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5] 1984년 ‘의식주’를 ‘식의주’로 바꿔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5] 1984년 ‘의식주’를 ‘식의주’로 바꿔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1.05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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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평안북도 청천강
평안북도 청천강

어느 날 안내원과 함께 묘향산으로 갔다. 평안북도에 소재한 묘향산은 누구든 방북 일정에는 빠지지 않는다. 당일 왕복 행이 가능하니 웬만하면 하루 관광 일정에 들어있다. 평양에서 묘향산까지 차로 약 2시간 거리다. 보통 아침에 떠나 저녁에 돌아온다. 해외교포들 중에는 묘향산이 금강산보다 더 좋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묘향산의 울창한 산세나 분위기는 금강산과는 상당히 다르다. 안내원 얘기론 묘향산 계곡(냇가)으론 주민들의 접근을 허용 않는다 한다. 단순히 오염을 막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묘향산을 서너 번 다니다 보니 한번은 호텔에서 미리 준비해준 도시락(점심)으로 냇가에서 식사하고 1박을 한 적이 있다. 인적이 없는 냇가에 흐르는 물 그대로 떠 마시기도 했다. 묘향산 봉우리를 오르다 산 중턱에서 만난 한 노파로부터 다래 서너 개를 사서 처음 맛보았다. 머루, 다래 등 예전부터 말로만 듣던 열매들을 드디어 묘향산에서 발견했다. 머루와는 달리 다래는 내겐 구하기 힘든 열매였다. 다래는 초록색으로 대추만 한 크기로 달콤했다.

다음날 묘향산 관리인이 대웅전 앞 보현사 역사와 13층 석탑 관련해 한창 설명할 때였다. 옆에 섰던 안내원이 뜬금없이 “보현사가 뭡니까”하고 물었다. 관리인은 “절입니다” 한마디를 던지곤 하던 말을 계속했다. 안내원 쪽으론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이때 잠시 머리에 혼란이 왔다. ‘평양에서 내려온 인텔리 안내원이 어찌 북쪽의 묘향산 보현사를 모르나.’ 무안해할까 봐 내색은 안 했으나, 의문점은 여전히 남았다.
 

묘향산 보현사
묘향산 보현사

관동 8경의 하나인 양양 낙산사가 얼마 전 산불로 전소됐다고 전했을 때 관리인은 “아, 그렇습네까. 우린 전혀 모릅네다. 우리도 관동 8경에 두 개 갖고 있디요. 내금강 삼일포와 해금강 총석정이디요” 한다. 절 옆에 소나무로 꾸민 한반도지도 독도 부분 솔잎이 노랗게 변해있었다. “요즘 일본 때문에 시달려선지 독도 잎이 시들었네요”라고 하자, “일본 놈들이 독도를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데 말도 안 되지요” 거들었다. 그동안 만났던 안내(지도)원들을 전부 지식인으로 알고 있었다. 관광총국 산하 안내원이든, 사업 관계나 이산가족담당이든, 일반책임지도원이든 김대(김일성대학) 등 대학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묘향산을 오갈 때면 북으로 비교적 큰 강 하나가 흐른다. 누군가 “야, 청천강이다”하고 소리쳤다. 낭림산맥을 끼고 서해로 빠지는 강,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살수, 그 강이다. 사람들은 창가를 내다보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 묘향산을 다녀온 워싱턴 DC에 사는 미주교포가 말을 했다. “내게 인상 깊은 건 무엇보다 도로 주변 농토였어요. 나는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 16세까지 농촌에서 자라 시골을 잘 알아요. 북한 논밭이 40년 전 고향 땅 그대로여서 놀랐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어떻게 예전 상태 그대로인지 아무튼 옛날 생각에 감개무량합니다.”

5월의 북녘 들판에는 모내기(일명 모내기전투)가 한창이었다.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1면에는 연일 농촌 기사로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체농법’을 활용해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기사다. 신문에는 ‘봄철 영농전투’라는 이름 아래 북한 일대의 시, 군, 협동농장 등 농촌진척 사항과 활동이 매일 소상히 소개됐다. 북한 주민은 영농기간 중에는 상급자든 누구든 농사일을 거들어야 한다. 도시 거주 간부들도 상하구별 없이 2주 동안 지정된 농촌 지역으로 나가 노동 봉사를 도와야 한다.

2000년 평양에서 떠나는 북한 이산가족일행들
2000년 평양에서 떠나는 북한 이산가족일행들

당시 안내원에 따르면 “농촌에는 적어도 한해 쌀 수확량이 8백만 톤 이상 돼야 인민들 모두에게 식량 배급이 돌아간다”고 설명한다. 지난해는 모처럼 풍작이었는데도 6백만 톤에 불과해, 아직 쌀이 많이 부족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걸 보면 지난 1984년 북에서 한국에 보냈던 쌀 5만석 등은 대단한 성의로 볼 수 있겠다. 당시 서울 등지에서 발생한 집중호우로 많은 인명(129명 사망) 등 재산 피해를 입었을 때 얘기다.

오늘에 와서 한국농촌은 매년 남아도는 쌀로 인해, 쌀값 문제 등 고민이라는 소식을 가끔 듣는다. 이럴 때 기아선상의 북한 주민들을 돕는다면 같은 민족끼리 얼마나 좋겠는가. 굶주린 사람을 돕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나. 북에선 자존심 때문인지 남쪽 호의에 관심 없어 하는 듯싶어 보인다. 북에선 미국만 상대를 원하는 듯, 한국과는 당장 대화 의식이 없다고 들린다. 그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세계 반열에 등장시킨 탓인가. 과거 어느 미 대통령이 북한 지도자를 맞상대로 정상회담을 갖고 세계 이목을 끌게 한 적이 있었던가. 이는 오히려 김정은의 위상만 높이는 일이었는지 판단이 쉽지 않다. 북 핵 해결 문제는 한 치도 진전없는 그대로 답보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난 1984년경부터 김일성은 관용어로 쓰이는 ‘의식주’ 단어를 ‘식의주’로 바꿔 사용하도록 했다. 무엇보다도 식생활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때부터 북한 공용문건과 출판물은 의식주 표현 대신 식의주라고 쓰기 시작했다. 김 주석의 ‘먹는 문제’를 강조하면서다. 그는 ‘옷이나 주택은 부족해도 참을 수 있지만 먹는 문제는 타협이 절대 안 되는 우선적 문제’라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진작부터 ‘식의주’로 사용하고 있다. 영어권에서도 의식주가 아닌 ‘식의주’ 순서로 쓰이고 있다. 항상 순서가 ‘food, clothing and shelter'로 사용한다.

나진 양로원 식사시간
나진 양로원 식사시간

2021년 새해다. 지난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누구든 격심한 고통을 겪었다. 지금도 진행형이다. 집안에 박혀 예전 자료들을 정리하던 중 계획에도 없던 북녘 관련 글을 쓰게 됐다. 쉬운 출발은 아니었다. 내가 해외편집고문으로 있는 ‘재외동포저널(계간지)’의 박상영 출판사 사장이 왠지 극구 반대했다. ‘아무도 북한 글에 관심을 두지 않는데, 왜 쓰려 하느냐?’는 주장이다.

마침 이종환 전 동아일보 북경특파원(월드 코리안 대표)의 적극적인 격려로 주섬주섬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간 좌파로부터는 ‘사쿠라’ 소리도 들었다. 같은 편인 것 같은데 실지로는 아닌 ‘바람잡이’라는 의미다. 하여튼 중도시각의 ’중도성향‘이란 외롭고 호응받기 쉽지 않다. 대부분 사람은 좌냐, 우냐 분명한 걸 원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극좌나 극우 등으로 기울어져 있는 경우를 가끔 본다.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정작 본인은 자신이 그렇게 편향돼 있다고 생각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여러 차례 방북취재를 했다고 북한을 전부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겠나. 오해하는 부분, 틀린 얘기도 있을 것이다. 북한 글은 언제든 조심스럽다. 짧은 시일 북을 한두 번 다녀와 책을 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의 자신감이 정말 부럽다. 하지만 자유롭고 편리한 북미 땅에 살면서 잠깐 평양을 다녀온 뒤 돌변한 일부 교포의 편향적 태도라면 동의할 수 없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 뿔난다’는 식이면 곤란하다.

잠시 북한 관련 글을 내려놓는다. 이번에는 내 첫 기자 생활과 일부 러시아 특파원 시절 스토리로 대신하겠다. 양해를 구한다. 캐나다 이민 생활이 만 45년이 지나 문득 과거 시절이 회상된다. 특히 90년대 초반 모스크바 특파원 시절은 본격적인 기자 활동이 비롯되던 시기였다. 그때 만난 북 노동신문 라웅걸 러시아특파기재, 동아일보 고 장행훈 특파원(이사) 등과의 따뜻한 교류는 내 삶에 잊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스토리 일부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전한다.

북한 지방 유치원
북한 지방 유치원

나는 1975년 12월 토론토로 왔다. 1979년에는 캐나다 시민권자가 됐다. 내 선친집안은 북녘땅 북강원도 대지주로 소위 금수저 집안에 속했다. 보통 남들처럼 흔히 말하는 흙수저 집안에서 성공한 경우와는 반대 경우다. 이민 떠날 시 한국엔 친척 두 명이 국회의원(친삼촌과 친 고모부)이었고, 대학 총장, 고위공무원(차관), 개인사업 등 모두 고위층급이었다. 나는 국영기업체(한국전력) 고참 직원으로 당시 손꼽히는 직장이었다. 이를 포기하고 무작정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박정희 유신시절이라 시대상황도 답답했다. 만 29세 나이로 아무런 기술도 없이 이국땅에서 새 삶을 시도했다. 중매로 이루어진 와이프와 함께 결혼 후에 한 달 만에 무모하게 이민 인생 주사위를 던졌다. ‘맨땅에 헤딩’ 식이었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정부에서는 억2년간 대학에서 무료로 회계공부 기회를 줬다. 그러나 1981년 초 한인사회에 첫 교포일간지가 출범하자 배움을 중간에 포기하고, 신문 일에 뛰어들었다. 기자 일이 자유롭고 보다 보람이 있어 보였다. 아예 기자수습훈련 없이 건달처럼 ‘천둥에 개 뛰듯’ 했다. 한국 기사를 읽고 홀로 기사 작성 등을 익혀 나갔다. 학교 수업 안 받고 검정고시로 입시에 응하는 학생과 같았다, 조선일보사 본사에서 신문을 들여와 캐나다 조선(주간지)을 창간(발행/편집인)했다. 조선일보 신문사등록을 위해 유대인인 레빈 (Levine) 변호사를 찾았을 때였다. 평소 그와 가까운 처지였다. “Mr. 송. 한 가지 물어봅시다. 평소 궁금한 게 있었소.” “뭔데요” “당신네 코리안은 언론 일에 종사하면 사람들로부터 특별히 존경받나요?” “아니요.” “그럼 왜 코리안은 인구수도 적은 데 한인신문은 그리 많소?” 속히 대답을 못 했다. 그때 이미 한인신문이 내 신문까지 8개가 됐다. 일본교포나 중국교포 등에 비하면 주간지, 일간지, 잡지 등 많은 게 사실이었다. 매체 하나가 사라지면 또 하나가 생기고 계속 명멸하는 추세였다. 일본 경우는 니까 타임스(Nikka Times) 한 개, 중국은 그 수많은 인구수에도 서너 개 손을 꼽을 정도였다. 유럽 등 타 소수민족 신문들도 한인신문에 비하면 절대 소수였다. 창피했다.

송광호 저서(조선일보사 발행)
송광호 저서(조선일보사 발행)

1989년 초에 첫 북한취재 방문을 한 후, 우여곡절 끝 교포언론 생활을 전부 정리했다. 교포언론이란 내겐 존경받거나 돈을 벌거나, 보람 있는 직업이 결코 아니었다. 직원들 4명 봉급도 제때 못 줘 늘 허덕였고, 늘 시간도 부족해 골프도 단 한 번 쳐본 적이 없다. 그럴 즈음 강원일보에서 모스크바 특파원 의향을 물어와 응했다. 한국 강원일보에 경력 기자로 입사 (사회2부 차장) 후 모스크바 초대특파원 발령이 났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때 살아남은 5개 지방지(강원, 광주, 대구매일, 대전, 부산일보)가 뭉쳐 1992년 첫 외국으로 파견한 지방신문 해외특파원 제1호였다. 소속은 강원일보였으나 기사 송고는 당시 간사지인 대구매일(2대 부산일보)로 보냈다. 부산일보가 워싱턴DC를 맡았고, 도쿄, 파리, 북경, 모스크바 등 5개 지역이다.

홀로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모스크바는 91년 말 구소련이 붕괴한 직후 러시아가 새로 탄생한 터라 모든 사회 시스템이 혼돈 그 자체였다. 중앙언론 특파원들은 외국어대 러시아학과 출신이 많았다. 나는 모스크바 입국 전 이미 러시아 선교사로 진출해 있는 토론토 박형서 목사 도움으로 변두리 아파트에 거처를 정해놓았다. 전임자가 없으니 처음엔 모든 게 막연했다. 게다가 언어문제까지 있으니 스트레스만 쌓여갔다.

최건국 선배와 류미영 어머니(최덕신선생).
최건국 선배와 류미영 어머니(최덕신선생).

한국대사관을 찾아 공보관을 통해 러시아 외무성에 특파원증 신청부터 했다. 모스크바 한국대사관에는 공관 직원 40명, 특파원은 나까지 모두 10명이었다. 일부 특파원들은 노골적으로 내 특파원단 합류를 반대해 3개월간은 특파원단에 끼지도 못했다. 소속이 강원일보라 하니 ‘강원도 어느 산골짝에서 굴러들어온 시골뜨기인가’하는 눈치였다. 괄시가 심했다. 공보관은 공보관대로 러시아 정부에 속히 특파원증 신청을 않고 머뭇거리다 보니 훌쩍 2주가 지났다. 할 수 없이 독촉했다. “언제 특파원증을 받게 되는 거요?” “외무성 담당자가 자리에 없어서 늦어져요. 만나야 하는데요.” “신분증이 급하니 함께 만나 점심을 합시다. 약속 시각을 정해줘요.” 공보관 역시 외대 러시아학과 출신이었다. 특파원증을 겨우 받았다. 유효기간은 누구나 1년뿐이니 매년 연장신청을 해야 한다.

당시는 인터넷이 없던 시기다. 대사관에선 보도 자료를 팩스로 특파원들에게 보내주곤 했다. 나는 팩스를 못 받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오죽하면 당시 김석규 대사한테 가끔 불만을 토로했으랴. 그러나 절대로 고쳐지지 않았다. 그때 그 말단 공보관(수석공보관이 따로 있었음)이 이웅희 전 문공부장관 장남으로 현재 이석배 주러시아한국대사관 대사다. 그때 깨달은 점이 있다. 해외공관 근무라고 해서 꼭 행정고시나 외무고시 합격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채로 들어온 공무원도 적지 않았다. 이 공보관도 영국 유학생 출신으로 러시아어와 영어가 능했다. 특채로 들어올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또 공보관처럼 내부시험을 거쳐 외교관 보직으로 바꾸는 등 관청 내 부서이동도 가능했다.

그때 동아일보 고 장행훈 특파원(이사)이 따로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전부 냉담할 때 줄곧 따뜻이 위로해 준 언론 대선배였다. 그는 우리 특파원들 모임이 있을 때마다 늘 “기자보다 인간부터 돼라”는 말씀을 되풀이했다. 처음엔 왜 그런 뻔한 당연한 말씀을 계속하시나 의아했다. 그 충고가 차츰 이해됐다. 장 선배뿐이 아니다. 역시 나이 든 선배들은 달랐다. 경향신문 홍성균 선배나 KBS 김선기 선배 역시 늘 부드럽고 친절했다. 문제는 나보다 한참 나이가 아래인 젊은 기자들이었다. 대사관 기자실 내에서 치고받고 몸싸움을 하지를 않나, 말 함부로 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고. 한마디로 정글 속이었다. 장행훈 고참선배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한번은 서로 정보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방송사 한 명이 무슨 반칙을 범했나 보다. 그 한 명을 특파원명단에서 3개월 취재 출입금지를 했다. 특파원 모임에서 다수결 거수투표로 정했다. 그때 나는 구두 경고로 그치자고 반대했다. 내 판단으로는 단순한 정보경쟁 과열로 무리를 했을 뿐이었다. 어느 기자는 아예 영구제명까지 주장했다. 기자 생활에서 누가 특종을 하면 나머지는 김이 샐 수밖에 없다.

한국대사관에서 살벌한 냉대를 받다가 어느 날 모스크바 캐나다대사관을 찾았다. 캐나다 시민권자이니 캐나다대사관에도 등록 신고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긴 분위기가 180도 달랐다. 면담 신청을 하니 곧 한 여성 담당자가 나와 친절히 맞아준다. “모스크바에 장기간 체류해야 해서 알려주려고 왔어요.” “아. 그래요? 모스크바는 여러모로 안전치 못한 데 여기 등록신청서에 비상연락망 주소와 전화를 알려줘요. 어이구, 당신이 꼭 1천 번째 캐나다 등록자이군요. 항상 몸조심하고 필요할 때 연락해주세요.” 그녀 말속에서 우러나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대사관 지하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담배, 햄버거 등 식품도 세금 없이 살 수 있어요. 통신실, 도서실도 있고요. 우리 캐나다대사관만이 유일하게 휴식처를 만들어 놓았으니 언제든 이용하세요”라고 말했다. 고마워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또 한국대사관에서 곧 알게 된 사실이나 대사 관내에 서울사대부고 동문이 2명 근무하고 있었다. 한 명은 2년 선배고, 한 명은 5년 후배(1등서기관)였다. 선배가 후배보다는 언제든 편하다. 친구 한 명 없는 모스크바에서 고교동문은 큰 위안이 되었다. 틈만 나면 선배사무실에 들어가 노닥거렸다. 얌전한 후배 이름은 잊었으나 지금도 당시 이종석 선배와는 교류를 이어간다. 그러고 보니 모스크바에서 만난 북한 라웅걸 특파기자(북한호칭)와 자주 보드카를 마시던 우정 얘기가 빠졌다. 나보다 서너 살 연상인 그를 통해 듣던 유명 월북작가 이태준(철원) 삶의 얘기 등은 나중으로 미룬다.(계속)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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