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도쿄서 2.8독립선언 102주기 기념식 열려
日, 도쿄서 2.8독립선언 102주기 기념식 열려
  • 동경=이승민 객원기자
  • 승인 2021.02.1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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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을 주도한 재일조선유학생들.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재일조선유학생들.

(동경=이승민 객원기자) ‘2.8독립선언 제102주년 기념식’이 지난 2월8일 도쿄 수이도바시역(水道橋駅) 근처에 있는 재일본한국YMCA 한국문화관에서 개최됐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이날 행사에는 행사 관계자, 출연자, 보도진 등 일부 인원만이 참석했다. 행사는 2.8독립선언의 노래, 국민의례, 정순엽 재일본한국YMCA 이사장의 개식사, 이남우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차장의 기념사, 강창일 주일한국대사 기념사, 오영석 재일본한국YMCA 부회장 성경봉독, 조영철 재일대한기독교회 총회장 기도, 김건학 재일한국유학생연합회 사무국장의 2.8독립선언 전문 낭독, 여건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단장의 치사, 엄서연 동경한국학교 학생 노래(신아리랑), 김종기 동경희망그리스도교회 명예목사 축도, 정승영 재일본대한민국청년회 중앙본부 회장의 만세삼창 순으로 진행됐고, 전 과정이 온라인으로 생중계됐다.

정순엽 이사장은 개식사를 통해 “2.8독립선언에는 청년들의 의연한 기개와 애국정신이 서려 있다. 조국을 되찾겠다는 정의와 자유를 지향하는 의지와 힘이 강하게 어려 있음을 알 수 있다”며 “체포당한 우리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헌신한 후세 타츠지 (布施辰治) 변호사를 비롯해 독립운동을 이해하고 지원했던 일본인 지식인들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고 강조했다.

정순엽 이사장이 개식사를 하고 있다.
정순엽 이사장이 개식사를 하고 있다.

이남우 대한민국 국가보운처 차장은 영상 기념사를 통해 “2.8독립선언은 조국독립을 향한 확고한 의지를 우리 민족은 물론 세계만방에 알렸던 중요한 사건이었다.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체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박열, 김지섭, 서상한, 이봉창 의사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활약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강창일 주일대사는 김용길 정무 공사가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우리는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면서 한일 양국이 공생·공영하는 미래지향적 발전과 협력 관계가 되도록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남우 차장이 영상으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이남우 차장이 영상으로 기념사를 하고 있다.

‘2.8독립선언’은 1919년 2월8일, 조선인 유학생으로 구성된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600여 명이 도쿄에서 목숨을 걸고 조선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사건이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됐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됐고, 국내외에서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항일 독립운동의 불씨가 됐다.

최팔용, 이종근, 송계백, 김도연, 이광수, 최근우, 김철수, 김상덕, 백관수, 서춘, 윤창석 등 11명은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도쿄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독립선언서를 선포했다. 당시 유학생이던 이광수는 와세다대학 앞에 위치한 소바집 산쵸안(三朝庵) 2층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이 소바집이 대를 이어 4대째(加藤峯子) 112년을 영업해오다 2018년 7월31일 아쉽게도 폐업했다.

재일 조선유학생들에게 2·8독립선언을 자극하고 촉발시킨 계기는 미국 윌슨 대통령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었다. 1919년 1월18일 열리는 파리 강화회의에 재미한국인 이승만(李承晩) 민찬호(閔贊鎬) 정한경(鄭翰景)이 윌슨의 선언을 조국독립으로 적용시키기 위해 1918년 12월 한국대표로 파견되자, 일본 유학생들은 독립을 열망하는 조선인의 단합된 의지를 만방에 알려, 파리 강화회의에 반영해야 한다는 절실함에 거족적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해 독립의 꿈을 성취할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일본 유학생을 총괄하던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8년 12월29일 메이지(明治)회관에서의 망년회와 1919년 1월6일 동경조선YMCA회관(현 재일본한국YMCA회관)에서의 웅변대회를 열어 이러한 뜻을 가시화시켜갔다.

웅변대회에서 연사로 나선 윤창석(尹昌錫) 서춘(徐椿) 이종근(李鍾根) 박정식(朴正植) 최근우(崔謹愚) 김상덕(金尙德) 안승한(安承漢) 전영택(田榮澤) 등은 “지금의 정세는 우리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절한 시기다. 마땅히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천방법은 임시실행위원을 선출해 일임하기로 결정했다.

임시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鎔) 전영택 서춘(徐椿) 김도연(金度演) 백관수(白寬洙) 윤창석(尹昌錫) 이종근(李琮根) 송계백(宋繼白) 김상덕(金尙德) 최근우(崔謹愚) 등이 선출됐으나, 전영택이 병으로 사임하고 이광수(李光洙) 김철수(金喆洙)가 보충되어 모두 11명으로 구성됐다.

 102년 전 2.8독립선언 당시의 동경조선YMCA회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일본 국회에 보낼 민족대회소집청원서는 이광수가 기초했으며, 송계백이 국내로 들어가 한글활자와 인쇄기 및 운동자금을 구하고, 최린(崔麟) 현상윤(玄相允) 최남선(崔南善) 등과 만나 재일 유학생들의 거사에 상응해 국내에서도 궐기할 것을 요청했다.

이광수가 독립선언서, 결의문, 소집청원서 등 기초문이 완성되자 임시실행위원회는 이광수를 즉시 상하이로 파견해 조선독립의 취지를 전세계에 알리게 했다. 이광수는 2월5일 영국 미국 프랑스에 영문으로 된 독립선언을 타전하고 도쿄에서의 2·8독립선언과 보조를 맞추어 2월8일, 차이나 프레스(The China Press),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The North China Daily News)에 독립선언서의 게재를 부탁해, 9일과 10일에 각각 보도됐다.

장덕수(張德秀)는 상하이에서, 여운홍(呂運弘)은 미국으로부터 도쿄에 잠입해 도쿄에서의 2.8독립선언 계획에 합류해 힘을 합했다.

거사의 날 1919년 2월8일 오전 10시경, 임시실행위원들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및 공사관과 일본 국회의원, 조선총독부, 그리고 각지의 신문사와 잡지사, 학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이날 오후 2시, 동경조선YMCA 강당(현 재일본한국YMCA 회관)에는 조선 유학생 학우회 총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도쿄 유학생 거의 전부를 망라한 600여 명이 모여들었고 회장 백남규(白南奎)가 개회를 선언한 다음 최팔용의 사회로 대회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바꾸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이광수가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소바집 산쵸안(三朝庵).

이윽고 독립 선언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됐고, 백관수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자, 장내는 독립만세소리로 가득찼다. 유학생들은 거리로 나가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려 시도했지만, 대회장을 감시하던 일본 경찰들에 의해 주모자 27명이 체포되고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장은 유학생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지도부가 구속되자 유학생들은 이달(李達)을 중심한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해 2차 독립선언 계획으로 일본 국회에 독립을 청원하기로 했다. 2월12일, 100여명의 유학생들이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황궁 앞마당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에 모여 독립선언을 다시 발표하고 뜻을 펼치려 시도했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이달 등 지도부 13명이 붙잡히고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또 다시 지도부가 구속되자 변희용(卞熙鎔) 최재우(崔在宇) 장인환(張仁煥) 등이 중심이 되어 3차 독립선언 계획을 세웠다. 2월23,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 촉진부 취지서를 인쇄해 역시 히비야 공원에서 배포하고 대대적인 조선독립운동을 펼치려 했으나 배포 도중에 체포되고 말았다.

2.8독립선언문은 국내로 밀반입되어 3.1독립선언문의 기초가 됐고 각종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한편, 후세 타츠지 (布施 辰治 1880-1953) 변호사는 조선, 대만 등 식민지 국민들의 권리보호를 위해 각종 사건을 도맡아 변호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미야기현의 농가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에는 기독교에 입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사회적 약자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변호사가 된 후 서민들의 권리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2.8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

한일합방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본 그는 조선의 독립투쟁과 민중운동을 적극 지지하였다. 1911년에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로 일본경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1919년엔 2.8 독립선언의 주역인 최팔용, 송계백 등 조선청년독립단의 변론를 맡았다.

1920년엔 일본황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의 변호를 맡았으며 조선인 학살사건을 비판하다가 치안당국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변호사의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고 형을 살기도 했다.

전후에 변호사로 복직되자 도쿄 조선고등학교 사건 등 재일한국인과 관련된 사건은 도맡아 변론 했고, 1946년엔 한국을 위해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저술하기도 했다.

2004년,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애족장(建国勲章愛族章)을 받아 일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여자가 됐다. 1953년 9월13일(향년 73세), 사망해 도쿄 토시마구(豊島区)의 상재사(常在寺)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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