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1] 1989년 평양축제에서 만난 임수경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1] 1989년 평양축제에서 만난 임수경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2.15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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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송광호와 임수경

북한 얘기를 나누게 되면 지난 1989년 여름 평양축전 때 일들이 먼저 생각된다. 당시 임수경 대학생 밀입북 사건 때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분단 44년 만에 일어난 전후세대 첫 대형사건이었고, 내게도 큰 파급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이제는 오랜 옛일이 돼 버렸지만 당시의 취재사진, 현지자료 등을 통해 그 시절 일을 회고해 본다. 약 32년 전 얘기다.

1989년은 그해 첫 달부터 내겐 북한 관련해 잊지 못할 한 해였다. 1월은 현대 정주영 회장이 금강산개발 건으로 평양을 방북했던 시기였다. 그해 7월 초 2차 방북 때는 제13차 청년학생축전(일명 평양축전)이 열렸다. 그때 예기치 못했던 임수경 방북(밀입북) 건이 터진 것이다. 열띤 취재경쟁과 함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었다. 당시 임수경 기자회견장에도 있었던 나는 그녀를 옹호한 글로 인해서였다. 토론토 교포사회 일부에서 비난의 파편들을 뒤집어썼던 쓴 경험이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평양축전 전후 사정은 이러하다. 북한에서는 아시아 처음 개최된 국제적 행사였다. 평양축전(7/1-7/8)은 8일간 177개국, 2만2천명이 참가했다. 이때 북미주에서는 2백명 남짓한 한인교포들이 모여들었다. 만일 그해 5월 발생했던 북경 천안문 유혈사태만 아니었다면, 더욱 많은 미주교포들이 참가했으리라. 평양방문은 북한대사관 사증발급(비자)과 항공권구입 때문에 최소 하루는 북경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때 미주교포들은 북경의 유혈진압으로 인한 흉흉한 중국분위기가 두려워 방북신청을 취소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당시 미주 인솔자대표였던 양은식(LA) 박사는 내게 “하필 평양축전을 눈앞에 두고 천안문사태라는 악재로 인해 많은 미주교포들이 방북을 포기해, 모처럼 좋은 북한방문 기회를 놓친 교포들을 아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 어느 국가주민이든 평양축전 참가를 신청만 하면 쉽게 승인을 해주던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또 북에서는 해외동포들을 위해 백두산과 금강산 등지를 무료 관광시키는 등 큰 선심을 베풀던 특별 기간이기도 했다.

북한 고려항공

그때 나는 토론토에서 개인으로 미주(LA)주관부서에 신청해 승인이 났다. 그때 캐나다 교포지 들과 함께 동참하길 원했으나, 전부 망설이는 통에 결국 단독신청으로 참가케 된 것이다. 미주지역 교포언론 역시 한 군데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렇게 눈치를 보던 시대상황이었다. 사실 잘 이해가 안 됐다. 왜냐면 당시 노태우정권은 88년 7.7선언으로 ‘해외동포의 북한방문 허용’을 이미 선포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40년 이상 꽉 막혀있는 그 북녘땅 취재를 북미 교포언론들이 왜 외면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북한당국에서 공개리에 ‘멍석을 깔아놓고 해외 누구든 방문 기회를 주었는데도 마다한 이유’를 모르겠다. 한때 북미창구였던 토론토 친북계 신문을 발행하던 전충림 사장 부부는 따로 참가했다. 평양에서 호텔 배정 때 전충림 사장(95년 사망) 덕을 봤다. 전 사장은 당초 배정된 단체호텔에서 나를 기자호텔로 옮겨 주었기 때문이다.

미주교포 주관자는 평양축전 참가인원이 많으니 제1진에서 제3진까지 나누어 방북날짜를 정했다. 나는 제2진에 속했다. 간단히 짐을 꾸려 방북 길에 나섰다. 밴쿠버를 거쳐 북경공항에 밤늦게 도착하니 안내원을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을 헤매는데 마침 3진으로 도착한 미주 교포단(주로 주최간부와 학자 및 교수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사해호텔에 들었다.

호텔 방엔 미주통일단체 간사인 J씨와 함께였다. 개성이 고향이라는 그는 체격처럼 통이 크고 인간미가 넘쳤다. 큰형님 같았다. 나중 알게 됐지만 J씨는 간사명칭이었으나, 미주교포단을 이끄는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그의 털털하고 꾸밈없는 성격 때문에 모든 교포들에게 호감을 사고 있었다. J씨는 이산가족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자주 방문했다면서 “어떻게 캐나다에서 혼자 오셨소? 이산가족이오?”하고 물었다. “아니에요. 지난 1월 한번 관광으로 왔었는데, 이번 축전행사는 방문기회가 좋은 것 같아 다시 신청했지요.” “보기보다 용기가 좋소. 북한방문은 두려워 못 오는 사람들이 무척 많아요. 전충림 선생은 안 옵니까?” “곧 따로 부부가 오실 겁니다.”

그는 신랄하게 북한대사관을 비판하기도 했다. “북한을 방문하려면 반드시 북한대사관을 거쳐야 하오. 비자발급 때문이지요. 그런데 직원들은 정도 이상 불친절합니다. 북한당국에 몇 차례 건의했으나 잘 고쳐지지 않아요. 생각해 보시오. 40년 이상 단절돼 있다가 이산가족을 만나기 위해 북한대사관을 처음 찾는 교포들의 마음을. 얼마나 무서워하고 벌벌 떨겠소?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송광호 평양5.1경기장 앞

다음날 아침 J씨는 교포들 여권들을 모두 거두어 북한대사관에 비자를 받으러 갔다. 교포 일행은 북경 자금성을 관광한 후 공항으로 나갔다. 청명한 날씨였다. 어수선했던 마음이 한결 가라앉아 있었다. 북경공항은 수많은 미주교포들로 인해 마치 도떼기시장 같았다. 80년대 북경공항은 크지 않았다. 어쩐 셈인지 오후 2시 비행기를 놓쳤다. 힘들게 북경세관구역으로 들어서니 세관 X-레이 고장으로 손님들이 밀려 있다. 중국세관 3명 직원이 웃으며 느리게 움직이는 동작이 눈에 들어왔다. 밖의 대기 손님들은 아예 신경도 안 쓰는 눈치다. 더위를 참으며 할 수 없이 한 시간가량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일일이 원시적인 짐 검사를 마치고 출구로 나갔다. 이미 시계는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공항에서 4시간 이상을 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 6시30분. 조선민항기는 드디어 평양을 향해 하늘 높이 날기 시작했다. 기내에선 지난번과 같이 한국(조선)어와 영어 두 가지 언어가 안내방송으로 흘러나왔다. 내 경우 역시 두 번째 방북이니 처음 때와는 달리 여유가 있었다. 잠시 꾸벅하고 졸다 주위를 살피니 대화 소리는 없어지고 전부 창밖을 내다보느라 야단들이다. 비행기는 이미 북한 땅에 들어선 것이다. 대부분 교포들이 초행길로 보였다. 눈을 꼭 감고 정자세로 상념에 잠긴 사람, 이마를 창에 대고 한 치의 눈길도 창밖에서 벗어나지 않는 광경, 어떤 이는 눈시울이 뜨거워서인지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든 사람도 있었다.

비행기는 어느덧 평양순안공항에 닿고 있었다. 공항복판에 위치한 커다란 김일성초상화가 눈에 부각됐다. 틀림없이 북한 땅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거기에도 너무나 똑같은 남쪽의 산하가 펼쳐져 있었다. 북녘땅도 진정 우리의 땅, 우리 강산이거늘 왜 위화감을 느껴야 하는지. 나만의 감회이겠는가. 해는 이미 서산에 지고, 짙은 어둠이 서서히 온 누리를 덮고 있었다.

공항에서 일행들 세관검사는 예전과는 달리 예상외로 철저했다. 국제적 축전행사 때문으로 여겨졌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주위는 방북자 인파로 북적거렸다. 일부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마지막 일행 속에 묻혀 서산호텔행 버스에 올랐다. 서산호텔은 당시 평양축전을 위해 평양 외곽지에 새로 2등급 30층 호텔을 건축해 놓았다. 잠깐 체류했지만, 언어, 음식 등 익숙지 못한 중국환경에서 벗어나니 살 것만 같았다.

임수경 고려호텔

이틀 후. 나는 평양 중구역 중심지역인 평양호텔로 옮겨졌다. 평양호텔은 외신기자호텔로 지정돼 있었다. 토론토 전충림 사장이 “송광호교포는 캐나다기자이니, 기자호텔로 옮겨줘야 한다”고 요구해서 이루어졌다 한다. 미주단체관광 팀에서 벗어나 독자적 취재활동을 하게 됐다. 축전시작 하루 전인 6월30일이었다. 구형벤츠차와 운전기사 및 안내원이 배정됐다. 안내원 위로 책임지도안내원이 있고, 총책임자격인 참사가 있었다. 이들 중 기억나는 이름은 이철용 참사다. 더운 여름철인데도 늘 짙은 양복을 입고, 조용한 목소리로 무엇이든 도움을 주려는 진정성이 엿보였다. 따뜻하고 영국신사 같은 분이었다.

책임지도원은 나를 데리고 기자센터로 이용하고 있는 인민대궁전으로 갔다. 거기서 사진을 찍고 기자명찰과 외신기자완장, 개인우편함 열쇠를 주었다. 지도원은 “이번 축전기간 다른 외국기자들에게는 시설사용료로 250달러를 받지만, 교포기자에겐 무료로 했다.”고 귀띔해주었다. 무료든 유료든 북한에서 노란색 기자완장을 받고 취재활동을 인정받은 첫 남쪽기자(북미)가 된 것이다. 기자수속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점심을 먹던 중, 전대협대표가 공항에 도착해 고려호텔로 향해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곧장 고려호텔로 달려갔다. 평양호텔에서 고려호텔까지는 차로 5분 거리.

도대체 전대협 대표 임수경은 어떻게 생긴 학생일까 궁금했다. 이왕이면 잘생기고 똑똑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남쪽을 대표하는 것인데. 오는 도중 군중 때문에 차가 막혀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는 소식이 왔다. 나는 호텔 2층 난간에 미리 자리를 잡았다. 호텔정문주위엔 캐나다 최홍희 태권도총재와 사범들 모습이 보였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전금철 부위원장 얼굴도 드러났다.

마침내 밖으로부터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임수경이 호텔정문에 밀려들어서고 주변은 한마디로 난장판, 난리법석이었다. 언뜻 임수경 모습을 보는 순간 안도의 숨이 쉬어졌다. 저 정도 얼굴이라면. 2층 아래로 계속 셔터를 눌러댔다.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이 잠깐 보이다가 인파 속에 다시 묻혀버린다. 연약한 학생이 저러다 다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호텔 옆에 있던 전금철 부위원장을 비롯한 고위급들도 어느새 군중 때문에 밀려나 있었다. 그들도 어쩔 수 없이 한편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임수경 기자회견장.(평양 도착성명 발표)

엄격히 통제되고 제약된 북한사회에서 이런 혼란과 북새통을 이루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나중 임수경 기자회견 때는 해외 기자들 중 6명을 선착순으로 줄을 서게 해 질문을 받았다. 나는 5번째로 운 좋게 들어갔다. 북한 전역에 TV가 방영된 이날 기자회견 때 내 얼굴까지 기억됐는지 이후 평양과 원산 등지 서너군 데서 “TV에서 봤다”는 주민들 인사를 받았다.

하루아침 ‘통일의 꽃’이 된 이후의 임수경 얘기는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므로 생략한다. 단지 임수경 학생이 김일성 주석에게 아버지라고 불렀다느니, 꽃다발을 주었다느니 하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내 시각으론 순수한 대학생이었을 뿐 결코 종북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의 평양 내 몇 군데 대학방문으로 인해 5명 한국대학생이 북한대학 내 명예학생으로 등록된 기록을 전한다. 또 당시 노동신문 7월12일(수)자에 실린 독일작가 루이제 린저가 임수경에게 보낸 편지도 함께 옮긴다.

*임수경(외국어대학) 평양 김형직 사범대학 명예학생으로 등록 *박혜정(서울대 인문대)/남태현(서울교육대 윤리교육학부)/한영현(한양대학) 김책공업 종합대학 명예학생으로 등록 *박종철(연세대학) 평양 김일성 종합대학 등록).

<편지> 평양에 가 있는 임수경에게

사랑하는 수경아. 나는 너의 의로운 행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격동된 심정을 금할 수 없구나. 나는 너에게 경탄의 인사를 보내면서 언제나 너의 편에 서 있을 것이라는 것을 확언한다. 여성으로서 그러한 용단을 내렸다는 것은 실로 얼마나 장한 일이냐. 너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여성들과 청년들을 위하여 역사에 영광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게 될 것이다. 열렬한 인사를 보내면서.

작가 루이제 린저 1989년7월5일 로마.

루이제 린저(1911-2002)는 내 학창시절 ‘생의 한가운데’(전혜린 역)저서로 인기 높던 유명작가였다. 훗날 그녀인생에 대한 어느 대학교수의 부정적 평가와 일부 언론에서 그녀를 혹평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참고로 적는다.

독일 루이제 린저 (백두산 범민족대회)

임수경 기자회견 이틀 전 뉴욕 거주 A기자가 같은 호텔 내 방을 함께 썼다. 홍콩을 거쳐 막 평양에 도착했다 한다. 그 역시 두 번째 방북으로 운동권 출신이었다. 1차 방북 건으로 뉴욕 세계일보에서 해직당해 쉬고 있었다. 서울 한길사(출판사) 후원으로 재방북했다 한다. 나이는 많이(13세) 아래지만, 적극적인 성격으로 쾌활했다.

그러나 가만 보니 나 같은 입장이나 처지가 아니었다. 이미 전금철 부위원장 등 북 일부 고위인사가 A를 잘 알고 인정하고 있었다. A에게도 따로 자동차와 안내원 2명을 붙여주었다. 나와는 방만 같이 쓰고, 금강산 갈 때만 함께 움직였지, A는 거의 따로 북측 사람들과 행동했다. 임수경 기자회견 때도 현장에 없다가 회견이 끝날 때 나타났다. 도대체 어디로 그렇게 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운동권 출신이니 그만큼 북에서 특별대우 받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는 주관이 뚜렷해 보였고, 늘 명랑했다. 그 후 나와는 나이를 떠나 오랜 세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평양축전 당시 그 자신 실수가 있었다면 미처 사진기를 챙기지 못하고 방북한 점이다. 어찌 보면 전장 터에 총을 두고 온 셈이나 그건 그의 문제였다. 그가 뉴욕귀환 후 한길사와 한겨레신문에 특종 건을 터뜨릴 때였다. 사진이 없으니 A 부부 둘이 급히 뉴욕에서 토론토 내 집까지 10시간을 운전해 달려왔다. 당시 나는 우여곡절 끝에 글을 발표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려있었고, 일단 포기상태였다. A는 그 많은 내 사진들 속에서 서너 장만 뽑더니 식사도 않고 급히 돌아갔다. 아마 기사, 사진송고로 급했을 것이다.

A는 단독취재 특종으로 일약 하루아침에 대한민국의 유명 기자가 됐다. 나는 글 한번 게재 못 하고 죽을 쑤고 있던 참이다. 더구나 임수경 부친인 임판호(전 지하철공사 간부 은퇴/서울신문 사회부장 역임)씨가 딸 임수경 건으로 대 국민사과문을 발표했을 때, 한 교포지에 임수경을 옹호한 공개서한 글을 써 더욱 코너에 몰렸다. 한국에 나가 임수경 부친에게 사진 등을 전달했다.

임수경과 최홍희 태권도총재팀 

강원일보 고 최종명 이사(서울지사장/편집국장 역임)역할이 컸다. 임수경 부친 초대로 평창동 임수경 집에도 3번 최 선배와 같이 들렀다. 부친보다 모친이 대단한 여장부였던 점을 기억한다. 그때는 임수경이 나중 국회의원이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국회의원이 된 후 그녀 부친과도 함께 한번 셋이 만났다. 그때 오랜 기간 모아두었던 사진, 책자, 달력 등등 자료일체를 전했다. 그 이후 소식이 끊겼다. 카톡 연결이나 이메일 소통도 안 됐다. 사실 나로선 또 꼭 연락할 일도 없었으나 결말이 허무했다.

뉴욕 A과는 여전히 소식을 주고받았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미 시민권을 포기하고 아예 한국정치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잘 풀리는 듯 보였다. 김원웅(현 광복회장) 개혁당 당수 대변인으로 시작했다. 좀 있다 들리는 소문이 서울 송파구 한 군데에서 국회의원으로 나온다 했다. 공천조차 힘들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아는 미 어느 주립대학 한인부총장이 김대중 씨가 “한국에 나와 같이 한번 일해보자”는 말을 새겨듣고, 부총장직 사표를 내고 한국에 나갔다 실패한 경우를 봤기 때문이다. 그는 아예 김대중 씨 접견조차 못했다고 한다. 뒤늦게 눈치를 채고 그냥 미국으로 돌아와, 새로 사립대학 교수직을 구해 오늘까지 오랜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 다행히 미 시민권은 포기 안 해 다른 지장은 없었다고 한다.

A 역시 한국에서 뜻했던 일이 제대로 안 풀리자 결국 정치 일을 접었다. 그는 잠깐 총리실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뒤 미국영주권을 다시 따고 최근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도 어느 틈에 60을 넘었다. 나는 진정으로 그가 잘 되기를 바랐다. 좀 신중치 못한 단점은 있었으나, 장점이 더 많은 똑똑한 후배였다. 누구든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계속)

회의사당 앞 임수경과 송광호.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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