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6] “우리 공화국이 폐쇄국가라고요?”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6] “우리 공화국이 폐쇄국가라고요?”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1.11 12:01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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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김일성 광장 대주석단 아래 나라길 시작길 표시
김일성 광장 대주석단 아래 나라길 시작길 표시

평양시 한복판에는 ‘김일성 광장’이 있다. 평양 중심부에 위치한 중앙광장이다. 이 광장은 6.25 휴전협정 다음 해인 1954년 건설되었다. 면적은 서울 한복판 광화문광장의 약 4배 정도. 광장은 10만 명 이상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바닥은 화강암으로 돼 있고, 광장 중앙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두 초상화가 전시돼 있다. 광장 건너편 대동강을 따라 주체사상탑을 마주한다. 광장 바로 뒤엔 인민대학습당을 중심으로 두 개 박물관과 내각 종합청사, 외무성 청사 등이 둘러싸 있다.

북한당국은 “김일성 광장은 혁명의 수도 평양시를 더욱 웅장하고, 주체 조선의 위용을 보여준다”고 선전한다. 원래 구소련 크렘린 붉은 광장(Red Square)을 본떠 만들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중국 천안문 광장 설계나 용도 쓰임이 비슷하다. 서울에도 무슨 군중 집회가 있으면 광화문광장이 우선적이듯, 북한 역시 김일성 광장에서 전국적인 국가 주요 행사를 치른다. (노동)당 대회, 평양 군중 집회(시위), 추모기념회를 비롯해 경축야회, 특히 군사 퍼레이드(열병식) 등의 진행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코로나19 시기인 10월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 때는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때 김일성 광장의 대주석단 건물을 일부 개수작업을 통해 김부자 초상화를 건물 상층 부분(첨부)으로 옮겼다. 또 종전의 ‘나라점 시작길’(도로 출발점/ 이정표 역할) 비석 대신 벽 글씨를 새겨 넣었다. 지난 2012년까지 러시아 레닌과 독일 카를 마르크스 두 초상화가 전시돼 있던 자리다. 이후 김부자 초상화로 바뀌었던 것을 최근 건물 위쪽으로 옮겨 전시했다.

나진 남산학교
나진 남산학교

북한을 방문하면 호텔식사 시간을 빼곤 늘 안내(지도)원과 함께한다. 보통 저녁 시간에는 호텔식사 대신 밖에서 안내원과 외식하는 수가 많다. 이때 책임 참사 등 간부도 함께 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누구든 단고기(개고기)를 무척 좋아한다. 나는 음식을 가리지 않으나 개고기는 질색이다. 그들 요구를 못 들어줘 미안할 때가 많다. 그들은 특별 유명 단고기집을 안내한다는데 원치 않으니 섭섭한 눈치가 역력하다. 저녁 식사 때는 당연히 술이 나오고, 식사 장소에 따라 다음은 노래방 (북한명: 화면 반주 음악장)이다. 노래방에는 아는 노래가 거의 없으니 양희은의 아침이슬이나 박태준 작곡의 사우(동무생각)이 고작이다. 레퍼토리는 처음보다 많아졌지만 나는 한두 번 부르면 끝이다.

여러 번 방북하니 여러 안내원을 알게 되고 친밀해진다. 그러나 그들 중엔 조금 상식 밖의 A안내원 경우도 겪었다. A는 30대 안내원인데 사소한 부탁 때마다 그대로 들어주니 나를 쉽게 생각한 것 같다. 호텔상점에서 내 이름으로 담배막대기(카튼, 보루)를 자꾸 가져가는 것이다. 상점 접대원조차 “A안내원 동무가 벌써 3번째 담배막대기를 가져갔는데, 좀 이상합네다. 정말 선생이 원한 겁니까” 하고 묻는다.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듯싶다. “아, 손님 때문에 그런 건데 앞으로는 내가 직접 말하겠어요”라고 했다. A는 어느 상점을 가도 내 옆을 따라다니며 두리번댔다. 필요치 않은 건전지, 볼펜(북한 이름 원주필) 등 그의 개인용품도 샀다. 가격이 얼마 안 되니 언제든 함께 계산했지만, 그건 값 문제가 아니었다. 똑똑한 젊은이인데 안 좋은 습관이다. 평양을 출국할 때 A 안내원에게 얼마의 수고비와 함께 “따로 이 50달러는 도와줬던 운전사를 못 만났으니 꼭 전해주라”고 부탁하고 떠났다.

김일성 광장 명절 놀이
김일성 광장 명절 놀이

캐나다에 온 뒤 두 달쯤 지나 북한 해외 영접국 소속 A 안내원에게 안부 편지를 썼다. “운전사에게 50달러를 잘 전했느냐”는 인사말과 “다른 해외 손님을 안내할 때는 상점에서 항상 손님 옆에 붙어있지 말고, 가능한 개인물건은 따로 구입하라”는 충고를 곁들였다. 그 후 방북했을 때 다른 B책임지도원이 반가이 맞아줬다. 안면이 있는 오래된 고참 안내원이었다. 생각이 난 김에 “A안내원 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송 선생, 해외에서 편지는 안 하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그의 답이었다.

B지도원와 술을 한잔하며 비자(입국사증) 건에 대해 한마디 볼멘소리를 했다. “조국(북)에 몇 차례 다녀도 한 번도 쉽게 비자를 받아본 적이 없소. 왜 이리 힘들어요. 이젠 좀 편히 입국비자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송 선생은 한 번이라도 우리 위대한 지도자 동지를 위해 좋은 글을 써 본 적이 있어요? 좋은 글을 좀 쓰세요.” 이런 얘기는 5촌 친척에게서도 들었다. 외조모 조카인 노인은 늘 어두운 표정으로 정치 얘긴 일절 안 했지만, 노인 아들은 “직업이 기자라면서 좋은 글을 쓰시라고요”라고 말했다.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지도자 찬양하는 글인가. 여러모로 가슴이 답답했다. 다른 해외 이산가족은 혹시나 북한 친척이 어찌 될까 조심스러운 모습을 봤지만, 내 친척 경우 함경도 명천탄광과 강원도 이천군 산골에서 겨우 살고 있는데 더 이상 나빠질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B지도원은 이런 말도 주장했다. “해외에선 우리 공화국(북한)을 입국사증을 안 준다고 폐쇄국가라고 하지만 생각해 보시오. 우리는 필요하면 미국 놈들도 받아주고, 해외교포들 조국 방문을 원하면 이산가족이든, 관광이든 다 받아줬지요. 한번 미국과 비교해 보시오. 우리 조국에서 미국 방문한 사람 숫자와 미국에서 우리 공화국을 다녀간 숫자가 어디가 더 많은가를. 우리가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였지요. 우리 조국에서 미국 비자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캐나다 경우도 한 가지 생각나는 게 있다. 고 최홍희 태권도총재는 북한 병원에서 사망 후 묘소가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지만, 가족(부인과 자녀들)은 그대로 토론토에 살고 있다. 중국 단둥에는 북한 국적으로 오랫동안 외화사업을 하는 최 총재 유일한 조카가 거주한다. 태권도 유단자로 국제태권도연맹(ITF) 재정위원장이기도 하다.

평양 대동강맥주 축전
평양 대동강맥주 축전

한 2년 전인가 그는 부인과 둘이서 며칠 토론토 친척방문을 시도했다. 내게도 협조를 구했다. 지금도 원한다. 나는 최홍희 총재 부인이 실지 숙모 관계이기 때문에 캐나다 비자발급을 어렵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북경) 캐나다대사관에 정식 친척방문 비자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북한인으로서 가족초청으로 북미지역을 방문하게 되는 첫 케이스라 관심이 컸다. 그때 내가 최 총재 조카에게 신신부탁을 했다. “비자발급 문제는 무척 까다롭다. 더구나 북한국적으로 첫 가족 방문 케이스이니 꼭 북경 캐나다대사관까지 처와 함께 찾아가 성의껏 가족관계를 설명하고, 인터뷰에 응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는 “저는 가장 어렵다는 영국 등 유럽도 다녀왔고, 어디든 문제없이 비자를 받았어요. 염려 마세요. 제가 잘 알아서 할게요”라더니 주변 중국여행사를 통해 서류를 접수시켰다고 한다. 결국 두 번 신청이 전부 통과되지 않았다. 직접 찾아가 담당 영사와 인터뷰 상담 시 잘 설명해도 쉽지 않은데, 서류만 달랑 우송해서 성과를 기대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최 총재 부인에도 부탁했다. “사모님. 제가 단둥에서 조카 부부에게 신세를 져서 갚으려 하니, 조카 부부 가족초청 일에 적극 협조 좀 해 주세요.” “아니, 걔들 평양과 단둥에서 아주 잘 살아 있는데 왜 토론토는 방문하려는지 모르겠네. 솔직히 나는 귀찮아요. 우리 애들도 다 반대하고.” 노인네 나이 90이니 귀찮을 수 있겠지만 북한 유일한 친척 협조 요청(초청장)을 모른 체하니 어쩌겠나. 그러니 비자발급이 제대로 성사될 수 있겠나. 어쨌든 캐나다 정부에도 유감이었다. 모처럼 북 주민방문 초청케이스인데 두 번이나 무산시킨 게 무척 아쉽게 생각됐다.

나는 1994년 탈북자를 얼마간 도와준 일이 있었다. 사실 그로 인해 방북취재 때마다 늘 마음이 켕겼다. 모스크바 특파원 시절 첫 탈북자를 UN난민기구에 등록시킨 과거 행적 때문이다. 혹시나 그 사실이 드러날까 불안했다.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나. 모든 게 시간문제이고 언젠가는 진실이 알려지기 마련 아닌가. 그 지난 사 연을 잠깐 전한다.

평양 미림 승마 구락부 멤버

모스크바 특파원 때의 첫 탈북자 만남 스토리다. 지난 1994년 3월. 새벽에 하바롭스크(시베리아 관문) 선교 사인 미주 한인 목사로부터 급히 전화를 받았다. 모스크바에 한 탈북자가 숨어 지내는데 ‘연락이 곧 갈 테니 잘 봐주라’는 부탁이다. 탈북자 거처는 모스크바 H고려인(현지 교포) 회장이 마련해 줬으니 일단 안심되지만, 필요할 때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는 요청이다.

탈북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탈북자라고는 그때 처음 만났다. 당시 시베리아벌목장을 벗어나 방황하던 탈북자 중 한 명은 아니었다. 그는 오늘 한국에서 북녘으로 전문적으로 풍선을 띄우는 단체 중 하나인 대북 풍선 단장인 이민복(63세)씨다.

차츰 알게 됐지만, 그는 말이 많았고, 무척 자기중심적으로 보였다. 나를 만나자마자 그를 돌봐준 고려인 H회장을 비난해 잘 이해가 안 됐다. 이유가 “숨겨준답시고 인적도 없는 시골별장에 가두어놓고 막일을 부려먹었다”는 불만이었다. 갈 곳 없이 방황하는 그를 보호코자 별장에서 육체노동을 좀 시켰다고 해서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하나. 어쨌든 또 모스크바 임시아파트도 마련해 주지 않았던가. 은혜를 베푼 사람을 나쁘게 평하니 처음부터 인간적으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 시간약속도 항상 늦었다. 엉뚱하게 월간조선 조갑제 부장을 잘 안다는 얘길 곧잘 했다. 의아했지만 조 부장을 알게 된 연유를 묻지 않았다. 나도 두세 번 조 부장을 만난 일이 있다. 아무려나 관심 두지 않았다. 나중 조 부장을 만났을 때 물었다. “탈북자 이민복을 잘 아세요?” “그럼요. 아주 훌륭하지요.” “러시아에서 만난 일이 있어요?” “없어요.” 나중 이씨가 한국에 나온 후 만난 거로 안다.

김일성 광장 설 명절 사진

월 스트리트 저널 클라우디아 로젯 특파원이 이씨를 유엔난민기구에 등록시키자고 제안을 했다. “탈북자는 신분보장이 안 돼 위험하니, 이곳 UN난민기구(HCR)에 정식 난민 신청 등록시키자”는 의견이다. 나는 모스크바에 UN이 있는 줄도 몰랐으나 동의했다. 모스크바 북한대사관에서는 벌목공 탈북사태가 이어지자 그들 체포를 위해 삼엄한 경계를 펼 때였다. 며칠 후 아침 일찍 우리 3명(2명 특파원과 탈북자)은 UN난민기구에 들이닥쳤다. 깜짝 놀란 유엔에선 “불시에 기자 출입은 안 된다”며, 탈북자와 나만 통역으로 받아줬다. 유엔난민기구 이사벨 담당자는 “이번 케이스가 북한 주민의 첫 유엔 난민등록”이라고 밝혔다. 난민담당자는 탈북자(이민복)에게 “북한에서 태어나 UN에 올 때까지의 지난 과거 내용을 상세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내겐 “영어와 불어 두 언어 중 하나를 택해 통역하라”고 했다. 유엔 사무실에서 통역을 할 때였다. 이 씨는 시종 책상다리로 꼬고 앉아 싱글벙글 유엔 질문에 답해 내가 민망했다. 탈북자로서 조심스럽고 불안한 기색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2일간을 사진 제출 등 꼬박 난민등록과정을 끝내니, 이번엔 벌목공인 다른 탈북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도 유엔에 등록을 시켜 달라는 것이다. 그들끼리는 서로 소통하는 듯했다. 두 번째 등록 마무리 때 마침 미국에서 온 한인 선교사(목사)에게 인계하고 손을 놓았다. 탈북자 일에만 매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대사관 C공사(국정원 소속) 사무실에 들러 탈북자 UN 등록일을 알렸다. C공사는 놀라면서 “아니, 그간 기자직에서 직업을 바꾸셨소?” 하며 못마땅한 표정이다. 곧 자리를 떠났지만 좀 어안이 벙벙했다. 자랑할 일도 못 되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일도 아니지 않는가. 남의 업무 범위를 건드린 것인지 꽤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이 씨는 북에 남아 있는 부인과 아들에게 돈을 못 보내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 특파원들도 한국에서 모스크바로 봉급 송금이 안 돼, 핀란드 헬싱키 등 인근 서방 도시에 예금계좌를 열고 다닐 때였다. 내 경우 가족이 있는 토론토에 미화계좌를 열고 2-3개월에 한 번씩 다녀왔다. 나는 이씨에게 “토론토에선 북한송금이 가능하니, 토론토에 갈 때 원하면 돈 심부름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좋아라고 내게 미화 1천 달러를 주면서 가족 이름, 고향 주소 등을 전했다. 그리고 두 달쯤 뒤인가. “송 기자님. 아내한테서 돈 잘 받았다고 모스크바로 편지가 왔어요. 정말 잘됐어요” 하며 편지를 보여줬다.

북강원도 평강군 이산가족 산소 방문
북강원도 평강군 이산가족 산소 방문

문제는 그의 다음 송금 때 일어났다. 다시 1천 달러를 부탁해 토론토에서 보냈다는데 이번엔 못 받았다는 것이다. 토론토 북한 창구에 알아보니 “요즘 평양이 왠지 이상해요. 많은 미주교포 송금이 전달 안 돼 지금 난리라 계속 알아보고 있으니, 조금 기다려보라”는 것이다. 이씨에게 당시 사정 그대로를 전했다. 알고 보니 그즈음 북한은 재정상태가 아주 나빠지기 시작했던 때였다. 북한 내부적으로 무슨 이상이 있는 듯했다. 북한 일부 지방에선 배급도 끊기고 첫 아사자가 생겼다는 소문도 돌았다. 김일성 주석은 그해(1994년) 7월 묘향산 특각(초대소)에 머물던 중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민복은 마침내 1995년 1월 유엔 창구개설을 통한 1차 탈북자로 대한민국 땅에 안착했다. 그때 두 번째 유엔에 등록시킨 벌목공 탈북자도 함께였다. 그즈음 캐나다 전충림 북한 창구대표도 갑작스레 급성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평양 돈 송금문체도 아직 미결된 상태였다. 나도 그때 미화 3백 달러를 토론토에서 북 친척에 송금했었다. 나중 방북 후 친척을 만났더니 못 받았다고 했다. 문제는 이씨 돈이었다. 도와주려다 문제가 생겼는데 어찌 됐든 마무리해야 했다. 그는 한국에 나간 후 자주 국제전화로 돈 독촉을 했다. “캐나다 그 좋은 나라에 살면서 속히 내 돈을 돌려줘야지요” 한다. 당초 UN 난민 일부터 그를 돕다가 불시에 빚쟁이가 돼 버린 셈이다. 나보다 만 11살 아래인 탈북자와 무슨 구차한 얘길 자꾸 나누겠는가. 돈 송금을 하고 그와 완전 연락을 끊었다. 이 씨도 그 후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아라’는 식 같아서 씁쓸했다.

또 이씨를 유엔에 등록시킬 때 간곡히 말했다. “내가 도와줘 유엔에 처음 등록했다는 사실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 특히 글을 쓰게 되면 절대 내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건 나중 다시 방북취재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때 북에서 문제로 삼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95년 초 이씨는 한국에 나가자마자 기독교 관련 잡지에 내 이름을 밝혔다. 한국에 닿자 곧 미 대사관에 근무하는 한 교회 여성과 결혼해, 북미 곳곳 여러 단체 등 초청 강연을 다닌다고 들었다.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에선 이씨가 북한 과학원 과학자라고 치켜세우며 크게 소개했다. 나는 그가 옛 50-60년대 농촌 깜부깃병 농업전문가로 기억할 뿐이다.

북중 국경다리 도문 과 두만강

나중 그는 북으로 풍선을 띄운다는 소문을 언론을 통해 접했다. 그간 꽤 유명 인물이 돼 활동하는 듯싶었다. 최근 한국 정부에선 ‘대북 전단 금지법’을 공포했다. 이 또한 내겐 납득 안 가는 정부 처사였다. 현재 산적해 있는 다른 국가과제보다 대북 전단 금지법이 그리 시급한 것인가. 내 시각으로는 우리네 정치하는 분들은 정치가(statesman)는 드물고, 대부분 정치꾼(politician) 범주에서 못 벗어나는 것 같다.

프랑스 퐁피두 전 대통령은 “정치가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고, 정치꾼은 자신을 위해 나라를 이용한다”고 외쳤다. 영국 어느 유명정치학자 또한 정곡을 찌른 말을 남겼다.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하고, 정치꾼은 다음 선거만을 생각한다”는 말이다.(계속)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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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2021-06-22 12:26:28
이민복씨면 대북전단살포계 대부? 나 이사람 정말 싫어하는데~!!!!

이민복 2021-01-29 17:08:25
50-60년대 깜부기병 전문가라는 뜻은 송기자님이 보건데 농업과학원연구원 같지는 않다는 뉴앙스.
이에 대해 송기자님 멜주소로 북한에서 가져온 연구사업일지와 일기장을 보내드렸습니다.
한편 멜내용에 추가드린 것은 - 오해를 푸시고 앞으로 서로 긍정적으로 교류했으면 한다고 당부드렸습니다.
이 댓글도 올리지 않으려다가 -누구나 보는 사이버공간인데다가 캐나다에서 대북전단에 참여하신 이경복 회장님을 비롯한 여러 참여자들에게 좋지 않은 오해소지를 드릴 것을 념려하여 해명차원에서 올립니다.
참 다행인 것은 송기자님도 대북전단반대법을 통과를 비판하시는 모습에 동지적 유대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부디 사실에 기초하여 긍정적으로 관계개선을 기원드립니다.

이민복 2021-01-29 17:02:12
세번째 댓글 이어 씁니다.
1천불 맡긴 것을 북의 가족에게 보내달라고 한 사실은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송금한 영수증등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없었지요. 아마 송기자님이 기억착오를 범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송기자님이 나에 대한 비평 세번째는 한국에 들어와서 인터뷰하면서 송기자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여 북한방문에 위험을 조성했다는 것인데 - 사실과 다릅니다. 송기자님이 탈북자인 저를 도왔다는 것은 이미 모스크바있을 때 강원일보에 <우리를 살려주세요> 연속기사로 송기자님 자신이 세상에 알린 상황이었으며 따라서 남한에 가면 자신얘기를 하지 말아달라는 약속도 없었습니다.
송기자님이 저에 대한 네번째 비평은 - 농업과학원 연구원이라고 유명하게 활동하는 것 같지만 자신이 보건데는 50년대 60년대 깜부기

이민복 2021-01-29 16:55:51
두번째 댓글 이어 씁니다.
허진선생님도 저희를 내보내는 이유는 - 한국정부가 북한을 자극한다고 탈북자를 받지않는데 언제까지 당신들을 데리고 있을 수있느냐.. 이유는 이해하지만 탈북선배로서 탈북후배를 엄동설한에 나가라는 것이 불평. 다행이도 모스크바선교연합 박시경목사님이 집을 마련하여 거처하게 되었음.
둘째로 송기자님이 나에대한 비평근거는 - 300불을 송기자님의 도움으로 북에 가족에게 전달한 것은 정말 큰 도움받은 것임. 당시 영수증도 가져오고 또 북에 가족 편지에서 받았다는 확이. 문제는 1천불인데 이돈은 망명현지에서 돈을 맡길 데가 없어 송기자님에게 맡겼던 것이고 차후 한국에 들어온 제가 채근한 것인데 - 송기자님은 위 기사에서 가족에게 보냈는데 전달이 안된 것을 돌려달라고 하였다는 것인봐

이민복 2021-01-29 16:44:56
누구나 볼 수있는 사이버공간에서 제 실명을 거론하여 비평하였기에 해명차원에서 댓글남깁니다.
송기자님은 1994년 3월 경 탈북후 처음 만났던 유영길목사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유목사님과 송기자님은 친척간이라고 하였구요.
위 기사에서 저에 대한 것에 부정적인 첫째는 살려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 그 실례는 제가 기거하고 있던 고련인 허진선생에 대해 불평. 이 지적은 사실입니다. 불평이유는 건설공출신 탈북자 이진호와 저는 5개월동안 밤낮작업하여 100평가량의 다챠 2층까지 완공시켜드렸는데 작업이 끝나자 300불을 주며 나가달라는 것. 한겨울에 어디 갈데없는 처지- 허진선생은 북한유학생출신으로 1950년대 탈북한 선배로서 내가 알고 있는 집만도 모스크바에 아파트 3채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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