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2] 한국서 태어났지만 북에서 살아야 했던 K노인 스토리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2] 한국서 태어났지만 북에서 살아야 했던 K노인 스토리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2.2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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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천지에서 본 백두산
천지에서 본 백두산

천안 사는 탈북자 K노인(30년생)이 최근 세상을 떠났다. 91세 나이였다. 젊은 시절 한때 화려한 재능을 지녔던 서울태생 여성노인이다. 6.25전쟁 시기 잠깐 집안생계를 위해 북 연예인 공연단 틈에 끼게 됐다 영영 남북이 막혀 평양에 남게 됐던 이산가족이다. 평양에서 나중 함경도로 강제이주 후 77세 나이로 가족들과 차례로 탈북해 고향 서울로 왔다.

이 때문에 한국 입국일이 식구마다 햇수가 다르다. 그녀 자녀들 중 일부는 다시 토론토로 재이주를 시도했으나 실패해 천안에 모여 살았다. 오래전 그들 가족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때 K 노인일기와 딸의 탈북기록 등을 전해 받았다. 그들은 가까스로 남쪽으로 내려왔으나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반세기 넘게 북녘에 살다가 꿈에 그리던 고향 땅 서울. 그러나 형제 등 친척들은 진작 미국에 이민했다. 또 친척들이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았다. 세월이 너무 흘러 혈육 정도 다 말라버린 듯했다. 그녀 가족은 거의 잊힌 존재나 다름없었다.

K노인 가족을 북에서 구출해 낸 샌프란시스코의 친여동생 강원숙(89세)씨만은 달랐다. 독실한 개신교인인 여동생은 거의 매일 카톡 등으로 소식을 주고받는다. 두 가족은 똘똘 신앙으로 뭉쳐있다. 그 외 친척은 오늘까지 얼굴 한 번 못 본 친형제도 있다고 한다. 어찌 됐든 고된 역경을 헤치고 한국 땅까지 오게 된 것을 하늘에 감사히 여기고 있다. K 노인스토리는 특이한 가족사를 지닌 또 하나 가슴 아픈 이산가족 경우였다.

지난 임수경 관련 글 중 주요점 한 가지를 덧붙인다. 임수경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당시 그녀가 북한 주민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했다. 경천동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언제 다시 그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임수경의 자유분방한 행동거지와 옷차림, 꾸밈없는 태도 등은 북녘땅 주민에게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움직임은 북한지역 가는 곳마다 화제가 됐고, 모처럼 북녘 개방 분위기를 한껏 높였다.

평양소주공장
평양소주공장

평양축전 때 북 주민들 가운데 청바지도 등장했다고 들었다. 그때 일본교포가 전한 말이다. 청바지 운운은 지금 같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그때는 김일성 시대였다. 평양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끓었고, 당국도 통제를 안 해 비교적 자유로움 속에 축전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평양 거리엔 라면을 끓여 파는 노점상도 늘어섰다. 그때 혜성과 같이 나타난 임수경 학생. 그녀는 남쪽 젊은이의 발랄함을 적나라하게 선보인 선구자 역할로 보였다. 남쪽은 획일적인 사회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민들은 부지불식간에 깨닫고 한편 부러운 마음도 지니게 했다는 것이다. 북녘 주민에게 무의식중 남쪽 환상과 호기심을 안겨준 대형사건이었다. 뒷날 탈북자들로부터 재확인된 소식이기도 했다.

태권도창시자인 최홍희 태권도총재 내용을 좀 부연한다. 그는 박정희의 군 선배로서, 당시 국기태권도를 이용한 3선 개헌지지압력을 항거해 캐나다로 망명해 미움을 샀다고 주장했다. 이후 한국정부 압력으로 해외 태권도제자들조차 한두 명씩 그의 곁을 떠나자 최후수단으로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게 됐다는 것이다. 조만간에 자신의 정통태권도가 새로 발족한 세계태권도연맹(WTF)에 의해 완전 말살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1980년 해외 태권도 시범을 통해 북한에 첫 태권도를 전파한 유래가 된 것이다.

최홍희 총재는 방북 전 미 대표 세레프 등 외국 선수들에게 “머리를 장발로 하거나 염색을 해도 좋고, 복장도 맘대로 입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는 “북한에 자유의 바람을 넣어주기 위해서”라고 말해 외국 사범들도 안심하고 따랐다는 것이다. 사실 최홍희에겐 태권도가 전부였다. 그는 “북한도 태권도 행사만을 위해 방문했을 뿐, 평양에 10일 이상 머문 적이 없다”고 내게 말했다. 1975년부터 캐나다 시민권자였다. 토론토 중심으로 태권도 전파를 위해 세계를 뛰어다닌 전직 장군이요 무도인일뿐이다. 그는 평양에 닿자 첫 일성이 “나는 태권도 스포츠맨일 뿐이니 절대 나를 정치에 결부시키지 말아 달라”고 다짐부터 했다.

평화적 통일구호
평화적 통일구호

최홍희 총재처럼 “월북자”라느니 “빨갱이” 소리를 많이 들은 한인교포도 드물 것이다. 북한에 태권도 보급 이후는 더욱 그랬다. 교포사회에선 늘 친북인사의 대명사였다. 미국으로 망명했다 월북한 최덕신 전 외무장관과 같은 장군 출신이고 가까운 사이였던 점도 있다. 아무튼 그에 대한 친북인사 오해는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그는 근 40년 만의 방한신청 때 김대중 정부에 큰 기대를 걸었다. 정우진 사장(미주 태권도타임스 발행인) 등 북미 한인태권도인 중심으로 7-8명 수행단원 명단도 짜 놓았다.

내게는 “자네는 수행인 명단에는 빠졌지만 그때 한국에 나와 합류토록 하게”라고 말했다. 그는 방한승인을 기정사실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종전과는 달리 야당지도자 출신 대통령이라 입국 승인이 쉽게 나오리라고 판단했다. 한국의 김완용, 김선하 장군 등 대한민국 초창기 창군 멤버 등과도 활발히 연락을 취하는 등 방한 준비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한쪽에선 “지금 김대중은 남북문제를 두고 김정일 눈치를 잔뜩 보는 판국인데, 김정일이 자신의 편으로 생각하는 최홍희를 남쪽에서 쉽게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우려는 곧 현실로 돌아왔다. 김대중 정부는 “대한민국에 공식 사과 성명부터 발표한 뒤 입국승인을 받아라”하는 답신이 왔기 때문이다. 방한 문제는 싱겁게 무산됐다.

나중 최총재는 2차 암 수술 등을 위해 북한병원을 택했고, 결국 병원에서 유언과 함께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이 때문에 김대중의 당시 최홍희 거부 건에 아쉬움이 크다. 최총재는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지만 캐나다 유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부인 한춘희(92세) 여사는 “나는 토론토 근교에 따로 내 묘소를 마련했다”며 “자녀들도 전부 토론토에 묻힐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한편 최홍희 사후 국제태권도연맹(ITF) 창헌 연구회(위원장 김훈)에선 최홍희를 독립유공자(일제시 평양학병주모자)로 신청했으나 부결됐다.

송광호 태권도 2단증(앞면)
송광호 태권도 2단증(앞면)

생전 최 총재는 한인교포들에 대해 부정적 시각이 컸다. 평소 그는 “한국에서 직장도 못 잡고 나온 무능한 이민자들 주제에, 내게 무슨 시비를 거느냐?”며 교포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나를 보곤 “아. 자네는 말고”하고 덧붙였다. 이민 당시 나는 국영업체인 한국전력 업무직원이었다. 당시 한전은 반관반민회사로 손꼽는 직장 중 하나였다. 이참에 한국기업에 대해 알고 싶은 의문점이 있었다. 한국 최고직장으로 선망한다는 ‘삼성’의 은퇴 부문 관련한 궁금증이다. 근 반세기 전 한국을 떠난 나는 일반적 회사은퇴 경우만 알고 있는 때문이다. 그간 한국 형편이나 변화를 잘 모르니, 내 무식한 소치라면 이해를 바란다.

한국에서 70년대 초 직장생활을 할 때다. 당시 내 또래 친척과 고교동기들도 비슷한 시기 여러 직장에서 일했다. 이민 후 훗날 은퇴한 지인들을 만났을 때 유독 삼성에 근무했던 친구들은 달랐다. 부사장 등 회사 고위직을 그만둘 때 탄탄한 업체 하나씩을 챙겨 갖고 나오니 궁금증이 들었다. 그러한 지인들을 결코 배 아파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가까운 친척이고 친구이니 축하해줄 일이다. 그러나 삼성 고위급 은퇴간부들이 어디 한두 명뿐이겠는가. 물론 해당 인물들의 일부이긴 하겠지만 그들이 차린 회사 규모는 소규모가 아니었다. 이는 또한 내게 재벌그룹의 공인된 반칙 같아 보였다.

이런 식이면 한국 자영업자인 중소기업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벌기업에서 고위급퇴직자마다 자생적인 중소기업을 만들어준다면, 문어발 같은 끼리끼리 그들 인맥으로 사회는 서서히 삼성공화국화되지 않겠나 하는 황당한 생각까지 들었다. 허긴 대한민국 대통령 경우는 정식 의회에서 임기 후를 위해 수십억 이상 마을까지 마련해 주는 판국이니 할 말이 없다. 공식적으로 국회 예산을 세워 당당히 시행하니 누가 입이나 벙끗하겠는가. 캐나다 의회 경우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미국 의회에도 전직 대통령 임기 직후 예산을 편성해 평생 거처할 주택지를 마련해 준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다.

국제여성의 날 대행진
국제여성의 날 대행진

글이 본래의 주제를 많이 벗어났다. 그때그때 두서없이 쓰다 보니 사족 내용이 길어졌다. 그간 내 나름 경험과 지난 자료, 팩트에 의존해 썼지만, 사실을 벗어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제 소개하는 탈북자 K노인 가족 스토리는 본명 그대로를 싣는다.

탈북 여성 강원옥씨는 지난해 말 90세 일기로 천안에서 타계했다. 서울 중구 삼각동에서 소위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7남매 다섯 자매 중 둘째 딸이었다. 부친 강일성씨는 일제 강점기 조선과 중국 상해에서 큰 기업가로 이름이 날렸고,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다고 한다. 이름 확인을 위해 인터넷 검색에서 ‘일제시대 강일성’(‘강’은 편안할 강)을 찾았으나 자료가 많지 않았다. 당시 동아일보에 실렸던 대표적인 ‘강일성’ 내용 하나를 발췌해 전한다.

[책갈피 속의 오늘] 1921년 서울 청년회 발족

··· 1923년 5월 동아일보도 지령 1000호 기념행사로 ‘가장 인망이 있는 현대 인물’에 대한 지상 투표를 벌였다. 사실상 민족지도자에 대한 인기투표인 셈. 조선 민중의 관심은 뜨거웠다. 흥미가 극히 많은 새 시험이어서 일반사회의 기대가 심히 간절하다. 요사이 어느 곳에 가든지 이 인물투표가 반드시 이야깃거리가 된다. 1차 집계 결과 해외독립운동가 이승만이 49표로 1위, 그 뒤로 최린 25표, 안창호 22표, 최남선 18표, 서재필 17표, 이춘재 12표, 이상재 10표, 이동휘 7표, 여운형/*강일성* 각 6표. 이승훈/김원봉 등 각 4표, 김좌진 3표. 3.1운동 민족대표와 항일단체의 지도급 인사가 망라됐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결과를 알 수 없었다. 일제 당국이 ‘치안에 방해된다’며 관련 기사를 삭제해 버린 것. 여론조사도 중단됐다. 일제가 ‘결과발표를 제한하겠다’고 하자 동아일보는 ‘그러면 투표의 공정성이 사라진다’며 반발했기 때문···(동아일보 2006.1.)

부친 강일성(1901-1963)에 관련한 샌프란시스코 거주의 3째 딸 강원숙(89/이화여대 교육과)씨는 “아버지는 상해에도 7년간 있었는데 고무, 알루미늄 회사 등등 여러 사업을 했고, 서울교육기관에도 후원금을 많이 냈어요. 해방 후 무교동으로 이사했는데 사랑방엔 늘 조병옥, 장택상씨가 놀러 왔고, 군인인 채병덕 씨도 가끔 들렸습니다. 또 아버지는 우리와 한동안 함께 살지 않았어요”하고 전했다. 또 강일성은 재력이 많아선지 해방 전부터 본 부인외 다른 여자가 있었다 한다. 일본 여자로부터 딸 하나를 두었고, 국악인 박귀희(1921-1993)씨와 수년간 살림을 차려 아들 한 명을 두었다고 한다. 박귀희씨는 나중 한국 예술학원(초대원장)과 국악예술학교를 만든 설립자다. 또 가야금산조 및 병창 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된 유명인사이다. 한국 최초의 병창 분야 보유자로 한국국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훗날 국민훈장 동백장과 모란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강원옥(탈북자/K) 가족은 기업가 부친 덕에 늘 풍족한 생활을 했다. 서울 학창 시절은 한강에서 청춘을 만끽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탁구와 발레, 무용에 소질이 있었다. 서울 배화여고에서 탁구 주장을 했고, 서울 야간무용학원에서 발레를 전공했다. 여름엔 수영과 겨울엔 스케이팅으로 첫 애인도 사귀어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한 때 갑자기 6.25전쟁이 터지면서 그녀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19세 때였다.

인민군이 서울을 함락했을 때 K는 친구 몇 명과 북에서 내려온 예술단(조선인민군 협주단)에 들어가 무용 배우생활을 했다. 전시 속에서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예술단에선 한 달간 머무는 동안 월급과 숙식을 보장받아 생활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것도 잠시 예술단은 평양으로 철수한다며 짐을 싸고 준비를 했다. “그때 집으로 작별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어머니 말이 ‘아프다고 핑계 대고 중간에 집으로 돌아오라’고 약까지 줬는데 그 기회를 놓쳤어요.”

그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K는 일가친척 한 명 없는 북녘땅에서 외로운 인생행로를 시작해야 했다. 남북길이 영영 끊겨 하루아침에 고아 신세로 변한 것이다. 남조선 출신 성분은 개밥에 도토리처럼 됐다. 한번은 예술단 민청(민주주의 청년동맹)에서 분조장 선거가 있었는데, 상급 기관에서 K를 제거하기 위해 의도됐다 한다. “그 동무가 언제 우리에게 총부리를 돌릴지 어떻게 알겠소?”하며 노골적으로 K를 지목해 찬성, 반대 손을 들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녀를 옹호해 넘어간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노동당에 입당해 ‘당원증’을 따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이유는 남반부에서 학교를 제대로 다녔고 집이 부자라서 성분이 안 좋다는 이유 때문이다. 남한에서는 가난해 학교를 못 다니고, 고아라든지 집안이 어려워야 당원 되기가 수월했다. 그러는 와중에 생각지도 않던 무용단 단장(남자배우)이 K에게 구혼을 해왔다. 결국 그의 끈질긴 호소 앞에 인생의 반려자로 혼례를 치렀다. 초가을 어느 날 들국화 꽃다발을 들고 잔치상을 마주하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날따라 그리운 남쪽 가족 생각에 목이 메어 말조차 힘들었다.

(왼쪽 상단에서 시계방향으로) 북 마전 해수욕장, 씨름대회 황소 상, 북 농악무도대회, 평양소년바둑대회.
(왼쪽 상단에서 시계방향으로) 북 마전 해수욕장, 씨름대회 황소 상, 북 농악무도대회, 평양소년바둑대회.

K는 30대 중반에 두 아이 엄마가 됐으나 당원이 꼭 되려는 의지를 접을 수 없었다. 평양예술단에서는 내 입당이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딸자식을 시댁에 맡기고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전방부대 하전사로 지원했다. 누구도 생각 못 하는 기막힌 본인 처사였으나 K고집에 어느 군부대 탁구지도원으로 훈련생들을 지도하게 됐다. 2년간 하전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당원심사에 또 떨어지자 평양예술단으로 돌아와 상급 기관으로 달려가 눈물로 하소연했다. 그간의 K 사정을 잘 아는 동료 단원들도 모두 K를 위해 나섰다. 겨우 후보당원이 됐다.

그럴 때 김정일이 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에 근무하며 당 유일사상체계 운운으로 평양에서 지방으로 일부 시민들을 소개했다. 그 명단 속에 남편이 끼게 됐다. 부인 K가 남반부 출신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때 처음으로 주민들 가슴에 김일성 배지를 달게 하고, 김일성동지 혁명사상연구실을 만드는 등 당 사업을 요란하게 벌일 때였다. “예술의 순결성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배우 계급성과 출신 성분을 가린다”며 일부 시민들을 지방으로 내려보내는데 K 가족이 포함된 것이다.(계속)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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