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7]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무참히 살해당한 선교사 부부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7]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무참히 살해당한 선교사 부부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3.2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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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하바롭스크 아무르 강

1995년 하바롭스크의 봄은 늦게 왔다. 계절은 3월 하순이건만 차디찬 기운은 그대로였다. 분위기는 늘 무겁고 암울했다. 도시에는 어두운 색깔의 드넓은 아무르강이 흘렀다. 이 강줄기는 중국 하얼빈까지 뻗친다. 중국에선 이 강을 흑룡강이라 불렀다. 모스크바 특파원시절 이 하바롭스크를 2번 방문했다. 러시아지역 일제관동군에 징병된 조선인발자취 추적을 위해, 한 번은 탈북벌목공 관련 취재 등 때문이었다.

하바롭스크는 시베리아관문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북한은 지난 1960년대부터 오랜 세월 구소련(러시아)과 삼림벌목계약을 맺었다. 이 때문에 하바롭스크에는 시베리아로 파견된 북한벌목공 수천 명이 들락거렸다. 한때 벌목공들은 약 2만 명에 달했다. 이 벌목작업 활성화를 위해 하바롭스크 시에는 오래전부터 북한임업대표부와 경제대표부 두 건물이 존재했다. 한참 세월 지난(구소련 붕괴)후 하바롭스크에 진출한 한국정부로선 어느 소속기관 하나 없었다.

지난 1993년 6월이다. 이 스산한 하바롭스크 땅에 미 버지니아에서 한 한국계 의료선교사 부부가 부임했다. 미 시민권자인 이주헌 심장의(당시 60세) 박사부부였다. 그들은 연세대를 나왔고, 부인 이계월 씨는 간호사출신이다. 구소련붕괴 후 한국과 외국종교기관들이 러시아전역에 쏟아져 들어올 시기이다. 하바롭스크 등 극동지역에도 무려 17개나 되는 한국계 종교기관이 주에 정식등록 후 적극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주헌 선교사는 1972년부터 20년간 미 버지니아에서 개인병원을 개업해 심장 내과전문의로 일해 온 독실한 개신교인이다. 이들 부부는 미 동부 버지니아 거주 때 교회창립멤버로서 한인침례교회(Tidewater Korean Baptist Church)를 세웠다. 그러다 잠시 미 의료생활을 접고, 93년 6월 미국 남 침례교단으로부터 의료선교사자격으로 러시아 현지에 파송된 것이다. 하바롭스크 의과대학(Khabarovsk Medical Institute) 방문 초빙교수도 겸직했다.

이주헌-이계월 의료선교사부부

러시아현지에서 이주헌 선교사(심장의)의 하바롭스크 선교봉사는 다른 어느 한인목사들보다 단연 돋보였다. 개인재력과 의술로서 당시 곤경에 처한 현지주민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기 때문이다. 곧 의인으로 소문이 났다. 현지에 침례교회를 세우자 환자와 러시아 교민이 몰려들었다. 그는 하바롭스크 의과대학에서 심장학을 가르치며, 틈틈이 연구생활도 했다. 한편 교회선교를 통해 인근의 탈북벌목공들도 은밀히 도왔다. 어느 틈에 ‘탈북자 대부’, ‘탈북자 아버지’라는 소문이 퍼졌다. 당시 내 가까운 지인 역시 하바롭스크선교사로 체류해 있어 현지내용을 전해줘 알게 된 사실이다.

선교사로서는 바로 코앞에 북한기관요원이 상주해 있는 상황에서 탈북자를 돕는다는 사실은 극히 위험스런 행위였다. 북측은 시베리아벌목장에서 탈출하는 벌목공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자, 탈북자를 돕는 한국교회들을 주목하게 된다. 북측은 자체조직으로 체포조를 만들어 극동지역을 뒤지고 24시간 주변을 감시하던 시절이었다.

이주헌 선교사는 그러한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만 2년간 선교생활을 보냈다. 1995년은 마지막 선교활동을 마무리를 짓던 해였다. 그해 가을 선교사생활을 청산하고 미 버지니아로 귀향하는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전인 3월 하순 마침내 우려됐던 참극이 발생한 것이다. 북한 측 소행으로 여겨지는 위장벌목공에 짓으로, 선교사부부가 무참히 살해당한 것이다. 평소 이 선교사가 도와주던 위장탈북자로부터 당한 비극적 사건이었다.

피의자인 송창근은 며칠 후 곧 체포됐다. 그는 이주헌 선교사가 집으로 불러 6개월 이상 성경을 가르치고, 매달 생활비 30만 루불과 옷가지 등을 챙겨주던 탈북벌목공이었다. 러시아경찰에 따르면 “송창근은 살해사건 후 살인현장을 배회하다가 불심검문으로 체포돼 심문결과 자신이 살인범임을 자백했다”고 밝혔다. 주변에선 송창근은 이중 스파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주헌 선교사 러시아 어린이 진찰

러시아경찰조사로는 범인 송창근이 ‘이주헌 선교사가 송을 한국에 보내준다고 약속했는데, 이를 어겨 실망 끝에 중국조선족 2명을 1백 달러씩에 고용해 청부 살인케 했다’고 실토했다는 것이다. 범인이 송창근 임이 밝혀지자, 교회주변에선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늘 돌봐주던 은인을 살해할 수 있느냐”고 경악했다. 그러나 일부 고려인 교인들은 “송은 처음부터 탈북벌목공이 아니었다”며 “그는 북한 프락치(스파이/공작원)로서, 북측은 그를 이용해 계획적이고 치밀한 청부살인을 도모케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러시아풍토는 소액비용으로 청부살인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송창근 자백내용은 러시아신문에도 공개됐다.

러시아 경찰 측도 “북한에서 제출한 70여명 수배자(탈북자) 명단에 송창근 이름이 없는 점, 러시아어가 능통하고 탈북도주자로서 두려움이 없는 점, 그가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 타 지역을 자유로이 다닌 점” 등을 지적해 북한공작원으로서 정체성을 의심했다. 또 러시아경찰은 살해현장인 이 선교사아파트에 상당액의 미화(17,000달러)와 귀중품(보석류 등), 신용카드와 여권 등이 그대로 남아있고, 집안집기 등이 정돈된 채로 있는 점으로 미루어 원한에 의한 살인사건으로 단정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처음으로 미 국적시민이 러시아에서 피살된 사건이라 수사관계자를 하바롭스크에 보내는 등 무척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미 언론 등은 이 사건이 북한 특수부의 테러공격으로 간주했으나,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러시아 미 대사관의 진상규명요구로 러시아 측은 ‘특별조사팀’을 구성해 피의자를 어렵지 않게 잡았으나, 그 피의자를 북측에 곧 인계함으로서 사건이 미궁에 빠진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러시아 세고드냐 지등 일부 러시아 언론에서는 ‘북한인 살인범 석방’이라는 제호아래 사건담당이었던 하바롭스크 검찰청 강력계 여반장인 리디아 지야코노바의 처사를 비난한 기사를 본적이 있다.

북측은 송창근을 인계받자 얼마 후 ‘송창근이 곧 자살해 시체를 아연관에 실어 평양으로 송환했다’고 러시아 측에 통고하고, 사건을 종결시켰다. 당시 북한과 러시아 간에는 시체송환 때도 법의학적 심사나 세관검사 없이 자유로 왕래하는 관례로 돼 있었다. 또 시베리아 북한벌목장은 오랫동안 ‘인권사각지대’로서 러시아경찰도 손 못 대는 북한관할의 ‘치외 법권’ 권한지역으로 인정돼 왔다. 이주헌 선교사 피살사건으로 인해 하바롭스크 지역 내 한국 개신교회들의 탈북자와의 접촉과 활동이 크게 위축됐다고 전해졌다.

이주헌 선교사부부가 거주했던 미 버지니아 (버지니안 파일럿) 신문에선 이 피살사건을 대서특필하고, 당국에 강력한 진상규명을 촉구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미 버지니아 한인침례교회에서는 이주헌 선교사 피살 후 담임목사가 하바롭스크를 방문했다. 그때 그 목사는 현지 러시아의 한 정보기관원으로부터 ‘현재 송창근이 북한에 들어가 훈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모두가 추정일 뿐, 확실한 증거가 없는 얘기만이 난무했다. 한편 피살당한 이주헌 선교사 부부사이엔 자녀가 일체 없었다. 미 버지니아에 남겨둔 자택 등 사후재산 40만 달러 전액은 다니던 한인침례교회에 기부됐다.

평양 봉수교회(북한 최초 개신교회)
평양 봉수교회(북한 최초 개신교회)

나는 현지에서 예카테리나 (일명 카추샤)라는 당시 84세의 고려인 노인을 만났다. 남봉식 이라는 같은 80대 노인이 “자신은 이주헌 선교사 침례교인(고려인)”이라며 그 카추샤 노인을 소개했다. 남 노인은 해방 때 입대한 소련군을 따라 북한 기술자로 들어갔다가 58년 소련파 숙청 때 병을 핑계대고 하바롭스크로 나와 정착한 고려인이었다.

카추샤노인은 그녀 집을 방문한 내게 “한국기자는 당신이 처음”이라며 “나는 이주헌 선교사로 인해 침례교인이 됐고, 송창근 등 탈북자 관련해 일부내용을 잘 안다”고 말해줬다. 당시 “송창근을 한때 내 집을 은신처로 6개월간 숨겨줬다 내보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 말은 “송은 성격이 아주 포악하고, 자신이 탈북자라면서도 전혀 겁 없이 밖으로 쏘다니고, 다른 탈북자얘기가 나오면 ‘그놈들 다 잡아 죽여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했다. 또 “피살사건 관련한 다른 얘기도 들려주겠다”며 그간 탈북자 관련한 스토리를 털어놓았다.

내가 옛적 ‘이주헌 피살사건’을 새삼 거론하는 것은 당시의 이 비극이 미궁 속에 유야무야 종결돼 버린 아쉬움 때문이지만, 그보다 카추샤 노인이 말한 내용이 완전히 묻혀 버린 이유도 있다. 사건 관련 해 카추샤 노인이 실지로 겪은 당시 일 등과 현지에 벌어졌던 사항을 짧게 밝힌다.

그전 이 피살사건을 다루며 한 가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옛 김형욱 실종사건이다. 김형욱은 박정희 정권시절 6년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중앙정보부장이었다. 그는 73년 미국으로 망명해 미 하원청문회에 박통에 불리한 증인으로 출석하는 등, 당시 박 정권 눈에 가시였다. 미 한인사회에서도 평판이 나빴다. 할일 없이 늘 카지노나 드나들며 하루에 엄청난 숨겨 나온 돈만 낭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열심히 어렵게 살고 있는 교포사회에 좋은 인상을 줄리 없었다. 그럴 즈음 프랑스대사관의 ‘이상열’ 공사로부터 ‘며칠 놀러오라’는 카지노초대를 받고 파리에 갔다가 실종된 것이다. 전부 일반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이상열은 김형욱의 심복이었다. 그 때문에 김형욱은 그를 완전히 믿다가 함정에 빠진 것이다. 김형욱 실종 열쇠는 이상열이 100% 갖고 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함구하고 세상을 떠나, 실종사건은 끝내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

평양 혁신구호 행진

나는 지난 1987년 미 뉴저지를 방문 중 우연히 사건내용을 듣게 됐다. 박통당시 중정 대공수사국장을 지낸 S씨로부터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박정권 시절 세계 곳곳에 ‘중정선박이 상선으로 가장해 정박해 있다’는 것이다. 좋은 예로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됐을 때 옮겨간 데가 역시 상선을 가장한 중정소속 배였다’고 지적했다. 김형욱 역시 납치돼 파리 세느 강변 중정선박으로 끌려갔다고 말했다. 그 세느 강 이후 일은 이상열공사가 내용을 잘 알 것이나, 그러나 그는 살아생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김형욱을 한국으로 데려갔을지 모른다. 이상열 경우 비록 김형욱이 악명 높은 존재이긴 했으나, 그를 굳게 믿고 온 옛 상관을 죽게 만들었으니 마음이 늘 편치는 않았으리라.

하바롭스크에서 피살된 이주헌 선교사 사건도 열쇠는 송창근이 쥐고 있었다. 러시아 검찰이 북한 측에 그를 일찍 인계한 탓에 사건 실마리를 풀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시 하바롭스크 내 취재를 종합해 본 결과 역시 추정에 불과하다. 북한 측은 그들의 정보원이면서도 믿기 힘든 (송창근은 북 정보원노릇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한국에 망명할 뜻을 갖고 있었다.) 그를 앞세워, 살인청부 조선족 2명과 함께 이 선교사집에 찾아가 문을 열게 한 다음 송창근을 현장에서 쫓아버린 것이다.

그날 이주헌부부가 살해당했는데, 문만 열게 만들고 사라진 송창근은 며칠 뒤 뒷 소식이 궁금해 다시 이주헌 선교사집 근처를 배회하다, 잠복근무 중인 러시아경찰에게 체포당한 것이다. 카츄샤 노인에 따르면 송창근은 평소 자신의 이중적 행위 때문인지 북에서 처벌당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고 한다. 송창근은 가끔 그녀에게 “나 같은 처지는 러시아감방이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카츄샤 노인(고려인)은 처음엔 송창근이 불쌍한 탈북자라고 생각해서 6개월간 데리고 있었다한다. 집에는 백치인 외아들이 살고 있었다. 외아들은 똑똑했는데, 대학시절 뇌수술을 잘못 받아, 백치상태가 됐다 한다. 아들은 송창근을 볼 때마다 무서워하고 떨어 어느 날 아들 옷을 벗겨 봤더니,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송창근이 폭행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잖아도 성격이 잔인하고 건뜻 하면 늘 ‘탈북자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말해, 그가 진정 탈북자인지 의심하고 있던 중인데 그런 불상사도 생겨 “당장 나가라”고 쫓아버렸다는 것이다.

북한 평화구호 포스터
북한 평화구호 포스터

그리고 얼마 안 돼 남봉식 노인이 돕자고 데려온 탈북자가 H 벌목공 의사였다. 남 노인은 H 탈북의사가 외과의로 김일성 주치의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신뢰하기 힘든 말이었지만, 하여튼 H는 벌목공의사를 자원해 나왔다가 탈북자가 됐으며, 이미 두 번이나 탈출해 체포됐다고 했다. 두 번째 탈출은 북송되는 열차화장실 창문을 깨고 달아났다고 한다. H는 남 노인에게 피신처를 요청했고, 마침 송창근을 내 보낸 카추샤노인에게 부탁해 대신 H를 돕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한 달 후 우연히 송창근이 노인 집에 들렀다 H를 발견하자 즉시 북에 신고해 버려 H는 다음날 3번째로 체포당한 것이다.

북측은 H를 북으로 이송하기위해 북송열차를 기다리는 기간, 다른 탈북벌목공인 G를 잡는데 그를 이용했다. H를 앞세우고 G 집 문을 열게 만든 뒤 덮치는 계획이었다. 체포조 5명이 동원돼 G를 잡으려 했으나, G의 필사적인 반항에 부딪쳤다. 오히려 북측 2명이 G의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때 부상 당한 동료를 돌보는 사이 H와 G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주해 버렸다. 그 이후 H는 영영 잠적해 버렸다고 한다. 카추샤노인은 “약 한 달간 H와 함께 있었지만, 그는 송창근과는 완전 반대되는 선량한 사람이었다”며 “나는 H를 친자식처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송창근이 “이주헌 선교사가 H를 적극 돕고 있다”고 밖으로 발설하고 다닌 점이다. 이 때문에 노인이 송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욕까지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주헌 심장의가 내 집에 심장병 진찰을 왔을 때 꼭 한번 H와 마주쳐 대화를 나눈 것뿐이에요, 그때 이 선교사가 H에 대한 실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한의까지 잘 알고 있다고 칭찬했어요.” 그뿐인데도 송창근이 북측에 “이주헌 선교사가 H의 뒷 후원자”라고 줄곧 주장하니, 북측에서 평소 눈에 거슬리던 이주헌 선교사부부 제거작업을 단행한 것 같다고 짐작했다. 그나마 북측은 3번째 겨우 잡은 H까지 놓치고, 동료들까지 크게 다쳐 머리끝까지 신경이 예민한 상태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3년 국가인권위로부터 제65회 대한민국 인권상 표창을 받았다. 당시 외국시민권자로선 첫 대상자였다. 20년 전인 1994년 모스크바 유엔난민기구에 탈북자 등록창구를 첫 개설한 때문이다. 사실은 나보다 교류했던 월 스트리트 저널의 클라우디아 로젯 특파원 아이디어였다. 당시 탈북벌목공이 자료를 제공했다. 그때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은 내게 차후 시상범위를 외국시민권자(교포)도 포함시킨다고 말했다. 곧장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이 고 이주헌 심장의 선교사부부였다.

다음해 2014년 나는 고 이주헌 선교사부부 자료들을 수집해 제66회 인권상 표창신청을 했고, 마침내 그는 수상자들 중 한명이 됐다. 비록 그를 만난 적도, 대화 한번 나눈 적 없지만, 그는 위대한 의료선교사요, 순교자 중 한명이었다. 그 역시 20년 만에 인권수상자가 됐다. 이주헌 부부 선교활동을 엮은 “러시아 땅에 떨어진 두 밀알” 순교 자료집 위로 따스한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하바롭스크 강변공원(콤소몰 광장)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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