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6] 북한 가족에 LA교포 유산을 전달해 달라고?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6] 북한 가족에 LA교포 유산을 전달해 달라고?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3.22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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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평양 전경

10여 년 전이다. 토론토의 Y씨가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1960년대 말 미국으로 유학 왔다 캐나다에서 정착한 당시 60대 여성이다. “송 기자님! LA에서 어느 미 고위(국장)은퇴공무원이 북한에 사는 가족에게 교포유산을 전달해 줘야 한다고 연락이 왔는데 찾아줄 수 있나요? 북한주소는 갖고 있어요.” “그걸 왜 갑자기 캐나다에 사는 내게 물어요? LA는 정식 북한창구도 있고, 또 북에서 신임 받는 교포들도 많은데. 그들을 통하면 가능할 텐데요. 나는 못 해요.”

그래도 Y는 계속 말했다. “그 미국인이 나름대로 LA 한인사회에 수소문해 북한 관련 된 사람들을 소개받았다는데 모두 실패했대요. 캐나다에도 누군가에게 시도했는데 안 됐다며 어떻게 내게 연락이 왔어요. 나야 북에 친형제가 있지만 한 번도 못 가본 사람이잖아요. 문득 북한에 여러 번 다녀온 송기자님 생각이 나서 연락한 거예요.” “나야 취재 일로 다닌 거고. 사람 찾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지요.” “하여튼 찾는 북한가족은 LA에 살던 목사님 직계가족(부인과 아들)인데, 20여 년 전 북에서 가족상봉 후 심장마비로 죽은 김 목사님 식구들이에요. LA에서 가장 큰 영락교회에요. 목사님이 세상 떠난 지 오랜데 이제야 유산(현금) 문제가 대두됐네요.”

그 LA목사라면 당시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1973년 LA영락교회를 설립한 김계용 목사였다. 그를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주변에서 덕망이 높았다. 영락교회를 LA교포사회에 최대 규모로 우뚝 세운 존경받던 성직자였다. 1990년 여름 방북 중 돌연사로 인해, 미주교포사회에 한동안 큰 화제가 됐었다. 6.25전쟁 때 고향 평안도에 부인과 4자녀 등 가족들을 전부 남겨두고 홀로 월남했다. 이후 3.8선 단절로 40년간 남쪽과 LA에서 오직 독신으로 살아온 목사였다. 1980년대 후반 노태우정권 때 해외동포들의 북한방문이 허용되자 90년 고향을 찾았다. 그러나 가족을 만난 후 북에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 때문에 북에서 독살 당했다느니, 한때 LA교포사회에 여러 억측이 난무했었다.

LA(나성)영락교회

내게 연락 준 Y는 남북한을 대표하는 각각 두 조류학자 친척이었다. 이들 조류학자는 부자지간(북한아버지 원홍구와 남한아들 원병오) 으로, 그들 부자는 ‘새’를 이용해 국경 넘어 서로 소식을 주고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내가 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 시기 평양애국열사릉을 방문했을 때, 열사 릉 안내원이 알려준 사실이다. 릉 안내원은 묘소들마다 설명하다 한 묘소(원홍구 박사)앞에 멈춰 서더니, 남북한 부자지간 조류학자의 새 교류얘기를 흥미롭게 들려줬다. Y는 아들 원병오 박사의 친조카였다. 남쪽 조류학자인 원병오 박사는 경희대 생물학 원로교수였다. 캐나다 귀국 길에 한국에 들러 원박사에게 전화했다. 그에게 부친 평양묘소사진을 찍어왔다 하니, 당장 만나자고 뛰어나왔다. 둘이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소주와 생선회를 시켜놓고 취하도록 마셨다. 원 박사는 “정말 고맙소. 부친묘소 사진은 내게 백만 불짜리나 다름없소”라며 지난 북한시절 얘기를 들려줬다. 옛 상념에 젖어 스스로를 ‘여로인생, 인간 철새’라고 불렀다. 그때 “토론토에 조카딸 Y가 살고 있다”고 알려줘 연결된 것이다.

원 박사는 또 “나는 박정희 포병장교(대령)시절 전속부관(중위)이었지. 육 여사가 나를 박근혜 이복언니 박재옥씨와 중매 결혼시키려 했지만 나는 공부를 계속해야한다고 사양했소. 다음 한병기 전속부관이 박재옥과 결혼하고, 박대통령 때 주 캐나다대사 등 외교관 길을 걸었지.”하고 지난 사연을 전해줬다. 10여 년 후 원 박사는 토론토를 방문해 Y부부와 함께 만났다. 그 후 늘 소원하던 평양방문이 이루어져 반세기만에 친척들을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병오 박사(새 박사)

Y에 따르면 LA미국인이 북한가족을 찾는 것은 ‘유산상속문제’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시민의 유산 관련해 사망자의 직계상속인이 해외거주경우 미 정부가 그 거처를 밝혀내 유산금액을 전달하고 일정수수료를 받는다는 것이다. 만일 해외 유산상속자(직계) 행방이 불명이고 연락이 끊겨 못 찾을 경우, 일정기간이 지나면 유산은 자동적으로 미 국가재산으로 귀속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이런 내용을 아는 공무원 은퇴자들은 커미션(수수료)을 위해, 해외거주 상속인 정보추적에 애를 쓰고 있다고 설명해 줬다.

Y는 “북한은 미국과 국교가 단절돼 있는 상태니, 북한을 왕래하는 교포를 찾고 있는 중”이라며 “유산금액이 10만 달러가량 된다”고 밝혔다. 또 “북한가족은 유산 커미션(수수료)를 제하더라도 상당금액이 전달될 것”으로 추측했다.

“좋아요. 한번 사람을 찾아는 봅시다. 북한가족과 연락되면, 직계라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 등도 필요하고 또 비공식으로 개인을 통해 알아봐야 하니 비용이 들 텐데, 그건 누가 경비를 낼 겁니까?”하고 물었다. Y는 “큰돈 아니라면 내가 먼저 지불할 수 있어요. 일단 찾아줄 사람부터 알아보면 좋겠어요.”

배리 실버 미국인(유태인, 유산 관련)

나는 유산관련 한 내용을 더 물었다. “가족에게 유산을 찾아주면 미국인 커미션은 얼마나 되고, 또 심부름을 해준 우리에겐 얼마가 나와요?” Y는 “미국인 수수료는 30%라고 해요. 나는 거기서 또 쪼개야겠지만, 확실한 금액부분은 정하지 않았어요. 일이 성사되면 미국인에게는 수수료가 3만불 이상 돌아가니 내게도 어느 정도 나오겠지요. 최소 1만 달러 이상 예상해요. 미국인은 LA에서 가만히 앉아 서류정리 역할만 하는 거고, 우리는 사람 찾는 일부터 시작해 실지 모든 일을 감당하는 거니까.” “그건 혼자 생각이시고요. 만일 일이 시작되면 미국인과 수수료문제는 서류계약을 못하더라도, 꼭 구두약속이라도 분명히 해두세요.”하고 더 이상 언급을 안 했다. 우선 사람 찾는 게 급선무인데 돈 얘기만 자꾸 꺼낼 수 없었다.

캐나다에는 부탁할만한 사람이 머리에 안 떠올랐다. 미 동부지역에 사는 한 이산가족인 노장파 지인에게 연락을 했다. 평소 나는 그를 형처럼 대했다. 그는 북한가족으로 인해 자주 평양을 오가는 절친한 사이였다. 재력도 있었다. “송 기자는 왜 늘 남의 일에 끼어들기를 좋아하나. 그냥 내버려두지, 골치 아파요.” “어려운 북한가족 도와주면 좋잖아요. 거긴 힘든 환경일 텐데 정당하게 유산을 받게 된 좋은 기회지요. 주소도 있고요. 한번 LA 김 목사가 고향까지 갔다 그곳에서 사망했으니 가족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이런 경우 평양에서 사람을 사서 지방(현지)까지 보내야 돼. 북한은 돈만 있으면 다 통하긴 해. 평북 정주라고 했나?” “예. 김소월 시인 고향 평북 정주. 경비는 얼마나 들겠어요?” “사람 사서 보내는 일이야 1백 달러면 되겠지. 북에선 1백 달러도 큰돈이야.” “그럼 가족관계 서류작성 등 3백 달러를 먼저 은행으로 부칠 테니 속히 알아봐 주세요. 시간도 많지 않다는데. 벌써 서너 번 미 국고에 자동 귀속되는 유산문제를 연장해 놓았답니다. 바깥세계와 차단된 북한이니 특별연장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북한 평양 고려법률사무소

운이 좋았다. 살다보면 쉬운 일도 이상하게 막힐 때가 있지만, 어려운 일도 의외로 쉽게 풀릴 경우가 있다. 어떤 행운이나, 인연을 가졌느냐에 달렸다. 미주지인도 이산가족이기에 동변상련으로 무리를 해서 신경 써 준 것 같다. 아무리 북한을 자주 다니는 해외한인이 많아도 비즈니스나 정치성을 지닌 교포들에겐 이런 부탁은 백번 해봐야 관심 두지 않을 것이다.

수개월 후 북한에서 현지에 보낼 사람을 구했다고 연락을 받았다. 일은 은밀하게 진행됐다. 6개월이 지나 LA에 강원도 농수산물 취재일로 갔을 때다. 코리아타운에서 북한가족 찾기를 의뢰한 배리 실버(Barry Silver)라는 은퇴미국인을 만났다. 그는 유태인이었다. 그에게 진행상황이 낙관적이라고 알려주고, 다른 법률적 내용을 확인했다. 유산 수수료얘기는 거론 안 했다. 수수료부분은 그와 Y와의 관련사항이라,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북한 서류가 완비되고 거의 작업이 끝나가는 도중 잠깐 주춤했다. 미 정부에서 김계용 목사 부부의 결혼증명서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결혼증명서는 북미사회와 달리 남이나 북에는 그러한 증명서식이 따로 없다. 이 때문에 얼마간 시일을 끌었다. 한편 그간 필요시마다 조금씩 소요된 경비가 근 2천 달러에 육박했다. 대부분 북쪽관련 인건비 등이다. 비용은 토론토 Y가 전액 부담했다. 알고 보니 미국인 유태인은 일전 한 푼 미리 투자한 돈이 없다고 한다. 대신 토론토 Y가 북한가족 찾는 일에 앞장서 지속적으로 돈을 댄 것이다. 참고로 Y와 미국 지인 두 사람 연락처를 공유했다. 경비가 관련한 사항이니 오해가 없고, 빠른 소통을 위해서였다. 북한관련사항이니 세부적 과정내용은 언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해를 바란다.

고 김계용 LA 영락교회 목사

마침내 북한으로부터 가족관계 등 모든 서류 원본을 전달받았다. 평북 정주 시 동사무소 인민위원장이 발행된 증명서들이다. 직계인 부인 리진숙과 아들 김광훈 두 사람의 거주 중명서, 인감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등이다. 나는 북한도 남한과 같이 동사무소 행정구조가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서류는 모두 영문으로 공증받아 LA로 보냈다. 결혼증명서는 남북한에 그런 서류양식 자체가 없으니, 미 어느 유력 한인 대학교수가 대신 보증을 해서 해결됐다고 들었다.

2007년인가 평양에는 첫 고려법률사무소가 모란봉구역 서흥동에 설립됐다고 들었다. (나중 중구역 대동문동으로 이전). 이제 유산상속전달 건은 중국 북경에 나와 있는 북한 고려법률사무소를 통해 유산(현금)만 전달되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양국 법률사무소가 유산 수수료 관련한 이견으로 중단이 됐다. 중단기간이 3개월 이상 걸렸다. 당시 미 법률사무소 측은 유산 수수료 공제를 45% 요구했고, 북측은 25%를 주장했다. 속으로 ‘유태인이 역시 지독하구나. Y에게서 당초 유산 커미션(수수료)을 30%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45%로 올렸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잘못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45% 수수료는 내겐 무리한 요구로 보였다.

사실 해외 한인교포의 유산이 북한가족에게 이렇게 정식 전달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사례였다. 내 기억엔 해외 든, 남북 간 이런 경우를 단 한번 겪은 예가 없다. 반면 김 목사 유가족이 거주하는 평북 정주 시 김희숙 인민위원장 확인서류에 따르면, LA 김계용목사는 1990년 8월25일 북한 신의주(형수 집과 부모묘소 방문후)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사인은 ‘급성 심장기능 부전증’이다.

마침내 미 법률사무소 측이 그들의 수수료 조건을 3분의 1로 내렸다. 북한 측은 이를 전격 수용함으로서 약2년 남짓 끌던 김목사 유산 작업이 막을 내렸다. 유산 10만3천여달러에서 북한 측은 6만9천여달러, 미국 측은 3만4천여 달러였다.

평양 식당 풍경

이제 배리 실버 미국인 유태인이 토론토 Y에게 분배해 줄 돈 계산만 남았다. 미국인은 Y에게 2천 달러 수표를 보냈고, 기대했던 Y는 실망해 투덜거렸다. 이 역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좋은 실례였다. 하지만 이는 유태인보다 명백한 Y의 실수였다. 수수료 관련해 상대방과 일체 약속이 없었고, 어리석게 상대방 처분만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 LA미국인(유태인)은 내게 이렇게 전했다. “Y는 내게 2천 달러 비용이 들었다고 해서 그 돈을 송금한 것뿐이다. 처음부터 아무 요구조건 없이 시작한 일이다. 동족 일이라 순수하게 돕는 줄 알았다. Y와 수수료 약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냉정히 말했다.

김계용 목사의 북한가족 유산전달 기사를 연합뉴스 왕길환 기자에게 보내, 세상 밖으로 밝혀졌다. 김정일 시대 지방주민에게 근 7만 달러 되는 유산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북한당국이 유족에게 얼마만큼 유산을 전달해 줄지 모르겠다. 유족에게 생활의 요긴한 용도로 쓰이길 기대한다.

그동안 뒤에서 핵심역할을 해준 미주지인에게 전화했다. “그간 수고 많으셨어요. 어떻게 결과가 이상스레 돼 유태인 좋은 일만 시켜줬네요. 수고만 하시고 수고료도 일절 없이 죄송합니다. Y가 미안하다고 받은 비용 2천 달러 중 얼마라도 내놓겠다는 걸 그만두라 했어요··· 근데 유족들이 유산을 제대로 전달받을까요?” “잘했네. 글쎄. 유산 문제야 송 기자가 더 잘 알 텐데. 뭘. 아무튼 서로 욕봤네. 하하.”(계속)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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