고, 같은 해 8월4일 서울 석관동에 있는 경종 무덤인 의릉(懿陵) 좌측에 무덤을 만들어 연경묘(延慶墓)라 했다. 1835년(헌종 즉위) 5월19일 효명세자가 왕(익종)으로 추존되면서 연경묘는 수릉(綏陵)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그 후 풍수상의 문제로 2번에 걸쳐 능을 옮겨 1855년(철종 6) 현재의 위치인 동구릉(東九陵, 사적 제193호)의 태조 무덤 건원릉 좌측에 자리 잡았다. 신정왕후는 1890년(고종 27) 4월17일 경복궁 흥복전에서 숨져 같은 해 8월30일 익종과 합장됐다.

현릉(顯陵, 문종과 현덕왕후)
현릉(顯陵, 문종과 현덕왕후)

2. 두 번째 능(陵) 현릉(顯陵)

현릉(顯陵)은 조선의 국왕 문종(文宗·1414~1452)과 문종의 비(妃) 현덕 왕후(顯德王后·1418~1441)의 능이다. 문종은 조선의 제5대 국왕으로 세종(世宗)의 아들이며 단종(端宗)의 아버지다. 1421년(세종 3)에 세자로 책봉됐다. 김오문의 딸과 첫 번째 혼인했으나 자질이 부족하다 해 폐출됐고, 봉여의 딸과 두 번째 혼인했으나, 역시 폐출됐다. 이후 후궁으로 있던 현덕 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됐다. 문종은 학문이 깊고 천문이나 역법 등에도 능통해 세자 시절부터 아버지 세종이 여러 업적을 쌓는 데 큰 힘이 됐다. 1445년(세종 27)부터는 세종을 대신해 정사를 돌보았다. 1450년에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중 학문을 권장했고 병제 개편에도 힘써 성과를 거두었으나, 몸이 허약해 1452년에 세상을 떠났다.

현덕 왕후의 본관은 안동으로, 화산 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이다. 1431년(세종 13) 세자궁에 입궁해 문종을 모시다가, 세자빈 봉씨가 폐출된 후 세자빈이 됐다. 1441년 단종을 출산했으나 3일 후에 세상을 떠났고,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한 후 왕후로 추숭됐다. 현덕 왕후의 어머니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1457년(세조 3)에 현덕 왕후 또한 서인으로 강등됐다가, 1513년(중종 8)에야 다시 왕후의 지위를 되찾았다.​

건원릉(健元陵, 태조)
건원릉(健元陵, 태조)

3. 세 번째 능(陵) 건원릉(健元陵)

건원릉(健元陵)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능이다. 태조는 1392년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정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는 등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1408년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능이 조성됐고 1899년 태조고황제로 추존됐다.

태조는 조선을 개국한 왕으로 이름은 이성계(李成桂)이다. 이성계는 고려 말기 홍건적이나 왜구 등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잡았으며, 1392년 7월 조선 왕조를 세웠다. 이방원이 주도한 ‘왕자의 난’ 이후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됐으며,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태상왕(太上王)이 됐다. 1408년 5월24일 창덕궁 별전에서 사망했다.

건원릉은 동구릉 내 중앙의 깊숙한 곳에 있다. 주산을 검암산(儉巖山·구릉산)으로 두고 그 아래 능선에 정북에서 동쪽으로 약간 기운 방향으로 조성됐다. 건원릉의 입지가 결정된 것은 태조가 사망한 1408년 6월이었다. 본래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 왕후(神德王后)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당시 덕수궁 뒤편 현재 정동의 영국 대사관 부근에 있었던 신덕 왕후의 정릉(貞陵)에 능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그러나 태종은 영의정 하륜(河崙) 등에게 명해 원평, 봉성, 행주 등 다양한 후보지를 둘러보도록 한 끝에, 최종적으로 능의 위치를 양주 검암(현 구리시 동구릉)으로 확정했다. 신덕 왕후의 정릉은 당시 도성 밖으로 옮겨져 현재 성북동에 있다.

4. 네 번째 능(陵) 목릉(穆陵)

목릉(穆陵)은 조선의 국왕 선조(宣祖·1552~1608)와 선조의 비(妃) 의인왕후(懿仁王后·1555~1600), 그리고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1587~1632)의 능이다. 선조는 조선의 제14대 국왕으로, 중종(中宗)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岧)이다. 어렸을 때부터 명종(明宗)의 총애를 받았으며, 명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국왕으로 즉위했다. 사림을 우대하는 정치를 펴서 여러 이름난 인재들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도록 했다. 이때를 목릉성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본의 침략 야욕을 오판해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게 됐다는 평가도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고 후세 사가들은 평하고 있다.

인목왕후의 본관은 연안이며,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1602년(선조 35) 왕비에 책봉됐으며, 1606년 적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당시 세자로 있었던 광해군(光海君)은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영창대군의 존재는 광해군에게는 정통성에 있어 위협이 됐다. 결국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왕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으며, 이는 인조반정의 직접적인 빌미가 됐다. 인조반정 당시 인목왕후는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의 즉위를 승인하기도 했다. ‘인목대비’라는 영화나 드라마에 많이 등장했던 인물이다.

​5. 다섯 번째 능(陵) 휘릉(徽陵)

휘릉(徽陵)은 장렬왕후(莊烈王后·1624~1688)의 능이다. 장렬왕후의 본관은 양주로,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이다. 인조의 비(妃) 인열왕후(仁烈王后)가 1635년 42세의 늦은 나이에 출산을 하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1638년(인조 16) 장렬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어 인조와 가례를 올렸다. 1649년에 인조가 사망하고 효종(孝宗)이 왕위에 오르자 대비가 됐고, 1659년 효종이 사망하고 현종(顯宗)이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가 됐다. 효종이 사망했을 때 효종에 대한 장렬왕후의 상복 문제를 두고 예송이 일어났으며, 1674년에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사망하자 그녀에 대한 장렬왕후의 상복 문제로 다시 예송이 일어났다. 예송의 결과로 남인과 서인의 정권이 바뀌기도 했다. 장렬왕후는 1688년(숙종 14)에 창경궁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원릉(元陵, 영조와 정순왕후)
원릉(元陵, 영조와 정순왕후)

6. 여섯 번째 능(陵) 원릉(元陵)

조선 제21대 왕 영조(英祖·1694~1776, 재위 1724~1776)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1745~1805)의 무덤이다. 9개의 조선 왕릉(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으로 이루어진 동구릉(東九陵, 사적 제193호) 중 하나로,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있다.

영조는 1699년에 연잉군이 됐고,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세제를 거쳐 왕위에 올랐다. 52년 재위 기간 탕평책과 균역법을 실시하고 사치를 금지했으며 상례제도를 정비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들 사도세자가 붕당정치로 희생되는 비운을 겪었다.

영조는 원비인 정성왕후가 잠든 서오릉의 홍릉(弘陵) 자리에 묻히기를 바랐으나 정조가 현 위치에 능지를 정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릉이 있는 자리는 원래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이 있었던 곳으로, 영릉은 1673년(현종 14) 경기도 여주로 옮겨졌다. 영조는 1776년 3월 숨을 거두고, 같은 해 7월27일 능에 안장됐으며, 정순왕후는 원릉을 조성한 지 29년 후인 1805년(순조 5) 6월20일 영조 옆에 안장됐다.

정순왕후(贞顺王后·1745~1805)는 영조의 두 번째 왕비로써 본관이 경주인 오흥부원군 김완구와 원풍부부인 원 씨의 딸로 1745년 영조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에 1759년(영조 35세)에 15 세의 나이로 영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됐다. 15 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정순왕후의 대담하고 당찬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는 왕비 간택 때에서부터 전해진다.

간택 시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보릿고개라는 인상적인 답을 했다고 전한다. 왕비로 간태된 후에는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는냐”고 추상같이 꾸짖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왕비의 체통을 지킬 줄 아는 당찬 여인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됐으며, 1800년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했다. 이때 스스로를 여주(女主·女君)라 칭하고 실질적인 국왕의 권위를 갖고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해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 인물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다음해에는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 정약용 등의 남인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壮勇营)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 질서를 부정했다. 1804년 수렴청정을 거두었으며, 1805년(순조 5년)에 창덕궁 경복전에서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7. 일곱 번째 능(陵) 경릉(景陵)

경릉(景陵)은 조선의 24대 국왕 헌종(憲宗·1827~1849·사진에서 오른쪽) 능(陵)과 헌종의 첫 번째 왕비 효현황후(孝顯王后·1828~1843· 사진에서 가운데) 김 씨의 능(陵), 그리고 계비(繼妃) 효정황후(孝定王后·1831~1903·사진에서 왼쪽) 홍 씨의 능이다.

헌종은 조선의 제24대 국왕으로, 이름은 환(奐)이다. 순조(純祖)의 손자이자 추존왕 익종(翼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조만영(趙萬永)의 딸 신정왕후(神貞王后)이다. 1830년(순조 30)에 왕세손에 책봉됐고, 1834년 순조가 사망하자 8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즉위 초에는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했다. 헌종의 재위 기간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 정치로 인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로 평가되며, 사회적으로도 연이은 수재(水災)와 삼정의 문란, 천주교 박해 등으로 민심이 어수선했던 시기였다. 헌종은 1849년 2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08년에 황제로 추존됐다.

효현왕후의 본관은 안동으로, 아버지는 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이다. 효현왕후는 1837년(헌종 3) 왕비로 간택되어 헌종과 가례를 올렸으나 1843년 16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 경릉에 첫 번째로 모셔졌다.

효정왕후의 본관은 남양으로, 익풍 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딸이다. 효현 왕후가 사망한 후 1844년 헌종과 가례를 올리고 왕비에 책봉됐다. 1849년 헌종이 사망하고 철종(哲宗)이 뒤를 잇자 대비가 됐고, 1857년(철종 8) 순조(純祖)의 비 순원왕후가 사망하자 왕대비(王大妃)가 됐다. 1897년 대한 제국이 선포되면서 최초의 태후가 되기도 했다. 효정 왕후는 1904년 경운궁에서 73세로 세상을 떠나 경릉에 마지막으로 모셔졌다. 경릉은 각 능 앞에 혼유석이 배치되어 있고 세 능 모두 난간석만 설치되어 있다.

8. 여덟 번째 능(陵) 혜릉(惠陵)

혜릉(惠陵)은 단의 왕후(端懿王后·1686~1718)의 능(陵)이다. 정자각 넘어 높은 언덕에 능(陵)이 모셔져 있다. 단의왕후(端懿王后)는 조선의 제20대 국왕 경종(景宗)의 비(妃)로, 본관은 청송이며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이다. 1696년(숙종 22)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경종과 가례를 올렸다. 단의왕후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추어, 왕실의 어른을 모시고 병약한 경종을 돌보는 데에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1718년(숙종 44)에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왕후의 지위가 부여됐다.

숭릉(崇陵, 현종과 명성왕후)
숭릉(崇陵, 현종과 명성왕후)

9. 아홉 번째 능(陵) 숭릉(崇陵)

숭릉(崇陵)은 현종(顯宗·1641~1674)과 현종의 비(妃) 명성왕후(明聖王后·1642~1683) 김 씨의 능(陵)이다. ​현종은 조선의 제17대 왕 효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41년(인조 19) 효종이 봉림 대군(鳳林大君)으로서 청나라 심양(瀋陽)에서 볼모로 있을 때 태어나,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1645년(인조 23)에 인조(仁祖)의 맏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현종도 자연스레 원손(元孫)이 됐다.

1649년에는 왕세손에 책봉됐으며, 1649년 효종이 즉위한 후 1651년(효종 2) 왕세자가 됐다. 1659년에 효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현종의 즉위 기간에는 상복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이어졌으며, 조선 중화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1674년 현종이 사망한 후, 치세 당시를 기록한 『현종실록』의 내용을 두고 붕당 간의 대립이 이어져 『현종 개수 실록』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명성왕후의 본관은 청풍으로, 아버지는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다. 명성왕후는 1651년(효종 2) 세자빈에 책봉되어 현종과 혼인했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됐다. 명성왕후는 매우 명석했으나, 때로는 정사에 깊이 관여할 정도로 과격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1683년(숙종 9)에 창경궁에서 사망했다.

​숭릉연지는 1674년 왕과 왕후의 능을 만들 때의 담당 기관인 사릉도감에서 조성한 연못이다. 네모난 형태에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 방지원도형(方池园岛型)으로 네모는 땅을,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하는 우주관과 자연관이 담겨져 있다. 동구릉 내 9기의 왕릉 가운데 숭릉에만 연지를 두었는데, 이는 동구릉 내에 형성된 3개의 물길(건원릉과 휘릉 사이, 원릉과 경릉 사이, 숭릉과 혜릉 사이)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이 연지는 처음 조성된 숙종 대부터 영조, 정조, 고종 대까지 연못 둘레의 돌축대를 정비하고 연꽃 종자를 능관에게 주어 심고 기르게 한 기록이 전한다. 이를 볼 때 당시 연지에는 연꽃이 무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숭릉 연지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점차 자연적·인위적 원인으로 물이 드나드는 입·출수구(入·出水口) 등 제방시설이 없어지고 변형되는 등 경관이 크게 훼손됐다. 이에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시에서 발굴 조사를 한 후 2017년 보수·정비를 마쳤다. 현재 숭릉연지의 면적은 약 4,941m2이고 평균 수심은 50cm 정도이다.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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